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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송축하라”
시103:1-5

최성림 목사(동래언약교회)


우리가 믿는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아시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나름대로의 신의식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그 나라가 가진 오래된 종교의식에 의한 신의식에 영향을 받습니다. 실례로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어진지 13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교회 안에는 우상을 섬길 때 가졌던 기복신앙의 전통이 남아 있어 교회의 복음을 희석시키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하는 신에 불과합니다. 

또 어떤 경우엔 그리스, 로마의 신화를 읽고 인간 같은 신, 신같은 인간이라는 신의식을 가지기도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교회나 성도들은 우리가 믿는 우리 하나님도 인간같은 신으로 가르치며 보다 나은 인간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우리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의식에 의해 좌우되어지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벽화처럼 정형화 되어서 사람들의 모범의 모델이 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 하나님은 창세전에 계시며 언약을 따라 역사하시고 공의와 거룩을 따라 판단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사람의 판단을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만물과 인생을 친히 판단하시며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리문답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를 게시한 그대로 믿고 인정하며 찬송할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웨,소교리46문답) ‘제1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1계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과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그리고 합당하게 그를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을 때 우리의 지식으로나, 혹은 우리 사회의 전통이나 신화에 의해 만들어진 신을 믿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친히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시며, 언약에 따라 역사하심으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그래서 그 백성들이 경험한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오늘 시편 103편의 첫 번째 연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회복시키시어 찬송이 되게 하셨다”는 주제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먼저 ‘다윗은 누구에게 여호와를 찬송할 것을 요청하는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구원을 알게 된 다윗 자신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첫 번째 연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다윗이 알게 된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말하기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고 호소합니다. 

여기서 이 “송축한다”라는 말은 보통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지는데, 곧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소위 “축복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하나님께 적용될 때에는 “찬양한다, 감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송하며 감사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송축함이 자신의 마땅한 바임을 알고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다윗이 그 자신에게 우리의 교리문답처럼 ‘내 영혼이 나를 지으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인정하고 합당하게 경배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의무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소교리46문답) 

그런데 여러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지만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그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경험한 자만이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만이 토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는 그 어떤 하나님의 큰 일 행하심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고, 믿음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송축하되 “내 영혼아”와 “내 속에 있는 것들아”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혼’이라 하는 것은 흔한 말로 자신의 내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 “나는 속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저는 제 마음으로 저 여자를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말할 때, 이 말은 그의 몸과 마음전체가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이지 마음은 그녀를 사랑하고 몸은 또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자신의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입니다. 

더욱 그는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함으로서 이를 더 분명히 합니다. 그야말로 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은사와 모든 기능을 다 동원하여, 자신의 삶 전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무엇이 다윗으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는가?”
그때 다윗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깊이 깨닫게 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셨다.”(3-4a) 

