신앙과 지성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2권의 책 가운데 9월에 해당하는 책은 ‘종교개혁과 학문’이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토론문을 내걸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토론문을 내거는 것은 정기적으로 어떤 주제를 두고 토론하던 중세 대학의 문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학은 경제나 정치와 달리 학문을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학문과 종교개혁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학문’이라 하면 좀 거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학문은 학자들이나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학문은 누구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을 ‘학문의 전당’이라 부른지가 오래되었습니다마는 대학을 다니는 사람,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모두 학문을 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학문을 배웠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알려진 지식,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대학 과정에서 가르치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학문은 이보다는 좀 더 생산적입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되물어보고 그것들을 뒤집어 보고 새로운 것들을 더듬고 찾아가고 알아가는 과정이 학문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누구나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학문은 대학을 나온 사람에게도 그리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학문을 하는 사람이든, 예술이나 정치를 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지성과 이성을 사용합니다. 정치 현장에 주목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정치하려면 토론을 해야 하고 토론을 하자면 말을 해야 하고 말을 제대로 하자면 지성과 이성을 제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정치도 이런데, 학문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자면 지성과 이성을 어디에나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장 의문이 생깁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도 지성과 이성이 필요할까요? 따지는 것 없이, 생각 없이, 무조건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 아닐까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지성과 이성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과연 있을까요? 오늘은 이 문제를 같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1. 우리 한국교회는 자랑할 것이 많은 교회이면서도 동시에 문제도 많은 교회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반지성주의 문제입니다.
한국교회는 자랑거리가 참 많은 교회입니다. 무엇보다 한국 기독교는 선교초기부터 ‘성경 기독교’라고 부를 정도로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월요일 아침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5일 만에 통독하는 교회가, 과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를 빼고는 다른 곳에 없습니다. 성경 읽기뿐만 아니라 기도하는데 열심이고, 모이는 데도 열심입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매일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등 일주일에 열 차례가 넘게 교회에 모입니다. 헌금하는 데 열심이고 선교하는 데도 열심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곧장 ‘열심’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열심이 특심”인 교회가 한국교회이고, 열심은 한국교회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신앙은 열심인데, 삶이 따르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생각 따로, 삶 따로”는 사실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일반적인 성향입니다. 생각은 하면서, 제대로 알기는 하면서도 삶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믿는 것과 실제로 다르게 사는 것이 사람들이 보통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이러한 일반적 성향이 신학적 오해 때문에 강화되었을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른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의 영향으로 형성된 개신교 교회입니다. 아니, 여기서 줄곧 ‘한국 교회’라고 부른 것이 가톨릭교회가 아니라 한국 개신교 교회를 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교회에서는 가톨릭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선행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개신 교회 신자들도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지만 그것을 ‘선행’이란 관점에서 보지 않습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이것이 가져온 결과는 “신앙 따로, 삶 따로”라는 이상한 방식의 신앙생활의 관행입니다. 여기에는 교회와 세상, 성과 속의 관계를 잘못 이해해 온 것도 크게 한 몫 했을 것입니다.
