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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시편 설교, 설교문 작성자: 김성수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시편 150편 1-6절 "할렐루야!"
시편 150편은 시편 전체를 마무리하는 송영 시편입니다. 146편부터 시작된 ‘할렐루야’ 찬양의 대단원의 막이 150편에서 내려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로 구약 성도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외쳤던 말입니다. 146편부터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마무리하는 송영이 시작이 되어서 점점 그 소리가 웅장해져서 150편에 이르러 절정에 이릅니다. 우리는 150편에서 온 우주에 할렐루야가 울려 퍼지는 감격을 느낍니다. 마치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중에서 ‘할렐루야’ 합창이 제2부 ‘예수의 수난과 속죄’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느낌과 같습니다. 이 합창은 수없이 ‘할렐루야’를 반복하면서 왕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통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시편 150편도 그렇습니다.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것뿐만 아니라 각 절에 ‘찬양하라’(할렐루)는 명령이 무려 열 번이나 반복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6절에서는 ‘찬양할지어다’는 간접명령으로 반복됩니다. 합해서 열 세 번이나 할랄(‘찬양하라’) 동사가 등장하여 ‘할렐루야’를 반복적으로 외치고 있는 셈입니다.
‘할렐루야’는 시편 전체를 마무리하는 송영의 외침입니다. 이것은 ‘할렐루야’가 이스라엘 역사의 결론적인 외침임을 의미합니다. ‘할렐루야’가 역사의 마지막에 온 땅에 울려 퍼질 외침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할렐루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지속적으로 동행하는 외침이자 마지막에 고백해야 할 외침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송영’이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이 땅에 베푸신 모든 은혜에 대한 결론적인 송영이 ‘할렐루야’여야 합니다.
시편 150편은 ‘할렐루야’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릴 찬양의 내용과 주체와 방법을 알려줍니다.
첫째, ‘할렐루야’는 하나님의 행동과 위대하심에 대한 송영입니다(2절).
‘할렐루야’ 송영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할렐루야’에서 ‘할렐루’는 ‘찬양하라’는 명령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단어 ‘야’는 ‘야훼’ 혹은 ‘여호와’의 약자로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 시편에서 ‘할렐루’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것은 찬양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 ‘여호와’ ‘그’ 모두 합해서 열여섯 번 나옵니다. 시편의 결론으로서 시편 150편은 우리의 예배와 찬양은 어떤 인간이나 피조물도 아닌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만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까? 2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의 능하신 행동”과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어떤 것도 ‘능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능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분의 모든 사역은 그분의 전능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조가 그렇고 구원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누가 이 엄청난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지금도 모든 것을 섭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 뜨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잘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붙드심과 돌보심 때문에 가능합니다. 해가 뜨고 지고, 자연의 현상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도 창조주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입니다. 모든 생물들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먹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시편 145편 15-1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이러한 창조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떠도 ‘할렐루야’를 외칠 수밖에 없고, 잠자리에 들 때도 ‘할렐루야’를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창조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에는 창조뿐만 아니라 구원도 있습니다.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강대국 이집트의 권세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신 능력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능력입니다. 같은 홍해를 닫으셔서 이집트 군대를 수장시키신 능력도 구원의 능력입니다.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갈 때 먹이시고 입히시고 대적들을 막아주신 것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수많은 시편 기자들은 고통과 악인들의 공격 가운데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구원해주소서’ ‘건지소서’ ‘도우소서’라는 성도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얼마나 많이 하늘의 성전으로 올라갔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시편들에 그런 외침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탄식과 간구를 들으시고 의인들을 악인들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다윗을 비롯한 많은 성도들의 기도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도도 들어주시고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이것을 시편 145편 18-19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된 이 구원 역사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망에서 다시 살리신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붙드시고” “비천한 자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일으키십니다.”(시 145:14)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입니다. 그 능력으로 교회를 지키시고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그 능력으로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덕분입니다. 비천한 우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켜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덕분입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이 없으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창조와 구원의 모든 ‘능하신 행동’을 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 ‘할렐루야’를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을 경험하고 읽고 들으며 우리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위대하십니다.” 이것이 2절에서 언급하는 두 번째 찬양의 제목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능하신 사역들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은혜와 사랑과 거룩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우리들은 가슴 벅차게 그분의 ‘위대하심’을 느끼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경험한 우리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온 땅에 위대하신’ 창조주요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께 송영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을 경험하고 보고 들은 우리들은 우리 하나님이야말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가장 ‘위대하신 왕’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시편 95편 3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또 47편 2절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위대하신 왕이 되심이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돌보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말씀으로 의롭게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모든 성품을 한 마디로 ‘위대하심’ 입니다. 이 위대하심 앞에 어떤 인간도 ‘위대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신이나 종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만이 지극히 위대하십니다. 할렐루야!
둘째, ‘할렐루야’는 하나님의 행동과 위대하심에 대한 감격적인 송영입니다(3-5절).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할렐루야’ 송영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강제적으로 올리는 찬양이 아닙니다. 또 ‘할렐루야’ 송영은 뭔가 대가를 기대하고 올리는 아부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과 위대하심에 대한 지극히 자발적이고 감격적인 반응입니다. 그래서 그런 감격과 기쁨은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3-5절에는 ‘할렐루야’ 송영이 많은 악기들과 춤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시편들에는 많은 악기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대부분 다 등장합니다. 모든 악기들을 모아서 오케스트라로 연주합니다. 그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기쁨으로 찬양하자고 합니다.
