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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수고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

임경근 목사(다우리교회)
성경: 시편 127:1-5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배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가는 그 여행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 때 그들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노래들이 15개가 모아져 있는데 바로 시편 120-134편입니다. 

시편 127편도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갈 때에 불렀던 찬송입니다. 그것은 시의 제목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알려주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길에서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즐겁게 합창했습니다. 또 서로 화답하면서 교창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향에서 성을 쌓고 논과 밭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짓거나 목축업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팍팍한 그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종종 국경선 너머에서 강도들이 칼과 창을 들고 들이닥쳐 성문을 부수고 들어와 일 년 내내 농사 지어 놓은 곡식과 포도주를 빼앗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움켜지는 가난의 슬픔과 아픔을 견뎌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 갈 때에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시편 127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편 127편의 노래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묻어 나온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아름답게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전문가적인 목소리와 음악적 기교로 불렀던 노래가 아닙니다. 이 노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진솔한 입술의 찬양입니다. 

복된 삶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하며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헛될 뿐이지만,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의 삶이 얼마나 복되고 행복하고 아름답고 놀라운지 고백합니다. 

솔로몬의 노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네 편이 다윗의 노래라고 명시했는데, 시편 127편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것입니다. 또 이 시가 솔로몬의 것이라는 내용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이 시편은 솔로몬이 쓴 전도서와 내용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전도서의 처음과 마지막은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8)

‘헛되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세 번 ‘헛되다’고 말한 것은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도서에 ‘헛되다’는 말이 세 번 등장하는 것처럼, 시편 127편에도 ‘헛되다’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세 번 나옵니다. 첫째, ‘수고가 헛되며’, 둘째 ‘깨어 있음이 헛되며’, 셋째,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다’로 세 번 ‘헛되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와 시편 127편에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없이는 허무하고 헛될 수밖에 없음을 선포했습니다. 특별히 불의가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설득도 아니고 타이름도 아닙니다. 믿음의 고백이며 당당한 선포입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적실합니다.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것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보다는 인간의 과학 기술의 발달을 통한 위대함이 강조되는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교회는 인간적 기교와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은혜의 방편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실망과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바로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이란 헛되고 헛되고 헛될 뿐이라고 돌직구(?)를 날립니다. 인간의 이기주의(egoism)와 이상주의(idealism)는 당장은 번성하고 유익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전도자의 결론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료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수고를 믿고 의지하지 말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것만 믿고 순종하며 따를 것을 명령합니다. 

인간의 수고는 위대한가?

시인 솔로몬은 하나님 없는 ‘집을 세우는 수고’가 헛되며, 하나님 없는 ‘성을 지키는 깨어있음’이 헛되며, 하나님 없는 ‘부지런한 삶’이 헛되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의 수고가 정말 헛된 것입니까? 우리의 현실을 돌아봅시다. 

인간의 수고와 노동은 위대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부지런히 수고하고 노동 한 결과 멋진 고속도로가 생기고, 편리한 삶을 영위하며, 저 먼 나라를 안전하고 편리하게 비행기로 오가며, 세 끼 밥을 먹고, 의식주를 공급받는 것이 아닌가요? 열심히 하는 만큼 의미가 있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성공하고, 그렇지 않고 잠만 많이 자고 게으른 사람들은 가난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한 사람을 향해 이렇게 인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아따, 수고 했구먼요!” “욕 봤소!” 이렇게 수고는 아름답고 그 댓가를 받는 것이 정상이 아니던가요?

지금도 대한민국 사회는 열심히 일하는 데 모든 정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높기로 유명합니다. 2012년 OECD국가의 1인당 1년 평균 노동시간은 1705시간이지만, 한국 노동시간은 2092시간입니다. 네덜란드의 1334시간과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760시간 정도 더 일합니다. 한 때 한국은 세계 인력 시장에 많은 사람을 보내 노동력으로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를 중동에 토목 건축가들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수고한 덕분에 오늘의 한국 사회를 이루어낸 것이 아닐까요? 세계 9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일 인 당 국민소득이 2만 5천 달러를 넘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수고가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도 대한민국 국민은 열심히 수고합니다. 

어른들이 산업전선에서 열심히 일을 한다면, 학생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소위 ‘열공’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면서까지 공부에 공부를 거듭합니다. 한국 학생들은 거의 공부 기계라고 해야 할 지경입니다. 쉴 사이도 없이 머리에 지식을 집어넣고 있으니까요! 공부벌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구푸리고 앉아 책을 파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벌레’같은 모습입니다. 학교 공부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학생들은 다시 학원으로 달려갑니다. 그렇게 열심히 수고하는 자가 더 좋은 점수를 받고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열심히 수고하며 공부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공부하지 않으면 미래가 보장이 됩니까? 수고스럽지만, 열심히 공부에 수고한 결과는 좋은 대학과 반듯한 직장,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결혼을 보장해 줍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의 수고를 합니다.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습니다.’