길게 말할 수 없지만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루터의 ‘이신칭의’가 과연 “믿음 따로, 삶 따로”를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Tractatus de libertate Christianae, 1520)란 글을 읽어본 분이라면 도무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요약해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로 인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하나가 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마치 그리스도처럼 선한 행실의 삶을 살게 된다.”이 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선행은 믿음에서 필연적으로 우러나온 열매입니다. 따라서 만일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판단될 수 있는 행위가 뒤따라오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믿음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언급할 수 있는 문제는 상식의 결여입니다. 여기서 ‘상식’이란 예컨대 “미국의 행정 수도는 워싱턴 D.C.”라든지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든지 하는 것을 안다는 의미에서의 일반적인 ‘상식’(common knowledge)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남과 함께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가자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의식”이란 의미에서의 ‘상식’(common sense), 곧 ‘공동 의식’을 말합니다. 공동 의식의 기반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추론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능력, 곧 ‘지성’과 ‘이성’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지성’과 ‘이성’이 있고 이를 통해 타인과 공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공동의 의식’, 곧 ‘상식’이 없이 홀로, 개인 의식(private sense)만 있다면 남과 함께 공동의 세계를 나누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남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고, 남이 ‘빵’이라 부르는 것이 ‘빵’인지도 모를 것이며 남이 비난하는 것이 왜 비난하는 것인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장애가 없는 한) 남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선악을 구별하며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 안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어릴 때부터 교회 안에서 자주 듣던 말이 무엇입니까? “따지지 말고 믿어라!”,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이다!”, “머리 쓰지 말아라!”, “무조건 순종해라!”강단에서는 여전히 무조건 믿음과 절대 순종을 강조하고 성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반지성주의’는 이것을 두고 붙인 이름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반지성주의를 “한국 교회 교인들은 오랫동안 교회 안에 들어올 때는 머리를 바깥에 떼어 놓고 가슴만 가지고 들아 왔다가 나갈 때 다시 머리를 붙이고 교회를 떠나도록 훈련받았다”는 말로 표현한다면 너무 심할까요? 성도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머리는 교회 바깥에 두고 들어오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갈 때는 그 머리를 다시 붙이고 나가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여전히 세상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가슴뿐만 아니라 머리도 바꾸고 나의 손과 발도 바꾸어서,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힘이 있는데도 ‘머리는 바깥에 두고 오기 때문에’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앞에서 이야기한 잘못된 성속 이원론, 세상과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원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못지않게 지성과 이성에 대한 잘못된 오해가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성이나 이성이 사실 뭔지도 모르고 너무 쉽게 신앙을 가지게 되면 지성과 이성은 완전히 배제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배웠습니다. 지성이나 이성을 사용하면 인본주의나 세속주의에 빠지는 것처럼 흔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 때는 지성이나 이성을 사용하더라도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에서는 지성이나 이성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오직 믿음’만을 내세워야 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 교인들은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참된 신앙을 위해서는 지성을 배제하고 이성을 죽여야 합니까? 반지성주의, 반이성주의야말로 참된 신앙의 태도입니까?
먼저 ‘지성’이란 말을 보십시다. 지성(知性, mind, intellect)은 문자 그대로 ‘앎의 본성적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내 앞에 책상이 있으면 그것이 책상인 줄 알고 책상이 네모난 줄 알고 책상은 그곳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도구로 쓰이는 줄을 압니다. 빨간 장미꽃을 보면 “저 꽃은 장미꽃이다”, “저 장미꽃은 빨갛다”고 말하는 능력이 다름 아니라 지성입니다. "2 더하기 3은 5”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지성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성’(理性, reason)은 ‘추리(推理)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두 명제로부터 무엇을 추리할 수 있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런 지성과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이런 의미에서의 지성과 이성을 사용합니다. 일기 예보를 통해서 내일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내일 어디 가기로 했는데, 자동차를 타고 가더라도 바깥을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산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비를 아예 맞겠다고 생각하고 우산을 가져 갈 생각을 하지 않거나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 경우, “비가 온다.”“우산은 비를 막아 준다.”그러므로 “우산을 쓰면 비를 피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지성이고,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만일 비를 맞기 싫으면 우산을 가져가야 한다고 추리하는 능력이 이성입니다.
지성과 이성은 생각하는 능력이요, 앎의 능력이요,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생각하고 따지고 묻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생각하지 않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지성과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하겠다고 금방 추론합니다. 공이 날라오면 피할 생각을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지성과 이성이 필요합니다. 다만 지성이나 이성으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지성주의’는 ‘반지성주의’못지않게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믿음에는 지성과 이성이 중요한 부분으로 그 속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사실은 제대로 믿는 믿음에는 지성이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는 바울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십시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마음으로 믿음’과 ‘입으로 시인’하는 두 행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이지요. 그리고는 복음을 듣고 믿기까지의 과정을 바울은 일종의 ‘논리적 고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3-15).
