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가 주신 문화와 문화사명
창세기 2:4-17
김재윤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매뉴얼의 중요성
우리가 구입하는 모든 전자제품에는 설명서, 메뉴얼이 들어 있습니다. 대부분 버리시죠? 저도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곁에 친하게 지내던 어떤 지인이 이런 매뉴얼을 다 모아두는 걸 보았습니다. 작은 것들은 상자까지 다 같이 보관하더군요. 저도 배워서 웬만한 메뉴얼을 다 모았습니다. 있으니까 한 번씩 보게 됩니다. 매뉴얼에는 이 물건을 처음 어떻게 작동하는지, 특징이 무엇이며 기능들이 무엇인지, 고장이 나면 어떤 사인이 뜨고 증상들이 있는지…만든 사람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싶은 모든 정보를 넣어 두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합니다. 천지, 이 세상 만물을 지으신 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지으셨고 어떻게 기능하고 어디를 향해서 가야하는지 그 매뉴얼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전자제품 매뉴얼을 모르는 것은 인생에 치명적 지장은 없습니다. 수리 센터의 힘을 빌릴 수 있겠죠. 그러나 천지의 창조주께서 주신 메뉴얼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분이 창조주이시고 이 메뉴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경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이 사람을 어디에 두셨습니까? 잘 아는 것처럼 에덴동산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에덴동산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장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
동방은 어디를 말할까요? 우리는 동방박사를 압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이란, 이라크가 있는 지역, 유브라데와 티그리스강이 있는 곳에서 온 별 연구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덴에 있는 한 동산은 이 동방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동방전체도 아니고 에덴이라는 지역에 거기에 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에 사람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만드셨지만 사람은 여기 동방의 에덴 지역에 있는 동산을 조성하셔서 여기에 두셨습니다. 거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 열매를 두시고 강이 흘렀습니다. 여기에 사람을 두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처음 어떤 임무를 주십니다.
2장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첫 두 가지 임무, 우리 인생의 메뉴얼은 경작하는 것과 지키는 것입니다.
첫 명령: 지키라!
하나님께서 에덴에 있는 동산에 사람을 두시고 주신 첫 임무는 이 동산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동산을 지킬 수 있을까요? 성을 높이 쌓거나 무기를 준비해서 이 동산을 지키는 것일까요? 아담이 불침번을 서면서 이 동산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임무를 주시고 다른 설명을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아주 짧은 말씀을 주십니다.
2장 16-17절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3장에 보면 아담이 어떻게 이 동산을 지키지 못하는가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아담과 함께 한 여인이 뱀이 이 동산을 혼란하게 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아담과 여인은 왜 뱀이 이 동산을 실제로 장악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곧 하나님께서 주신 16-17절 말씀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동산을 지키는 것은 어떤 무력이나 기술이나 첨단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16-17절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3장 3절에 나와있는 여자의 말을 잘 비교해 보면 아담과 또 함께 한 여인이 어떤 점에서 말씀을 지키지 못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반드시,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죽을까 하노라 이렇게 약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100% 반드시, 이렇게 되어 있는 부분이 30-40%정도로 약해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에 맞추어 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또 희미해진 것이 있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이름을 가르쳐 주셨지만 여자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라고만 해 버립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하고만 하신 것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이렇게 덧붙이고 강하게 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여인이 이해하고 있는 말씀은 이처럼 비슷하게 보이지만 세 부분이나 틀렸습니다. 사실 이 여인과 또 이 여인과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은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기분을 썩 좋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 다른 나무의 열매는 다 먹을 수 있는데 이것만 먹을 수 없는 것일까?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고 멀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매는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하고만 하셨는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그냥 저 나무는 이 동산에서 없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는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존중받고 하나님을 온전히 높이는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표를 해 두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나무 이름도 잊어버리고 만지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중심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여드려야지 그런 마음을 가지도록 했는데 아예 만지지도 않고 이 나무를 싫어하고 외면한 것입니다.
동산을 지키는 일에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보면 이 동산을 지키는 첫 임무가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동산을 지키는 임무는 말씀을 지키는 것에서 실현됩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높이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말씀의 의도도 오해했고 그래서 말씀 자체도 오해했습니다.
창조주가 주신 첫 임무는 우리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복음 말씀으로 교회를 지키고 세우는 임무가 바로 이 첫 임무와 같은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강조한 말씀과 교회
칼빈은 성경과 함께 성경을 사용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설교의 중요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했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와 은사들을 죄로 가득한 심령에 쏟아 부으셔서 하나님과 세상을 바르게 알 수 있는 심령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죄인들의 심령속에 새겨주시고 그것으로 우리를 장식해 주십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들이 아니라 귀로 들리는 설교가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 죄인의 마음에 새롭게 아름다움을 보고 알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중세의 로마 천주교회는 형상들과 보이는 그림들, 성례전과 같이 물질적인 것들로 가득했던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종교개혁은 들리는 말씀이 중심이 되는 예배로 바꿨습니다. 즉 보이는 문화예술이 중세 로마교회의 예배에서 중심이 되었다면, 종교개혁에서는 들리는 설교가 중심이 되어 예배라는 미적 가치를 만들어가는 도구가 되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성경이라는 책과 그 책이 ‘들리도록’설교할 때, 성령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에 만들어주시는 새로운 가능성, 곧 하나님과 세상을 바르게 ‘보는 것’(seeing)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중세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볼 수 있는 도구들을 제작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문화예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오직 들리는 말씀만이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만 교회를 지키고 세워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에덴에 있는 동산에서 첫 아담은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교회는 세워가는 첫 사명을 받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보이는 시각적인 장치들이나 예술, 성상, 성유물이 아니라 오직 복음 말씀만이 죄인들의 심령을 변화시켜 교회를 지키고 세워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아담에게 주어진 지키라!는 첫 사명을 이렇게 확인하고 그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두 번째 명령: 경작하라!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째 임무는 경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동산에는 먹을 열매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따로 땅을 경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경작하는 임무를 주셨습니다.
