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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제물로 자신을 드리십시오

(롬 12:1, 레 16:6-22)


서론) 그리스도인의 대 강령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로마서 12장1절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고 하고 있습니다. 조금 생소한 느낌이 들지는 몰라도 이것을 우리가 대 강령으로 생 각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로마서의 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롬 12:1은 성 경연구나, 교리상으로나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절입니다. 이 귀절은 성경의 교리 서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를 이분하는 분수령으로, 로마서 1-11장까지가 오직 은혜로 인하여 구원 받는다는 교리에 관한 부분이라면, 이제 12장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적용부분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시작하는 말 “그러므로” 하는 귀절은 그러므로 이렇게 은혜로 구원 받게 된 사람들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요구하고 있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12장 1절은 기독교회 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귀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로 해석되고 바로 적용되어할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로 마서 12장 1절을 통해서 우리 예수믿고 구원얻은 사람들의 제일 큰 강령이 ‘산제물로 드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1. 산제물로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만큼 번역상 그리고 해석상의 심각한 오해를 일으켰던 부분 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개정개역에는 ‘산제물’로 고쳐졌지만 이전의 한글 개역에서는 ‘산제사’로 되어 있었습니다. 새로된 개정판이 잘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 리 몸을 산제사로’드리는 것은 번역도 맞지 않고 이어지는 구절과도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제물’을 나타내는 헬라말은 ‘뚜시아(θυσία)’입니다. 이것은 명사형으로 ‘제사하다’하는 동사형과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동사가 되려면 ‘뚜시아조’가 되어야 맞습니다. 그리고 이 후에 이어지는 구절은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했는데 사실 ‘영적 예배’라는 말은 바로 직역을 하면 ‘너희의 합당한 봉사니라(τὴν λογικὴν λατρε ίαν ὑμῶν)’라고 해야만 합니다. 즉 정리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는 것 은 하나님 앞에 당연히 마땅한 봉사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섬기는 일에는 이렇게 산 제물로 자신을 드려야만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개정개역에 ‘영적 예배’는 사 실상 근거가 없는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산제사는 산제물로, 영적예배는 합당한 섬김, 마땅한 봉사, 등으로 바뀌어야 한다.


잘못된 번역은 여러가지로 다른 모습의 삶의 적용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에, 설사 좋은 해석, 은혜가 되는 방향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의 본디 원하시 는 뜻이 아닌 것으로 성도를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바른 번역과 해석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쨌든,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더러 우리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신느 산제물 로 드리라고 하고,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능히 그리스도인의 강령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큰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 아무 공로 없으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 앞 에 어떻게 살아드리는 것이 가장 합당한 삶의 강령이 되겠습니까?


적용) 일단은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분명히 구별하여 드릴 각오를 하 고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가 여전히 죄가운데 빠져서 헤메이 면서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은혜도 모르고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 리가 분명히 은혜가운데 그리고 그 은혜받은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2. 산제물로 자신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산 제물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우리더러 ‘산제 물로 너희몸을 드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산제물(θυσίαν ζῶσαν, living sacrifice)로 자신 을 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혹시 ‘이삭과 같이 인간 제물’이 되라는 것 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제물을 지극히 싫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혹시 이 말은 ‘살아있으되 죽은자 같이’ 이미 하나님 앞에 죽은자 같이 살라는 것입니까? 자 신의 모든 욕심을 다버리고 죽은 자 같이 초연하게 그렇게 살라는 말입니까? 이 해석 은 기독교 전반에서 받아들여지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 이미 번제단에서 죽었으나,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한자 같이 완전 한 자 같이 죄와 흠도 없이 그렇게 살라는 교훈으로 부딪혀 올 수 있습니다. 많은 기 독교 주석가들이 그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조화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는 어떤 분명한 근거가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해석에는 그 렇게 해석하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언어적, 역사적, 성경자증적인 등의 해석의 근 거가 있어야 하는데 위의 이런 해석은 막연한 추측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을 로마에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낼 때 에 적어도 그 수신자들은 사전을 찾거나 신학사전을 펴보기전에 편지의 기록한 내용 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산 제물’이란 용어는 적어도 로마교회에 몸담고 있는 유대인들은 잘 이해를 하고 있는 용어였음이 틀림없 습니다. 산 제물이란 말이 구약에 정확히 나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유대인 들이 잘 알고 있는 표현, 적어도 유대교의 환경에서 의미하는 바가 있는 그런 표현임 에는 틀림없습니다.


산 제물의 ‘제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뚜시아’는 정확히 이스라엘의 제사제도 가운데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물’로 자신의 몸을 드리라는 것은 이해하 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산제물’이란 말은 구약에도, 신약에도 나 오지 않는 말이므로 좀 당황 할 수 있습니다. 산 제물은 히브리어로 ‘코르반 하이(현대 히브리어역)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살아있는 제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제물’이 무엇인가요? 제물은 당연히 ‘죽여서 올리는’것이 아닌가요? 구약성경에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유대인 주석가 라쉬의 탈무드 해석 부분에서 우리는 해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쉬가 해석하는 바는 이 산제물이 레위기 16장 의 대 속죄일의 ‘속죄양(scapegoat)’과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산제물’이란 용어는 없어도 ‘살아있는 제물’을 다루는 곳은 레위기 16장 밖에는 없습니다.