정말 인간의 수고는 위대해 보입니다. 이 인간의 수고와 노력과 노동이 없었다면 인류의 문명과 발달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수고는 인간 타락의 결과!

그런데 이런 수고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언제부터 인간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리며 수고하고, 고통스럽지만 참으면서 노동해야 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 제일 처음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그곳에 인간의 수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 ‘수고’라는 말이 처음 등장합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때부터 수고가 시작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이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수고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수고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고’가 아니었습니다. ‘일’은 ‘수고’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다름 아닌,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땅, 바다와 하늘)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본래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은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 복된 일은 ‘수고’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 ‘수고’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아닙니다. 이 ‘수고’는 벌입니다. 창세기 3장 16-17절에 사용된 ‘수고’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 꼭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이 ‘수고’라는 단어는 ‘고통’ 혹은 ‘고통스런 수고’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죄로 인해 죽은 존재가 된 아담과 하와는 ‘고통의 수고’를 해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품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7)

인간이 수고할 수밖에 없는 것은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때문에 농사를 지어 곡식을 먹으려면 땀을 흘리며 밭을 만들어 거기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다시 올라오는 잡초를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겨우 곡식을 거두어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텃밭에서 일을 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입니다. 뿌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리 많은 잡초들이 많이 올라오는지요. 그런 잡초들에게는 거름을 주지도 않는데 잘 자랍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수고의 땀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고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결국 그 삶은 헛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인간은 결국 죽습니다.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되고 맙니다. 바로 그것이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삶, 하나님 떠난 인생이란 이렇게 허무하고 헛되고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이 수고만 하다가 죽고 마는 허무한 존재입니다. ‘허무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단어는 ‘니힐리즘’(nihilism)인데 ‘니힐’(nihil), 곧 ‘아무것도 없다’(nothing)이라는 라틴어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은 수고해 봐야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인간의 수고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헛되도 헛되고 헛되다고 증언했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모든 인간은 수고하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수고하는 삶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 수고는 허무할 뿐입니다. 헛될 뿐입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하나님 없는 수고는 헛수고일 뿐!

하나님의 사랑 받는 성도 여러분! 진짜 좋은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복은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복은 우리의 수고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하늘에서 ‘우리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수고’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솔로몬은 그 점을 시편 127편 1-2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먼저 솔로몬은 집을 건축하는 예를 듭니다. 집을 세우려면 건축가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수고하지 않고 어떻게 집이 세워지겠습니까? 수고를 하긴 합니다. 그런데 집을 짓는 수고가 헛수고가 되지 않으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세상은 ‘더 열심히 수고’해야 헛수고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더 나은 결과를 얻는 자만이 성공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정 반대로 선포합니다. 솔로몬은 ‘헛된 수고와 복된 수고’의 차이는 인간의 열심과 지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수고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없는 수고는 헛될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수고는 헛될 뿐입니다. 

인간이 볼 때에는 제법 근사해 보이고 현란해 보이고 부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력하고 저렇게 수고하더니 결국 성공하는구나, 라는 삶을 우리 주변에서 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삶에 속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  없는 그런 삶은 결국은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꽃의 영광과 금방 사라지는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하나님 없는 수고는 헛고생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십니다. 그 분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지금도 다스리십니다. 그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수고를 의지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수고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 예는 ‘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튼튼한 성을 짓습니다. 그 성이 아무리 튼튼하게 지은 성이지만, 잘 지키지 않으면 적이 와서 빼앗아 버리면 헛수고입니다. 그래서 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도나 도둑이 침입해 귀중한 재산과 소중한 먹을거리들을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출몰할지 모르는 적을 감시하기 위해 파수꾼이 필요합니다.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교대 근무를 서면서 적의 동태를 살핍니다. 그렇지만, 꼭 거기까지입니다. 깨어 있을 뿐이지 정말 성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파수꾼이 성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성을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성을 지키고 보호하지 아니하시면 깨어 있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세 번째 예는 ‘농사’와 관련한 것입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들며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농사일입니다. 한 여름의 해는 왜 이렇게도 긴지요!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제발 해가 빨리 져서 어두워지기’를 바랄 정도입니다. 논과 밭에서 하는 일은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다. 잡초를 제거하고 돌을 주워내고 거름을 주고, 씨앗을 심고, 비가 오지 않아 가물면 또 물을 퍼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씨가 싹을 틔웁니다. 떡잎이 난다고 끝은 아닙니다. 그 때부터 잘 관리하지 않으면 헛수고가 되기 일쑤입니다. 들짐승들이 와서 싹을 잘라 먹기도 합니다. 두더쥐가 땅 속을 파헤쳐 놓아 곡식이 자라지 못하도록 합니다. 잡초들이 식물 옆으로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정말 징그럽게도 많이 올라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없애주어야 식물이 잘 자랍니다. 모두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쉬지도 않습니다. 휴가도 없습니다. 육체는 피곤하고 영도 지칩니다. 수고는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삶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힘들게 만들고 맙니다. 그렇게 해야 겨우 나중에 수확을 해 ‘떡’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수고의 떡’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고해 봐야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 삶의 모습입니다. 