에덴에 있는 동산에 대한 설명들이 10절부터 14절까지 나옵니다. 이 설명은 좀 복잡해 보입니다. 에덴에서 어떤 강이 시작됩니다. 그 강이 에덴에 속해 있는 이 동산을 적십니다. 그리고는 동산을 적힌 후에는 갈라져서 네 개의 강이 됩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입니다. 힛데겔이라는 강은 앗수르동쪽이라고 합니다. 앗수르는 우리가 잘 아는 곳입니다. 나중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나라로 나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 본 동방에 있는 곳입니다. 유브라데 강도 잘 알려진 강입니다. 나머지 두 강은 이 두 강의 위치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적신 후 네 갈래로 갈라진 이 강을 두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강이 있다는 것은, 물이 있다는 것은 경작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5절 말씀에 보면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다고 땅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할만큼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손을 더 이상 대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 손을 대고 경작해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이 땅이 더 완성되어야 하는 부분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은 에덴에 있는 동산만 적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산 밖에도 흘렀습니다. 동산 밖을 향해서 흘러가서 네 근원을 이루는 이 강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 동산 안에만 살아라, 열매 따먹고 텃밭 좀 일구고 그렇게 살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여자는 우선 에덴동산을 지키면서 경작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을 넘어가서 네 강을 이루는 곳을 따라 경작의 범위를 넓혀 가야했습니다.
특히 첫 강인 비손에 대한 설명을 한 번 보십시오. 비손 강은 금이 있는 하윌라 땅을 둘렀습니다. 그런데 이 하윌라 땅에는 순금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델리엄이라는 진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마노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비손 강이 흐르는 곳에 매우 비싼 귀금속과 가치가 상당한 향유가 있었습니다. 단지 먹고 사는 차원의 물건들이 아니라 넉넉하게 먹고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이런 땅까지 경작하길 원하셨습니다. 사치스런 생활을 해라! 이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있는 동산을 넘어서 네 강을 따라가면서 경작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단지 먹고 사는 일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가치를 지니는 일을 추구하도록 하셨습니다.
문화와 문화사명
문화(culture)의 어원은 라틴어의 ‘경작하라’는 동사(colore)에서 왔습니다. 인간의 모든 노동, 일의 결과물이 사실은 문화입니다. 에덴에 있는 동산에서 창조주는 문화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시고 또한 첫 인류에게 문화명령을 주셨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동산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경작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가치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는 일은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세상 속에서 경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맡은 청지기로서 거기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하윌라 땅을 둘렀던 순금, 베델리엄과 호마노는 우리가 일하고 공부하고 휴식할 때 그 대상이 되는 모든 가치있는 대상들을 상징합니다.
공부하고 일하는 것은 분명히 힘든 일입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땀을 흘려야 수고해야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장 17-19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회복된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원리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공부나 일은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서 경작하라고 하신 명령을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건설을 생명처럼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소수였고 약자였고 십자가 아래 있는 핍박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교회밖에 주어진 세상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 밖의 문화에 대해서 이원론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창조주를 고백하고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밖의 모든 영역에서도 나타나도록 힘썼습니다. 그들은 중세 로마 천주교회와도 거리를 두었지만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했던 재세례파 사람들과 분명히 달랐습니다.
특별히 문화예술과 관련해서 종교개혁 이후에는 그 이전과는 큰 변화가 나타납니다. 중세까지의 문화예술은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항상 영적인 것을 표현하는 표지가 문화예술 작품 속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로는 어떤 특정한 장소(가령 예배당 같은), 특정한 신성한 문화예술 작품이 하나님을 표현하고 상징하고 드러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죄인의 심령속에 나타난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문화예술의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변화된 마음은 들리는 말씀이라는 삼위 하나님의 문화 예술적 작업의 창작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삼위 하나님에 의해 미적 가치를 지닌 문화예술 작품으로 빚어집니다. 나아가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이 모두 천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세상으로 나가서 하는 모든 삶의 활동들 역시 넓은 의미에서 문화예술 작품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활동들로 인해 참된 하나님의 형상들과 그림들이 그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예배당 건물 안에 있는 그림들, 조각들, 성유물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예배의 삶과 활동들에서입니다. 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일이 문화예술 작품이고 문화예술의 원천이자 소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 이후의 문화예술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존중하였습니다.
지키라 그리고 경작하라
우리는 에덴에 있는 동산에 하나님께서 첫 인류에게 주신 첫 사명, 매뉴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명을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연결해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주신 두 임무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 두 임무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 속에서 문화적인 활동을 하고 문화명령, 곧 경작하라!는 명령을 수행할 수 있습니까? 먼저 에덴에 있는 동산, 곧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에덴에 있는 동산을 지키지 못하면 동산 밖을 향해서 경작하는 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따라 에덴에 있는 동산이 하나님의 원리가 다스려지는 곳이 되어야 그 원리를 자연스럽게 동산 밖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께서 복음 선포를 통해서 죄인들의 심령 속에 끊임없이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 인간의 심령이 성령 하나님의 문화예술 작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반드시 교회 밖 세상을 향해야 합니다. 지키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키면서 경작해야 합니다. 세상 밖을 향해서 그 곳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일들과 사람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곳에서 일하고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금, 진주, 향유를 찾아내고 발굴해야 내야 합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일하는 목적이 다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일과 똑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일상이 복음 설교를 통해서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모든 문화는 분명히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고신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지키면서 경작하는 복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