레 16에 대 속죄일에, 대 제사장은 일 년에 한번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해서, 지성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지내는 제사가 속죄제입니다. 대 제사 장은 먼저 자신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서 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제단과, 성소와 그 외의 기물들에 찍어 바르고,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두마리의 숫 염소 를 속죄제로 드리고, 그리고 또 한 마리의 수양을 속죄제로 드리게 됩니다. 레위기 16장 15-22절에서 두 마리의 염소가 회막 문 여호와 앞에 가져오게 되는데, 대 속죄 일 날 이 두 마리의 염소 제물은 그 역할이 각각 다릅니다.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 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자젤을 위한 것입니다. 이 두 마리의 염소는 여호와의 성막 앞에 끌려 올 때까지는 똑같은 조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둘 다 속죄 제물이었고 (레 16:5) 즉 둘 다,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선별된 정결함, 그 크기, 등등에 있어서, 차이가 없었습니다. 성막 앞에서 제비가 던져지는데 따라서 이 두 염소의 삶이 완전히 대조적이 되고 맙니다. 똑같이 제물로 가져오게 된 것이지만, 하나는 곧 번제단에서 죽을 제물이고 다른 하나는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비를 뽑아서 각각 역할을 나누어지게 한 다음,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그 자 리에서 바로 잡아서 그 피를 지성소 안의 속죄소 (시은좌, 곧 언약궤의 뚜껑부분) 위 와 그 앞에 일곱번을 뿌립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사함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상징의 본체인 메시야의 영원한 피로의 구속을 이룰 때 까지 기념적으로 반복 합니다.


롬 12장1절의 산 제물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제물은 그 두 번째 염소입 니다. 이 염소는 우리말 성경에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지게 됩니다. 물론 우 리는 이 보내지는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숫양이 바로 산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제물이지만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산 제물입니다.


이 산제물에 대제사장인 ‘아론은 두손으로 안수하고, 이스라엘자손의 모든 불 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이미 정한 사람에게 맡 겨 광야로 보낼지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염소의 역할은 사실상 앞에서 도살 당한 숫염소와 같은 역할과 같습니다. 즉 앞의 염소도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해 서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는 것입니다. 앞의 염소와의 차이는 지금 당장 도살당하지 아니하고 멀리 보내진다는 것입니다.


레16장에 보면 이 두번째 염소는 멀리,인도자를 따라서 광야로 보내질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멀리 보내집니까? 즉 이 염소의 역할은 하나님 을 거스리려는 모든 이스라엘의 죄를 안수를 통하여 받고, 이것을 짊어지고, 멀리 광 야로 보내지는 것인데 그 광야는 성소와도 멀고, 이스라엘의 거주지와도 멀고, 완전히 무인지경으로 보내서 이 양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 미리 지명해 놓은 사람을 시켜서 아주 멀리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결코 돌아올수 없고, 그 염소는 그곳에서 방랑하다가 죽어 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멀리 떠나서, 다시는 그 죄가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아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의 진 밖에서, 잊혀지고, 돌아오지 못하고, 소멸되고 마는 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용서받는지를 분명히 그림처럼 보여 주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렘 31:34 (=히 10:17)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장면은 정확히 대 속죄일의 두 염소의 운명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죄를 사하시고 그리고 기억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 두단계의 용서의 일은 대속죄일의 두 염소의 역할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까? 두 염소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죄가 소멸되게 하는 것이고, 또한 이스라엘의 죄가 기억도 나지 않도록 완전히 멀리 보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바울이 성도에게 바로 이 ‘산제물’이 되라는 것은 바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습 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부터는 이 ‘산제물’과도 같이 다른 사람의 죄가 사유함을 받도록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 은 더 이상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라는 뜻도 됩니다. 살아 있지만, 그리 스도 예수를 닮아서 이제는 이웃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들에게 주어지는 강령입니다. ‘코르반 하이’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 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2:20)을 고백하는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욕 심과 야망을 위해 살지 말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향한 대 강령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은혜로 영생을 얻었으니, 이제 자신을 더 윤리적으로, 죄짓지 말고 살라고 하는데 집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못난 성질 죽이고 살라는 것이 최고의 목적도 아닙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 니다. 산 제물과도 같이 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빚 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1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리스 도인의 대 강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한마디로 정리해서 말씀하시길, ‘너희 몸을 산제물로 드리라’는 것이었 습니다. 오늘 우리는 번역을 살펴보고, 그리고 그 뜻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의 강령은 단순히 ‘이제는 더 죄짓지 말고 살아야지’, ‘더 온유한 모습으로 살았으나 죽은 듯이 살아야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대 강령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으니, 너희도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마치 ‘산 제물’과도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대 강령입니다. 이것이 로마서가 우리에게 적용하고 자 하는 가장 중요한 명령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까? 그러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마십시오. 더 이상 탐욕을 위해서도 살지 마십시오. 이제는 그리스도와 같이 다른사람을 위해서 사십시오.


설교문 작성자: 김하연 목사(대구 삼승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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