1) 다윗은 먼저 그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죄 문제로 이해하였습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그의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난 뒤에 겪은 죄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는 죄로 인하여 눈물로 침상을 적셨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많은 시편들 속에서 이 죄의 문제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시편 32편과 51편에서 그는 죄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그 죄를 사해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바로 이 죄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하는 것으로 알았고 그 결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기를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십시오”(시51:11b-12a)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이 스스로 범한 죄악을 어찌 제거할 수 있고, 인생이 범한 죄를 어떤 사람이 사한다고 그 죄의 가치가 정말 사하여질까요? 주목하셔야 할 사실은 여기 이 ‘죄를 사하다’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너무나 큽니다. 곧 인간이 범한 그 어떤 죄악이든지 인간이 용서한다고 그 죄의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상 오늘 법이 아주 조밀하게 정리가 되어 있고, 또 판사가 아무리 정직하게 철저하게 판결을 한다 할찌라도 이러한 법과 판결이 인생의 뿌리깊은 죄악된 본성을 제거할 수없을 뿐더러, 더욱 아주 작은 죄에 아무리 큰 벌을 내릴지라도 범한 죄의 값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제가 여러분을 속여서 많은 이익을 취하여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것을 세상법정에서, 또 교회의 권징을 통하여 벌을 받는다 할찌라도 제가 다른 사람을 속인 죄의 값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다만 벌을 받은 것을 인하여 대리만족을 누릴 뿐이고, 스스로 합당한 죄값을 치루었다고 자족할 뿐입니다. 결코 이 세상의 원리와 방법으로 죄악의 사함을 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도대체 죄악 중에 잉태된 인간 중에 누가 능히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죄를 판결해야 죄가 깨끗이 사하여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실상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이 범한 죄악에 대하여 그 정하신 법대로 갚으신다면 그냥 병들고 죽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죄악 중에 잉태된 인간이 하나님 형벌을 벗어날 길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다윗은 노래합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셨도다”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모든 죄악을 사하였다’고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말합니다. “주께서 네게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셨도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다윗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더욱 그에게 인자와 긍휼을 더 하셨습니까? 그가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죄악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을 때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그렇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할 때, 그 말씀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할 때 주께서 그의 모든 죄악을 사하셨습니다. 

여러분! 다윗에게 임한 죄의 사유하심과 죄인에게 미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여전히 풍성합니다. 곧 다윗이 영접하였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을 때 주님 앞에 그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다윗의 죄악을 고치시고 사하신 주의 말씀이, 이제도 육신을 입으신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나아온 자들에게 우리를 짓누르는 모든 죄악에서 건지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셔서 이제 주의 거룩하신 보좌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에서 사함을 받은 주의 백성은 이제 죄악에 대하여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사죄의 은총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참된 기쁨과 감사는 바로 이 사죄의 은총에서부터 시작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죄의 고백으로 시작되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찬송은 그 죄를 사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2)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질병을 고치신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질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죽음에 직면해 있을 때 생명의 빛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이 질병을 그의 죄악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질병을 고치심이 자신의 죄악을 사하여 주시는 일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죄악을 사하여 주심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라면 이 죄의 부패함, 곧 질병에 걸린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되는 것 역시 성령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질병 치유의 경험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병은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실로 이 땅에 죄악으로 인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최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며, 지금까지 난치병으로 알려지던 여러 가지 질병들을 가장 정밀한 로봇을 통하여 치료해 내는 시대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술이 아무리 발달하고, 또 첨단과학으로 불치의 병을 치료할 길이 열린다 할 찌라도  죄악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서 인생에게 미친 질병은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통로나 방법으로도 인간의 죄악이 사함을 받을 길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질병이 있으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병원에서 의사의 진료를 받는 것도 하늘의 의사이신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는 중요한 방법의 한 가지입니다. 그러나 의술이나 과학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술이나 과학 역시도 죄악으로 인해 부패한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질병의 치료가 쉽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와 만물의 풍성을 통하여 의술을 발전시켜 왔고, 시대가 지날수록 인간이 의술을 통해 극복하는 질병의 종류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의술의 발달이 질병을 극복하는 길을 열 수 있고, 수명을 한 뼘 정도 연장시켜주는 도구가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의술로도 질병이 인생에게 임하게 된 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고, 그러기에 죄의 삯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실로 죄의 사유함이 없는 질병의 치료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단지 고통을 줄일 수 있고, 단지 육신의 생명을 조금 연장시킬 수 있지만, 죄악된 인생은 장수조차도 고통의 연장일 뿐이며, 죄의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너무나 당연한 듯이 노래합니다. “저가 네 모든 질병을 고치시는 도다” 곧 이 찬송은 ‘너의 죄악으로 인하여 임한 모든 질병을 하나님께서 고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죄로 말미암아 임한 질병은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어떤 세상의 치료법으로 치료될 수 없습니다. 다윗의 질병이 그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범한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주 예수님은 공생애 가운데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곧 중풍병자를 보실 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먼저 선포하셨고, 그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참람하다.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할 수 있는가?”하며 당신을 정죄할 때 중풍병자의 질병도 낫게 하셨습니다. 곧 중풍병자의 질병이 죄와 관계되었음을 보여주신 후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우선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그의 서신서를 통하여 이르기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죄악 중에 거하면서도 하나님께 피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죄로 말미암는 모든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죄의 결과로 중풍병이 든 자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주시는 메시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을 때 그의 죄가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질병에서도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제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5:14,15)


