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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전쟁 9


• 본문: 다니엘 3:1-30

• 제목: 생명과 바꾼 예배


서론

솔로몬 사후 하나님의 왕국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남 유다는 586년 바벨론에 의해 비참한 결말을 맞았습니다. 남 유다가 멸망하기 전, 백성들은 몇 차례에 걸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세 번의 포로(BC 605년, 597년, 586년) 중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605년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포로생활을 생각할 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살펴야할 본문 중 하나는 예레미야 29장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했습니다(렘 29:4-14). 뿐만 아니라 포로회복의 기간도 계시를 받았는데, 70년이었습니다(렘 29:10). 덧붙여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려주었습니다.

경건한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에 독립운동을 한다거나 다른 이방국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행위임을 잘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경건한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가정을 꾸리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거하는 성읍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도 받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벨론에 잡혀갔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니엘서를 읽을 때 항상 기억해야 될 내용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에 두고 살았고, 그러한 삶은 다름 아니라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회복시킬 것(포로회복)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징계 중에 있는 언약 백성들이 그 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살아야 되며, 또한 그러한 징계와 형벌 중에도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포로생활은 하나님의 뜻이니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신다.”

“포로생활 중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죄를 멀리하며 정결한 삶을 유지해야 된다.”

이것이 다니엘서를 읽을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될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시각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신상을 만들어 온 백성에게 경배하게 했고, 그 왕의 명령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거절하며, 그것 때문에 세 명의 경건한 백성이 풀무 불에 던져지고, 그 풀무 불에서 살아나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주제와 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겠습니다.


주제: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도 예배를 귀히 여기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1. 우상숭배를 촉구하는 왕의 명령

2. 죽음을 선택한 신실한 백성들

3.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


본론

1. 우상숭배를 촉구하는 왕의 명령

느부갓네살은 높이 60규빗과 넓이 6규빗의 금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왕은 이미 한차례 큰 신상 꿈을 꾸었습니다(단 2:31-33). 그 자신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모른 상태에서 다니엘이 꿈의 내용뿐만 아니라 해석도 했습니다. 꿈에서 본 큰 신상의 머리가 자신의 왕국임을 왕은 알았습니다. 그 신상의 머리는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왕은 머리뿐만 아니라 온통 금으로 된 거대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60규빗은 약 30m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죄인의 모습입니다. 금, 은, 놋, 철, 그리고 흙으로 만들어진 그 신상은 뜨인 돌에 의해 부서졌습니다. 각각의 금속은 각각의 제국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왕국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을 왕은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또한,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 모든 교훈을 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신상을 만들어 스스로 신과같이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금으로 된 거대한 신상을 만들었는지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12절입니다.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고소 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신상에 절하지 않는 사람들을 두고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든 목적은 하나입니다. 왕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왕과 왕이 섬기는 신이 같이 언급되었습니다. 신을 대리하는 왕. 신과 같은 왕. 이것이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만든 목적입니다.

왕은 모든 관료들과 각 지역 대표들을 두라 평지로 불렀습니다. 낙성식에 참여한 이들에게 신상에 절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낙성식은 신상의 규모만큼이나 성대했습니다. 나라 안의 중요 관료들은 물론이고 각 지역의 대표들도 참석했고, 온갖 악기가 동원되었습니다.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자에게는 풀무 불에 던져 넣는다는 경고도 주어졌습니다. 상황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가장 좋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많은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벨론 포로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의 보호 아래 비교적 안전하게 지냈습니다. 물론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를 잘 알았습니다. 바벨론이 훌륭하고 좋아서 이곳에 포로로 잡혀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언약 백성인 유다 왕국 치는 막대기와 보호자로 사용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포로생활을 하고 있음을 깊이 이해했습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유다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시드기야를 따르는 수많은 관료들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라 애굽에게 손을 벌리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결말은 비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지 않는 왕과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대하 36:11-21, 겔 17:13-16).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습니다. 경건한 선지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순순히 포로생활을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포로생활에 순응했습니다. 포로생활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이들이 안락하게 산 것은 아닙니다. 곧 바벨론 사람들의 생활에 동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일찍이 왕의 진미를 거절함으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깨끗함을 유지했습니다. 포로생활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 징계 중에도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구별됨을 생명보다 귀한 것으로 알고 끝까지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징계 중에도 보호하셨고, 지혜를 주셔서 바벨론 왕국에서 복음이 울려 퍼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 바벨론 왕국의 모든 지혜 자들의 어른이 되었으며, 세 친구들도 지방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를 얻었습니다(단 2:48-49).

