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12(동행을 약속해주시는 예배마침 민6:22-27 계22:18-21)

by kosin posted Apr 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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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12)

설교제목/ 동행을 약속해 주시는 예배마침


설교본문/ 민수기 6:22-27; 요한계시록 22:18-21

주제문장/ 하나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우리에게 복을 선언해 주시고 동행을 약속해 주신다.

설교개요/ 예배의 마지막 순서들은 ‘광고’(↔), ‘마침찬송’(↑), 강복선언(↓) 등이다. 광고는 그냥 단순한 광고가 아니라 ‘성도의 교제’라로 이해해야 한다. 마침찬송은 세상으로 진군해 나아가는 진군가와 같다. 그렇다고 십자군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마지막 순서는 절정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강복선언’이다. 이 순서는 축도라고 알려져 있는데 목사가 회중을 위해 기도해주는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시간이다. 복선언을 듣고 본 회중은 하나님의 동행을 확신하면서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제부터 삶의 예배가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남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과 함께, 자기 백성 앞장서서 나아가신다.  


■ 민 6 : 22 - 27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 계 22 : 18 - 21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예배 마침은 절정이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극장에서 영화나 공연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평온하게 시작되었다가 위기상황이 발생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가 절정을 향해 치달립니다. 마침내 모든 문제가 해소되고 결말에 이릅니다. 문제가 거의 해결되고 대단원의 결말을 향해 달릴 때는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기보다는 감동을 유지시켜 주기 위한 요소들이 동원됩니다. 관람객들은 마지막 순간이 안겨다 준 감동으로 인해 공연이나 영화가 끝나도 객석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쉬운 것이지요. ‘벌써 끝나다니!’라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순간이 준 감동을 조금이라고 더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예배 마무리에 무리가 없습니까? 예배 마무리는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1시간을 크게 넘기지 않는 예배인데 ‘예배가 언제 끝나지?’하면서 기다렸다면 예배가 끝나는 즉시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는 않습니까? 늘 반복되는 예배는 영화나 공연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가 힘듭니다. 예배를 기획하는 분들은 이런 것을 고려하여 예배의 감동과 감격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습니다. 예배에서는 설교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설교 이후의 순서들은 설교의 감동을 지속시키기 위한 목적이 제일 클까요? 예배는 어떻게 마치는 것이 좋겠습니까? 공연이나 영화처럼 해피 앤딩으로 끝나는 것이 좋겠습니까? 혹은 차기작을 위한 여운을 남기면서 끝내는 것이 좋을까요? 예배를 마치는 순서들은 대책 없이 풀어 놓았던 것들을 주섬 주섬 챙겨 넣기에 급급하지 않습니까?
    예배가 무한정 계속될 수 없으니까 끝내는 순서가 필요합니다. 예배 마침은 단순한 마무리가 아니라 절정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화룡점정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났습니다. 성찬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내어주시고, 헌금을 통해 우리가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점차로 고조된 예배가 이제는 절정에 이릅니다.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마칩니까? 아니, 우리는 예배에 어떻게 방점을 찍습니까? 우리는 예배에 어떻게 도장을 찍고, 그것에 인을 칩니까? 예배를 마무리하는 순서로 우리는 마침 찬송과 강복 선언을 배치합니다. 여기서 덧붙여서 소위 말하는 광고 순서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광고를 쓸데없이 부풀은 혹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도대체 광고가 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까? 예배 마침의 순서를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마침 찬송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진군가이다

    예배를 마무리하는 찬송은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예배하는 회중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서 하나님께 나아갔던 회중은 이제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오후예배가 있기는 하지만 예배의 마침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하나님을 교회에 남겨놓고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어떤 분은 하나님을 예배당 천장에서 줄타고 내려오시는 분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가 시작될 때에 예배실 천장으로부터 줄을 타고 내려왔다가 예배가 끝날 때에 다시금 그 줄을 타고 예배실 천장으로 올라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실에 매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을 떠나실 수 없어서 ‘굿 바이, 잘 가!’하면서 신자들을 배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신자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십니다. 하나님은 신자와 더불어 이 세상으로 나아가십니다. 하나님이 앞장서 가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배의 마침 찬송은 신자들이 이 세상으로 힘있게 행진하는 행진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정식에 어울리는 찬송이면 좋겠습니다. 이 곡은 신중하게 골라야 하겠지만 회중에게 익숙한 곡이어야 할 것입니다. 낯선 곡을 배운다는 느낌을 받으면 좋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둘째 성경본문이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하거나 빼지 못할 것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에 대한 교회의 반응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마라나타’라는 아람어입니다. 신약 신자들은 예배 마치고 돌아갈 때 이 ‘마라나타’로 서로 인사했습니다. 이 인사는 엄청난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주님이 곧 오실 것이니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하면서 소망을 잃지 말자는 격려의 말이었습니다. 마지막 찬송은 바로 이렇게 세상에서 고난받고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침 찬송을 주기도송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조금은 생뚱맞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예배에서 주기도문은 훨씬 더 일찍 와야 한다고 생각하면 말입니다. 중보기도를 한 후에 이어서 주기도문을 기도하듯이 같이 낭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찬식이 있다면 성찬식 안에 주기도문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 중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간구가 있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구도 있습니다. 신자들이 주의 떡에 참여할 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한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신자들이 주의 떡과 잔에 참여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 것이 그리스도께서 살을 찢으시고 피 흘려 주심으로 성취된 것을 봅니다. 주기도송을 마지막 찬송으로 부른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 살겠다고 헌신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시험에서 건져주실 것도 구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으로 나아간다