복음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이 있으면 복음 곧 ‘그리스도의 말씀’(롬 10: 17)을 듣게 되고 듣게 되면 믿든지 믿지 않든지 결정을 하게 되고 믿게 되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부르게 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바울은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음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는 데서 구원에 이르기까지는 여섯 개의 고리를 통과하는 것으로 바울은 말합니다. '1. 보냄 받음’ '2. 전함’ '3. 들음’ '4. 믿음’ '5. 주의 이름을 부름’ '6. 구원받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로부터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는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3. 들음’에서 '4. 믿음’으로 연결되는 과정입니다. 바울은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듣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우리에게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같은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듣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어떤 사람은 들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듣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듣자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듣는 데는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배경 지식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좋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들리는 것은 무의미한 소리일 뿐 의미가 담긴 소리로 듣지 못합니다. 재즈를 잘 아는 사람은 어떤 곡을 들을 때 그것이 언제, 누구의 작품인지,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듣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듣는 데도 적용됩니다. 아는 만큼 들립니다. 제대로 듣자면 마음이 가야하고, 좋아해야 하고, 알아야 하고, 더욱더 알고 싶은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잘 들을 수 있고 더 잘 들으면 들을수록 더 잘 알게 되고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듣든지 부처에 관해서 듣든지 우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 합니다. 알아듣기 위해서는 무슨 말인지 말뜻을 알아야 합니다. 말뜻을 알기 위해서는 그 말이 쓰이는 전체 맥락을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예수는 주시다”라는 말을 듣는다고 합시다. 먼저 이 문장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며, ‘그리스도’가 무슨 뜻이며, ‘주’라고 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소귀에 경 읽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알아듣기 위해서는 비슷한 삶의 지평, 비슷한 관용구의 사용, 비슷한 사고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아)시다”라는 말을 들을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들의 문화와 종교에는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에 대한 이해와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 19)라고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 마음에 찔림이 생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나 그리스 문화 사람들은 ‘메시아’(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은 간수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하였습니다. 예수가 ‘주’라는 증거는 로마 황제를 ‘주’, 곧 큐리오스(Kyrios)로 섬기는 문화에서는 익숙했기 때문에 그들이 이 증거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간에 적어도 사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들은 알아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무엇을 믿으려면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지성이 작용합니다.
그런데 물어봅시다. 알아듣는 것만으로 누구나 믿음에 이르게 되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알아듣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말 알아들었으면 당연히 그 내용에 대해서 놀라게 됩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이나 ‘예수가 구주요 주’라는 것은 ‘미국 대통령은 현재 트럼프’라는 말과는 달리 듣는 사람에게 놀라움을 안겨줍니다. 왜냐하면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놀라움은 세 번째 단계를 산출합니다.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며, 주이신가? 무엇을 통해서, 어떤 증거로 그 분을 나의 메시아로, 나의 구주로, 나의 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생각하는 단계를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 만일 내가 나에게 전해진 메시지를 수용하면 그것이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는 단계에 들어섭니다. 나의 희망과 두려움이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알고 동의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도 내가 절실하게 원하고 내 자신을 맡기고 의탁하고 신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군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내가 바라고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까지에는 자란 문화와 개인적 체험, 개인적 인식도 중요하지만 예컨대 ‘예수는 구주’라는 말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내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나에게 구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나는 건짐이 필요한 존재, 치료가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됩니다. 예수에 대한 지식과 나에 대한 지식은 이런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구주’라는 메시지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정보를 얻는 일에 그치지 않고 나의 결단을 요구하는 실존적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 이 과정이 지극히 짧을 수도 있고 한 평생 갈 수도 있습니다. ‘사영리’로 전도 받고 그 자리에서 곧장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경을 읽고 복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거나 떠나기 직전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에는 어떤 경우이든 이 과정이 생략될 수 없습니다.