하나님의 징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겸허히 그 생활 중에 있는 신실한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포로 중에도 왕의 진미를 거절하며 거룩을 위해 고군분투한 이들에게 또 다시 사단이 화살을 날렸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큰 시험이 지나고 잠시 평화가 찾아오나 싶더니 다시 더 큰 풍랑이 몰아칩니다.


성도 여러분!

사단은 이렇게 집요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합니다. 사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결코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습니다. 포로생활이라는 고난이 하나님의 보호로 안전하게 되자, 바로 그 보호의 그늘 아래에 거하는 백성들에게 다른 고난의 물결이 다가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사단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이제 힘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완전히 힘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합니다. 이런 사단의 속성을 기억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앞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시험과 유혹을 능히 이기는 성도들이 됩시다.

신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선언은 전형적인 우상숭배입니다. 거룩한 백성들의 예배를 부숴버리겠다는 사단의 날카로운 공격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의 예배를 공격합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것에 절하라고 유혹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우상숭배는 왕의 명령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합니다. 예배의 모양을 바꾸라는 유혹으로, 한 번 정도는 예배에 빠져도 된다는 속삭임에 우리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듦으로, 몸은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데 마음은 세상의 온갖 것들로 가득하게 하는 모양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지금도 사단은 예배를 왜곡시키고, 불평하는 마음을 품게 만듭니다. 한 번 즈음 예배에 빠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속삭입니다. 이런 유혹 앞에서 오직 하나님만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교회가 됩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과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모양으로 예배하는 교회가 됩시다. 그리하여 사단의 시험을 능히 이기는 교회가 됩시다.


2. 죽음을 선택한 신실한 백성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을 지키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용기 있게 대처했습니다. 그러자 곧장 고발되었습니다.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왕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소했습니다. 칼빈 목사님은 갈대아 인들의 고발을 해설하면서, 이들이 매우 의도적으로 덫을 놓았다고 했습니다. 곧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감시하였고, 포로로 잡혀온 주제에 나라의 고위직을 얻은 것에 대한 경쟁의식과 시기와 미움으로 고발했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인들의 고발은 어떤 면에서 매우 교묘합니다. 고발 자들은 유대에서 온 세 사람이 왕을 높이지 않았다는 내용을 가장 먼저 말합니다(12절 참고). 곧 갈대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문제를 언급하기보다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화가 난 왕은 죄수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합니다(13절). 끌려온 세 사람에게 왕은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최후통첩을 합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15절). 왕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확신에 찬 어조로 답합니다. 왕에게 대답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풀무 불에서 뿐만 아니라 왕의 손에서도 자신들을 건져낼 것이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시다면”이라는 말은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신하기에 담대히 구원을 말했습니다.

이어 거의 모든 성도들이 기억하는 그 유명한 고백이 선포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17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풀무 불에서 건져주시지 않을지라도 우상숭배를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곧 풀무 불에 들어가 죽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분노한 왕은 풀무의 온도를 평소의 일곱 배나 높였고, 군사들을 시켜 세 사람을 던져 넣었습니다. 불이 얼마나 뜨거웠든지 세 사람을 붙든 사람도 태워 죽였습니다. 결국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우상숭배에 절하는 왕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풀무에 던져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 사람의 고백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인지 이미 잘 압니다. 이 장면에 이르면 어린 아이라도 깨닫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신앙입니다. 우상을 섬기기보다 오히려 죽겠다는 신앙. 이보다 더 위대한 신앙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신앙을 비단 이 세 사람에게서 뿐 아니라 성경역사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선진들의 믿음, 오순절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도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멀리에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고신교회가 어떻게 출발했습니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른 분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어떤 이들은 신사참배 반대한 것을 너무 오래 우려먹는다고 비꼬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 비판을 받아도, 아니 백년, 천년이 지나도 이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고신교회는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기꺼이 생명을 버리겠다는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신앙을 과연 이어 받았는가 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신앙에 경종을 울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산성이요 방패임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신앙 때문에 명예와 물질과 직장과 가족을 잃어도 이 신앙을 고수합시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신앙. “그렇게 하지 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으로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는 교회가 됩시다.