    예배의 마지막 순서는 ‘강복선언’입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는 ‘축도’(祝禱)라고 부릅니다. 축도라는 말은 복을 빌어주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시간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께 복 주십사 구하는 시간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순서는 복을 선언하는 순서입니다. 복 내릴 것을 선언하는 것이니 강복선언이라고 부르면 좋겠습니다. 축도라는 용어에 너무 익숙해서 그 용어를 바꾸기 어렵다면 축도라고 부르더라도 목사가 기도해주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을 선언하는 것을 보라고 목사가 두 손을 드는 것이니까 회중은 눈을 떠서 목사의 든 손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장 분명한 시청각교육, 예배에서의 마지막 시청각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서는 예배의 처음 부분과 아름답게 호응합니다. 예배가 시작되면서 복을 비는 인사의 말이 있었습니다. 삼위 하나님으로 인해 오는 은혜와 평강을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인도하는 목사를 통해 교회를 향해 인사를 걸어 오셨습니다. 예배는 이렇게 하나님의 인사로 시작합니다. 이 인사도 사실은 강복선언입니다. 이제 예배가 마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다시금 복을 선포해 주시면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인사가 예배 앞뒤를 감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 주심이 예배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예배는 어미 새가 새끼를 품에 꼭 품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꼭 품으시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예배의 마지막 순서인 강복선언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침 찬송을 한 후에 반주자는 짧은 후주를 합니다. 그 후에 짧은 침묵의 시간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복을 선언하는 시간이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복 선언을 기다립니다. 예배 인도자는 “여러분의 마음을 주께 들어 주의 복을 받으십시오”라는 문구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들어서’라는 문구가 라틴어로 수르숨 코르다(Sursum Corda)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가 제네바에서 쫓겨나 스트라스부르에서 난민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는데 제네바 시의회가 그를 다시 돌아와 달라고 간곡히 청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돌아가기로 결심하면서 말합니다. “내가 내 자신의 것이 아님을 기억한다면 나의 마음을 들어 올려 주님께 제물로 바치기로 했습니다.”고신교회의 학생신앙운동인 SFC의 배지에 보면 손바닥 위에 심장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마음을 주께 들어 올린다는 상징입니다.
    신자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들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합니다. 목사는 두 손을 높이 들어서 복을 선언합니다.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리지만 이 시간은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세상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 주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 하늘로부터 자기 백성을 직접 복 주시는 시간입니다. 목사가 두 손을 높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손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은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목사가 손을 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보라고 손을 듭니다. 온 회중은 눈을 떠서 그 손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육신의 눈만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열어서 목사의 들려진 두 손을 보아야 합니다. 회중은 목사의 들려진 두 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직접 복 주시는 것을 감격스럽게 받을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복을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