수많은 사람은 이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고로 얻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보라’고 큰 소리 칠 것입니다. 돈도 많고, 재물도 많고, 집도 좋고, 쌓아 놓은 명예도 대단하고.......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이 애쓴 수고로 이룬 것들이 아니냐고 신자를 향해 조롱합니다. 

열심히 수고하여 공부한 결과 이렇게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고 자랑합니다. 너희도 그렇게 열심히 수고해야 할 거라고 가르칩니다. 학원도 열심히 다니고, 늦게까지 밤 잠 자지 않고 공부하고,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해야 경쟁에 뒤처지지 않고 성공한다고...... 어떤 대학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어떤 신분과 어떤 때깔 나는 삶을 사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니,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해! 이런 말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삶이란 아무리 열심히 수고한다고 할지라도 헛되고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분명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헛수고가 아닌 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수고이고, 고통입니다. 수고를 통해 얻게 되는 달콤함이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복이 아니라, ‘몰핀’이나 ‘마약’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이 얻은 세상의 복이라는 것은 그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죽이는 허무한 삶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 불안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수고하지 않으면 한 순간도 견뎌내지 못합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의미는 ‘수고’ 자체에 있습니다. 수고가 그들의 삶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수고만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완전히 반대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왕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보호를 받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절)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의 뜻은 ‘그가 사랑하는 자’ 혹은 ‘그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는 삶의 모습이 다릅니다. 그들은 절대로 헛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지만, 헛될 뿐입니다. 집을 세우는 수고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지만, 헛됩니다. 성을 밤 잠 자지 않고 지키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헛된 삶이 없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의 삶의 독특한 모습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고 합니다. ‘잠’은 쉼이고 평안을 표현하는 은유이기도 하지만, 실제 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시편 127편에서는 ‘잠’이 ‘수고’와 대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수고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사랑하는 신자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을 누리는 모습이 분명하게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은 절대로 헛된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잠’을 누린다고 합니다. 헛된 수고에 시달리지 않고 충분한 잠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복 받는 신자의 여유 있는 삶의 모습이 잠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는 그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격하며 그 사랑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을 부러워하지 않고 세상의 삶의 처세술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기뻐하며 믿음으로 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들을 돌봐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깨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어려운 가운데서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그것은 당신의 백성에게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걱정하며 수고의 땀을 흘리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헛된 수고를 하지 않고 잠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의 생명을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거대한 배도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구명보트도, 헬기도, 해경도, 최첨단 잠수함도 1초를 다투는 재난 가운데 있는 우리의 생명을 구해낼 수 없습니다. 심지어 국가도 우리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음이 만천에 드러났습니다. 혹자는 국가가 우리의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국가가 인간의 생명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결정과 다스리심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의 생명을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성도들의 삶을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신자들의 미래를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언약의 자녀들의 앞날을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버지들의 사업을 선하게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어머니들의 걱정을 함께 염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학생들의 학업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미혼 남녀의 결혼을 책임지십니다. 

시편 23편을 읽으며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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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17.07.31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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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8월 소책자(종교개혁과 문화) 설교, "창조주가 주신 문화와 문화사명(창 2:4-17)" 김재윤 교수

    Date2017.07.31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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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8월 시편찬송 8편 악보입니다

    Date2017.07.31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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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7월 시편찬송 49편 악보입니다

    Date2017.07.31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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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7월 시편 설교, "짐승의 길 VS 사람의 길 (시편 49편)" 박창원 목사

    Date2017.07.01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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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7월 원문설교, "여호와 닛시 (출 17:8-16)" 김하연 목사

    Date2017.06.28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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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7월 소책자(종교개혁과 경제) 설교, "경제와 경영에서의 개혁자 요셉(창 41:47-57; 창 47:13-31)" 조성국 교수

    Date2017.06.27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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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6월 시편 설교, "심판자들의 심판자께로(시편 82편 1-8절)" 이정규 목사

    Date2017.06.22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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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6월 소책자(종교개혁과 정치) 설교, "하나님의 정치(말 2:17-3:5)" 안재경 목사.

    Date2017.06.09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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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6월 시편찬송 82편 악보입니다

    Date2017.06.07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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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6월 원문설교, "십자가 (요19:31-37)" 김하연 목사

    Date2017.06.07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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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5월 원문설교, "능력있는 기도 (삼상 1:1-18)" 김하연 목사

    Date2017.05.16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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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5월 소책자(종교개혁과 가정) 설교, "가정에서 할 일: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라!(신 6:4-6; 시 78:1-4)" 임경근 목사.

    Date2017.05.04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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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5월 시편 설교, "헛수고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시편 127편)" 임경근 목사

    Date2017.05.04 By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Views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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