3) 다음으로 그는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여기서 이 파멸이라는 단어는 ‘구덩이’(생명의 파멸을 경험하는 곳 ; 무덤)라는 단어로 성경에서 종종 음부를 뜻하는 스올이라는 단어와 중복해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시16:9-11, 참 욘2:2-3) 즉 시인은 자신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였고, 그래서 생명이 저 깊은 음부와 같은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여 주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 시를 정확하게 언제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생애를 보면서 그가 자주 그의 생명이 경각에 놓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겨 죽음 앞에 놓일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생명이 파멸에 빠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도 깊은 생명의 파멸을 경험한 것은 밧세바를 범한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 편에서 멀어지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다윗이 얼마나 깊은 파멸을 경험했는지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때 노래하기를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탄식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 앞에서 쫓겨나는 곳이 바로 스올입니다. 구덩이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이곳은 죽은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는 자신이 “죄를 숨기고 토설치 아니할 때에 자신의 뼈가 쇠하였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때 주의 손이 그의 죄악을 숨긴 양심을 밤 낮으로 짓눌러 온 몸에 진액이 다 빠져 나가 버려 여름 지독한 가뭄을 경험하는 것같았다’(시32:3-4)고 토로합니다. 그때 그는 너무나 두려워 “자신이 주님 앞에서 쫓겨나는 두려움을 느꼈고, 그때 주님이 성신을 거두어 갈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여 내게서 성신을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다윗이 서 있는 지점은 생명의 파멸, 곧 음부의 입구입니다. 이 구덩이를 지난다면 어쩌면 그는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는 지옥의 구렁텅이에 이를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더 큰 심판은 없습니다. 죄악에 대하여 주의 사유하심을 받지 못하여 주께 징계를 당하여도 주님의 집에서 쫓겨나지 않는다면, 평생 질병에서 고침을 받지 못해도 주의 품에 거할 수 있다면 주의 이름을 송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그 보다 더 크고 놀라웠습니다. “저가 나를 파멸에서 구속하셨다”고 찬송합니다. ‘구속’이 무슨 말입니까? ‘댓가를 지불하고 사왔다’는 말입니다. 이는 다윗이 범한 죄악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그때 그의 영혼을 음부의 권세잡은 자에게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그때 그는 스올의 구렁텅이를 자신의 거처로 삼아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생명의 파멸에서 한 놀라운 역사를 똑똑히 경험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를 구속하셨습니다. 자신을 그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시기위하여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아니 왜, 무엇 때문에  그 자신의 죄악으로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댓가를 지불하신단 말입니까? 질병에 이른 것도, 생명의 파멸에 이른 것도 결국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생의 죄의 문제인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값을 치루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의 이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지불하신 댓가가 무엇인지 궁금해 집니다. 그리고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파멸의 구렁텅이에 던져진 다윗을 위하여 음부의 권세잡은 자에게 내어놓은 댓가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당신의 독생하신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을 비롯한 우리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오르실 때 너무나 의아한 장면을 목도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하신 아들을 철저히 외면하시는 장면입니다.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우셨을 때 너무나 고통스러워 당신의 아버지를 부르셨습니다. “엘리 엘리 나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느 냉혈한 아버지가 아들의 이런 애절한 부르짖음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의 부르짖음을 철저히 외면하셨습니다.
 