    강복선언으로 합당한 말씀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다양한 복의 내용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매 주일마다 계속해서 다른 말씀으로 복을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개혁한 교회는 주로 두 가지의 말씀으로 복을 선언해 왔습니다. 하나는 구약성경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까지에 나오는 아론의 대제사장적 축복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얼마나 아름다운 복의 내용입니까? 세상이 이런 복을 우리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복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삼중적인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이 삼중적인 복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모든 복을 요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적들로부터 자기 백성을 지켜 주십니다. 애굽에서도 대적이 있었고, 광야생활할 때도 대적이 있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도 대적이 있었습니다. 대적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원수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시고 악한 손아귀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그 얼굴빛을 비춰주십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이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은혜이고, 평강입니다. 하나님은 저주하는 얼굴빛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자비의 빛, 평강의 빛을 비추십니다. 개혁한 교회는 바로 이 민수기의 복 선언을 주일 낮예배 때 사용했습니다. 
    다른 하나의 강복선언 문구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이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복의 선언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나 문제가 많고 골치가 아팠던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삼위 하나님의 복을 아름답게 선포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인사말을 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많은 문제와 죄악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성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바울이 이제 고린도후서를 마무리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문제많은 교인들과 문제없는 교인들로 구분하지 않고 그들 모두를 향해 복을 선언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복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복은 신자를 가려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 모두에게 선포됩니다.
    각 위격에 단 하나의 단어를 연결시킵니다.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모든 것은 은혜라는 단 하나의 단어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성부께서 베푸시는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합니다. 성령께서 베푸시는 모든 것은 교통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에 집중시킵니다. 삼위의 각 위격께서 하시는 일들을 단 하나의 단어로 줄여도 됩니다. 복잡하게 늘어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말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가 필요하기도 하고, 단 몇 단어로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 사랑, 교통입니다. 물론 평화, 구원, 위로 등의 말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사도는 삼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모든 것을 단 세 단어로 요약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요약의 대가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삼위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등장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은혜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먼저 나옵니다. 그 다음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차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성령의 교통을 통해 우리에게 확증됩니다. 성령께서는 교통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교회가 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통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성령님의 교통하게 하시는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삼위 하나님의 복을 오후예배 때 선언한다면 오전 예배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이 한꺼번에 주일에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예배 마침에 대한 적절할 예절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강복선언 시간에 다같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강복선언 시간을 예배가 마친다는 사인으로만 받아 들이면 안됩니다. 어떤 이들은 강복 선언이 시작되면 예배당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뭔가를 주섬 주섬 챙깁니다. 강복선언을 하는 시간에 벗어놓았던 외투를 입는다든지, 심지어 이 강복선언 시간에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예배 마치고 급하게 볼 일이 있어서 그럴까요? 예배 마치고 교인들과 인사하고, 직분자들과 인사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럴까요?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 큰 무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의 선언을 받지 않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서양에서는 예배시간에 혹 늦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배의 마지막 순서인 이 강복선언만큼은 꼭 받으려고 합니다. 미신적인 생각 때문일까요? 강복선언은 성례가 아닙니다. 강복선언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받으면 엄청난 복이 됩니다.
    예배인도자가 강복선언을 하면 온 교회는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온 교회가 마지막으로 아멘으로 크게 화답할 때 그 소리는 예배당을 진동시킬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전 삶을 아멘으로 채웁니다. 이제 예배가 공식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하나 남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온 회중이 다같이 하는 공식적인 순서는 아닙니다. 예배 시작될 때도 공식적인 순서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예배 마칠 때도 공식적인 순서에 들어가지 않는 하나의 행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인도자가 강단에서 내려가 예배를 위임했던 장로와 악수하는 것입니다. 예배시작에도 악수례가 있고, 예배 마침에도 악수례가 있습니다(일반적으로 장로교회에서는 이 순서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굳이 이 순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럽의 개혁교회에서 목사가 개교회에 속해 있기에 당회가 매번 목사에게 예배인도를 위임한다. 장로교회에서는 목사가 노회소속이기 때문에 노회로부터 목회를 이미 위임받았기 때문에 굳이 이렇게 예배를 위임받는 순서를 가질 필요가 없다). 이것은 장로단으로부터 위임받은 예배를 잘 마쳤다는 보고입니다. 그 보고는 장로단에게 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 보고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개인자격으로 예배를 인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예배를 인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재주로 기도하고, 설교하고, 복을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회중은 예배가 마친 직후의 이 상징적인 행위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자기 백성을 만나주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때 반주자가 후주를 연주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회중은 반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거룩한 하늘소리를 들으면서 예배당을 나갑니다. 질서 있게 예배당을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예배실 앞자리에 앉은 분들은 좀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예배실 입구 가까운 자리에 있는 분들부터 차례로 예배당을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겠습니다. 회중석 복도는 좁은데 먼저 나가려고 서두르다가 교인들끼리 어깨를 부딪히고 기분 상하는 일마저 생깁니다. 예배 잘 드리고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에 마음이 상해서 받은 은혜를 다 쏟아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강복선언 후 모든 회중이 자리에 다시 앉습니다. 그러면 예배인도자가 회중석을 돌면서 모든 회중과 일일이 목례로 인사합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인사하기 전에 예배 인도자와 먼저 인사를 나눕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은 것에 대해 예배 인도자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광고는 교회적인 일을 알리고 교제하는 것이다