이런 오케스트라 연주와 춤이 동원된 사례가 역사에 나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 레위인들을 세워서 여기에 등장하는 악기들을 연주하게 하고 자신은 그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대상 15:25-29). 그 때 다윗과 온 백성들은 왕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며 감격적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3절의 ‘나팔 소리’는 왕이 성전에 임재 하셨기에 그분을 예배하고 찬양하자는 신호입니다. 숫양의 뿔을 잘라 만든 나팔의 영롱하면서도 길게 울리는 소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과 ‘위대하심’을 널리 알리는 소리입니다. 온 땅에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알리고 임하게 하는 소리입니다.
여기에 화답하여 현악기들이 연주됩니다. 오늘날의 하프와 유사한 수금과 비파와 각종 현악기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청동이나 갈대로 만든 ‘퉁소’로 대변되는 관악기가 현악기와 하모니를 이룰 때, 타악기인 ‘소고’가 연주되며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템포를 빠르게 이끌어갑니다. 그 템포를 따라 레위인들이 구원과 승리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기쁨의 춤을 춥니다. 아마도 찬양도 함께 불렀을 것입니다.
나팔 소리로 시작된 찬양은 두 개의 청동 판으로 만든 타악기인 ‘제금’(심벌즈)이 힘차게 부딪히는 소리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작은 제금과 ‘큰 함성’과도 같은 큰 소리를 내는 큰 제금이 그 절정의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이 소리들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에 대한 성도들의 감격적인 반응은 온 우주를 뒤흔듭니다.
찬양은 삶과 악기 연주와 노래와 춤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성전의 정해진 법을 따라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송영’은 기쁨이나 감격이 빠진 형식적 몸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구원과 통치에 대한 지극한 감사와 사랑과 감격과 기쁨을 담은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이 ‘송영’임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진정한 송영이어야 합니다. 참된 감격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이 함께 올려드리는 찬양은 메마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에 대한 깊은 묵상에서 비롯된 진정한 감사와 기쁨과 사랑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통치에 대한 감격적인 반응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하든 그것은 ‘감격적’이어야 합니다. 감격적이지 않은 송영, 노래나 춤 등으로 표현되지 않는 송영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과 그분의 ‘위대하심’을 진정으로 경험한다면 어깨가 들썩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래가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감격적인 송영의 외침이 ‘할렐루야’입니다.
셋째, ‘할렐루야’는 하나님의 행동과 위대하심에 대한 온 세상의 감격적인 송영입니다(1, 6절).
‘할렐루야’ 송영은 결국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의 찬양이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는 온 우주를 가득 채우는 감격적인 송영입니다. 왜냐하면 땅과 하늘, 인간과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합니다. 또 권능의 궁창에서 그분을 찬양하자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서 지상의 하나님의 성소를 대표합니다. 반면에 ‘권능의 궁창’은 하나님의 권능이 발휘되는 하늘 성소를 대표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궁창 위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늘 성소’는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른 왕이신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시고 돌봐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신들을 만나주시고, 기도를 들어주시고, 용서하시고, 통치하셨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찬양과 예배는 지상의 성소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권능의 궁창’인 하늘 성소에서 찬양하는 천사들의 찬양과 땅에서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이 만나서 하모니를 이룹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 온 세상이 이 합창에 동참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할렐루야’ 합창으로 채워집니다.
시편 150편의 기자는 마지막 절에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도록 초청합니다. 이 땅에 호흡하는 모든 존재는 인간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모든 생물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돌보심을 받은 모든 인간들과 피조물들이 합창단을 구성하여 창조주이시자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부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48편에는 천사와 해와 달과 별들과, 바다와 물고기들,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바람과 산들과 모든 나무들과, 짐승과 가축과 새들과, 온 세상의 왕들과 백성들과 남녀노소가 하나님 찬양에 부름 받고 있습니다.
시편의 성도들은 지상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과 비전은 우주의 성전을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이 결국은 온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킬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교회는 동일한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예배당에서 찬양을 하고 있지만 그 찬양은 예배당 안에 갇혀 있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구원과 은혜가 온 세상으로 확장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하며 쉬지 않고 찬양을 부릅니다. 하나님께 송영을 올려드립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회의 등불이 꺼져가는 것 같은 심한 핍박 속에서도 사도 요한의 환상을 붙들고 십사만 사천 명의 찬양에 동참했던 것도 바로 마지막 날의 온 우주의 송영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는 고난 속에서도 송영의 행위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능한 사역을 전파할 것입니다. 그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에 호흡하는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 찬양을 들으며 죄악 가운데서 신음하며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기대하는 모든 피조물들도 ‘할렐루야’ 송영이 온 우주에 울려 퍼질 그날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가는 교회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 소망의 끝에 온 우주의 ‘할렐루야’ 송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장 1-2절에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6절에는 또 이렇게 찬양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시편의 찬양처럼 우리의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능력 있는 통치에 대한 송영입니다. 우리의 송영은 그분의 창조와 구원과 돌봄과 의로운 통치에 대한 우리들의 자발적이고 감격적인 반응입니다. 또한 우리의 송영은 온 세상 만물이 ‘할렐루야’를 합창하며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축하할 날을 확신 가운데서 소망합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지금도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 ‘할렐루야’를 외칩시다. 새 해를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려주시길 기대하며 ‘할렐루야’로 새 해를 힘차게 시작합시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