왜요? 그것은 바로 당신의 아들을 다윗을 비롯한 그 택하신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한 값으로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들을 그 생명의 파멸에서 건지시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그렇습니다. 다윗은 멀리서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께서 그의 영혼을 파멸에서 건지실 것을 알고 즐거워하다가, 그의 생명이 파멸에서 건지움을 받았을 때 이렇게 기쁘게 주의 구속의 은혜를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생명의 파멸에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 모든 주의 백성은 마땅히 주의 이름과 그의 행하신 일을 찬송할 뿐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회복의 절정은 무엇인가?”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송축해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4b-5절입니다.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이 말씀은 다윗 자신을 죄에 구원하시는 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관을 씌운다’고 하는 말은 ‘왕관을 씌운다’는 말로도 사용되고, ‘단장시켜준다’는 말도 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관을 씌운다고 합니까? ‘인자와 긍휼’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관으로 씌울 수 있는 것들은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나를 인자와 긍휼로 대하셨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에게 임하였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를 ‘관으로 씌웠다’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얼마나 가치가 크고 좋은 것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관이 오직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통하여 다윗에게 씌워졌다고 말한 것은 합당한 고백입니다. 실상 다윗에게 씌워진 왕관은 그의 능력이나 탁월한 지도력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안에서 비천한 목동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은 어느 누구도, 본인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홀이 유다지파에게서 나올 것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고작 베들레헴같이 작은 동네에서 이스라엘의 위가 날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떠돌이 목동에 불과한 다윗을 택하시어 기름을 부으시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 것은 누가 봐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하심입니다.

더불어 이 인자와 긍휼로서의 관은 죄악으로 피폐하게 된 시인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고, 그의 위를 높이신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 시편의 저자가 다윗이라는 사실은 다윗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겠지만, 여전히 그에게 존귀의 관을 쓰게 하시고, 그의 위는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의 크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비천한 인생이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인자와 긍휼로 우리에게 관씌우십니다. 우리를 존귀케 하십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7:11v에 주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는 더욱 분명하게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기도할 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윗을 존귀케 하시며 그의 소원을 만족케 하심으로 “다윗의 삶이 독수리같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회복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다“고 노래합니다. 이는 지난 날 죄악으로 인하여 깊은 파멸에 빠져 있던 다윗에게 얼마나 큰 회복이 찾아왔는지를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한 목동인 다윗을, 사울의 쫓김을 받아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다윗을 인자와 긍휼과 아름다운 관을 씌우시며, 그를 젊은 독수리같은, 존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셔서 당신의 권세와 능력으로 그 백성을 보호하며 선한 길로 인도할 것을 맡기심을 보여줍니다. 깊은 파멸에, 구덩이에 빠져 있던 다윗을 하나님께서 마치 독수리가 힘차게 날개 짓하며 솟아오르듯이 그 구덩이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독수리는 종종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또 자기 백성을 보호하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다’고 노래했습니다.(신32:11-12)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는 다윗이 지난 날에 죄악으로 인하여 파멸에 이르는 질병을 경험하였던 것을 완전히 뒤엎는 회복을 보게 합니다. 밧세바와의 사건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주신 권세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며, 인도하여야 할 다윗이 파멸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그의 회복을 기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압살롬에게 쫓길 때, 어느 누구도 독수리의 날개침같이 그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고, 주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드러내었던 젊은 날의 다윗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죄악 가운데 회개하는 다윗에게서 성령을 거두어 가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젊은 독수리의 날개침같이 주의 성신을 새롭게 하셔서 그를 깊은 그 파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누구도, 다윗 자신도 예상하지 않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그에게 왕관이 다시 씌워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며 보호할 권세와 능력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 시간, 천하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종되었던 저와 여러분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자와 긍휼로 관 씌우사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의 사랑하는 친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돌려드리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아래 놓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속량하시고, 독수리 날개같은 주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이끌어 내시고, 주의 나라의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은 진실로 우리의 가진 모든 재능과 은사와 능력을 동원하여 찬양을 하기에 합당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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