    예배 순서에 보면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광고’라고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예배안에 광고가 들어올 수 있습니까? 예배 시간에 광고가 들어가는 것이 어색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굳이 광고가 예배 시간 안에 들어 와야 하는 것입니까? 주보에 필요한 광고가 다 나와 있는데 왜 굳이 예배시간에 광고합니까? 주보에 광고가 되어 있어도 구두로 광고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왜 예배 전에 광고하지 않습니까? 예배 마치고 광고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 예배 전에 광고가 있으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산만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배 후에 광고하면 예배의 절정이 사그라 들 수 있습니다.
    예배 중에 광고하는 것이 합당할까요? 하나님의 회중과 하나님이 만나는 예배에서 교회의 모임이나 행사, 교인 가정에 일어난 사소한 일들 등을 광고할 수 있습니까? 설교가 길다고 불평하면서 광고를 10분 넘도록 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광고순서를 ‘성도의 교제‘라는 차원에서 해석합니다. 주보에 필요한 교회소식은 대부분 나와 있으니 성도의 교제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교회적인 문제를 온 교회 앞에 알리는 시간입니다. 교단 노회나 총회참석 보고를 하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노회 총회에서 한 교회적인 결정을 교회에 알리는 것입니다. 교회에 등록한 교인들을 예배 중에 소개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먼 곳으로 이사를 해서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에도 인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자들 개인이나 가정을 위해 긴급하게 기도해야 할 문제들도 온 교회 앞에 알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광고는 인간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광고야말로 성도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과도 교제합니다. 성찬상에 참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제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서로 교제합니다. 한 상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한 떡과 한 잔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처럼 광고는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의 고통을 함께 나눕니다. 일단 구두로 나눕니다. 헌금을 통해 서로의 필요를 채우지만 광고를 통해 서로의 필요를 말로 나눕니다. 우리는 광고조차도 나눔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특정부서의 행사를 광고할 때도 그것은 행사광고가 아니라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광고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됩니다. 회중은 광고를 통해 한 몸에 속해 있다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기도제목이 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광고는 개인적으로 축하할 일들을 사사로이 알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적인 일을 알리고 함께 기뻐하는 시간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배 마침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동행을 기대해야 하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가 무슨 효력이 있습니까? 예배는 고통받는 현실에서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것이라고 삐딱하게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배에 감동과 감격을 고조시키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게 만드는 아편과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배를 공연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은 더 굳어질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옛날에는 연극의 폐악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도 당시 그리스에서 유행하던 연극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연극에서 신들의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이야기들을 막 늘어놓는데 관람객들은 그것들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소진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현실에 쏟을 정열을 연극을 통해 다 소진시켜 버리기에 연극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극과 비교하면 예배는 너무나 따분(?)하기에 큰 위험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배는 공연이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의 감정을 소진시키거나, 감정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끝나면 공연이라는 가상현실이 끝나고 실재현실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배 마침으로 예배의 생생한 현실이 신자의 삶으로 연장됩니다. 마침찬송과 강복선언을 통해 공적인 예배는 마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복을 넘치게 받고 이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리가 우글거리는 세상 속에서 양처럼 살아가야 하지만 삼위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할 것이니 두렵지 않습니다. 예배 마침은 복 주시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기에 신자들은 기쁨으로 세상으로 행진해 갑니다. 예배가 마친다고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예배 마침과 함께 시작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동행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마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 세상으로 나아가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예배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예배를 인도하셔서 우리를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령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들어 하늘 아버지를 향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배를 통해 이 세상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게 해 주시고,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을 듣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배를 마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예배를 마치고 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저희들에게 동행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시니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우리에게 비쳐 주셔서 세상살이에서 어두워질 수 있는 저희들의 마음을 환히 비쳐 주시옵소서.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교통이 저희들의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회중이 하나님과 만난 공적인 예배는 마치지만 삶에서의 예배가 새롭게 시작되게 하셔서 저희들이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지극히 어리석고 연약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온 세상이 보게 하여 주옵소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을 축복하셨던 그대로 지금도 우리를 축복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묵상하고 나누기

1. 공연의 흐름과 예배흐름을 비교해 봅시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2. 마침 찬송으로 적합한 곡을 찾아 봅시다.

3. 초대교인들의 인사말 ‘마라나타’를 마침 찬송에 적용해 봅시다.

4. 강복 선언 문구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5. 강복 선언을 받는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6. 예배당을 떠날 때의 예절에 관해 말해 봅시다.

7. 예배 마침 순서들을 일상의 삶과 관련을 맺어 봅시다.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마침 찬송은 세상으로 나가는 행진곡이다, 맞습니까?

2. 강복 선언은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다, 맞습니까? 


3. 하나님께서 (    )을 약속하시기에 신자들은 기쁨으로 (    )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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