들음에서 믿음으로 넘어가기까지 과정은 이렇게 보면 네 단계를 밟습니다. (1) 예수에 관해서 하는 말을 알아듣고 (2) 놀라고 (3) 내용을 생각하고 (4) 수긍하여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유보하거나 아니면 무관심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네 번째 단계입니다. 수용하거나 수용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분이 주이심을 깨달아 알고, 그 분이 나의 주이심을 동의하는 마음으로 입으로 고백하고 그 분께 나의 삶과 죽음,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존하고 신뢰하고 의탁하고 맡겨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분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이 신앙(fides)에는 세 요소가 있다고 본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앎(notitia)과 동의(assensus)와 맡김 곧 신뢰(fiducia)가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라는 것을 알고, 동의하고, 그 분께 삶을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두 개입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보면 온 몸, 온 마음, 머리와 가슴과 손발이 모두 개입된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빠짐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됩니다.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 사람은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그것을 알고, 추론하는 데서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과 동일할 수 없습니다. 그가 신앙으로,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 같은 지적 능력, 같은 추론 능력을 사용하더라도 사물을 보되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고, 추론을 하되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 추론하게 됩니다. 꼭 같은 앎의 능력이고 추론의 능력이되, ‘지성주의자’나 ‘이성주의자’처럼 지성이나 이성을 절대화하지 않고 ‘반지성주의자’나 ‘신앙절대주의자’들처럼 지성이나 이성을 배격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2장 말씀처럼 삶 전체를 하나님께 살아있는 제사를 드릴 때 선한 도구로 지성과 이성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사용은 우리가 믿는 것, 우리가 신앙 안에서 참으로 받아들인 것을 생각하고 따지고, 그것을 삶속에서 온전히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묻고 따지고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안셀무스가 ‘앎을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3. 결국 문제는 지성과 이성을 움직이는 ‘마음’(cor, kardia)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시 신앙/믿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믿음 또는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그 분을 받아들이는 순간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이 땅과 저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지속적인 삶의 태도이고 삶의 기반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의 믿음은 사랑과 소망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가는 데서도 지속됩니다. 따라서 믿음은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지속적입니다. 순간적인 믿음에도 그 분에 관한 말을 알아듣고, 그 분을 수용하는 데 필요하듯이 지속적인 믿음 가운데서도,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지성과 이성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깨닫고, 삶에 제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구체적이고 일상적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도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어떻게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도록 살아갈 것인지 자세하게 기술해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안에서, 깨닫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삶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내고 적용하는 데는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낼 수도 없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서술을 할 수 없고, 서술할 수 있더라도 나 자신과 타인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통해서, 말씀 안에서 골똘히 생각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에는 읽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묻고, 듣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과정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지성과 이성을 배제해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생각했을까요? 문제는 지성과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성과 이성을 다스리는, 이 보다 더 깊은 삶의 중심이 사실은 문제였습니다. 삶의 이 중심은 빠스깔이 “내 마음(coeur)에는 이성(raison)이 모르는 이유(raison)가 있다”고 말했을 때의 ‘마음’이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주께서 우리를 당신으로 향하도록 지으셨기 때문에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 까지는 우리의 마음은 쉬지 못합니다”라고 했을 때의 “마음”(cor)입니다. 이 마음이 누구에 의해서 움직이는가, 이것이 나에 의해서 나의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는가,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가 하는 것에 따라 나의 삶이 결정됩니다.
이성과 지성은 우리의 의지와 감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반응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선용될 수도 있고 악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이성과 지성에 대한 오해로 인해, 그리고 그것을 실상 움직이는 것은 그 보다 더 깊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성과 지성을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의 백성들과는 무관한 것처럼 배제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치듯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게(ad Deum) 하고, 그 분의 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의 지성과 이성, 그리고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온전히 사용하는 법을 우리는 배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성도의 삶,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 설교문은 강영안, ‘반지성주의,’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를 바탕으로 작성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