3.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분명 세 사람을 풀무 불에 던졌는데,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불 속에서 걸어 다닙니다. 세 사람을 던지려고 붙든 사람도 태워버릴 강력한 불이 정작 불 속에 있는 사람을 태우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더 보입니다. 결박도 풀렸습니다. 자유를 억제하려고 묶은 줄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이 상하지도 않았습니다.

왕은 스스로 말합니다. 네 번째 사람은 모양이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 네 번째 신들의 아들처럼 보인 분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천사인지, 하나님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구약 여러 곳에서 사람처럼 등장하는 어떤 분이 때론 천사로, 때론 하나님 자신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사람들은 천사와 하나님이셨습니다(창 18:2,13,17,20, 19:1).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천사였고, 한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왕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풀무에서 나오라 명령했습니다. 풀무에 던지라 명령한 그가, 이제 자신의 입으로 다시 나오라 합니다. 사형을 집행한 입을 부끄럽게 만들며, 그 판결을 조롱합니다. 세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었던 신들의 아들 같은 분은 다시 사라졌습니다.

성경은 풀무 불에서 나온 세 사람에 대해 아주 상세히 묘사합니다. 불이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했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았으며, 겉옷 빛도 변하지 않았으며, 불 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평소보다 일곱 배나 강한 풀무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금도 해하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구원입니다.

이 모든 것을 왕만 본 것이 아니라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두 보았습니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도록 모든 이의 눈에 세 사람의 생생한 모습을 보게 했습니다. 이것은 살아나온 세 사람을 본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세 사람을 살린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명령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높으신 하나님의 역사를 똑똑히 깨닫게 만듭니다. 누구도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대적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왕은 자기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28절). 그리고 조서를 내립니다. 자기 왕국 안에서 누구도 하나님에 대하여 경솔히 말하지 말라고 하였고,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 터로 삼을 것이라 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더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생명을 던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꺼이 구원했습니다. 생명을 버린 이들을 풀무 불에서 건져내셨고, 그들은 땅 위에서 더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방의 왕을 부끄럽게 만들고, 항복하게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가지 더 묵상해야 될 내용이 있습니다. 풀무 불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받은 형벌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 풀무 불은 유대인, 곧 모든 언약 백성들에게 주신 메시지입니다.

구약성경 곳곳에서 풀무 불이 갖는 의미를 살펴봅시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사백 년을 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창 15:13). 그 예언의 말씀과 동시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이처럼 풀무는 언약 백성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쇠가 풀무를 통과하면서 불순물이 제거되고 온전한 쇠로 재탄생 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렇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산 것을 쇠 풀무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합니다(신 4:20, 왕상 8:51, 렘 11:4). 쇠 풀무는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며, 자기 백성을 단련시키는 훈련장입니다(사 48:10, 말 4:1).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유다 왕국을 치는 막대기로 사용했습니다. 바벨론은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새롭게 단련되는 훈련장이기도 합니다. 그 제련소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간다면 정금같이 새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모습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언약 백성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다니엘서를 읽을 때에 우리가 기억하면 좋은 몇 가지 단어를 소개하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지혜, 구별(거룩), 인내입니다. 포로생활은 언약을 파기한 이들에게 주어진 징계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징계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백성들에게 지혜를 풍성히 줍니다. 그 지혜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대를 해석하고, 교회를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지혜로운 백성들은 우상숭배의 유혹과 시험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삽니다. 바벨론이라는 풀무 불에서 지혜로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우상숭배의 시험 앞에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겠다는 신앙을 지켰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인내에 화답하셨습니다.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탄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약속을 끝까지 붙든 위대한 신앙의 승리입니다. 이 승리를 쟁취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됩시다.


결론

교회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같이 경험합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 하여 바벨론 포로처럼 비참한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바벨론 유수 자체로도 괴롭고 힘든데, 사단은 앞잡이를 세워 경건한 백성들을 유혹하고 공격합니다. 하나님을 적절히 예배하라고 하고, 때론 그 예배를 잠시 중단하고 다른 신을 섬기라고 공격합니다.

우리는 그런 때에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위협 받는다 해도 결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위협해도 그 위협 앞에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공격은 우리를 단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용광로입니다.

코로나가 우리의 예배를 힘들게 합니다. 때론 정부의 방역지침이 우리의 신앙을 흐리게 만듭니다. 세상은 문화와 안전이라는 옷을 입고 교회를 공격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성경의 가르침을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검, 곧 말씀으로 무장한 교회와 성도들이 됩시다. 풀무에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교회가 됩시다.



• 설교 이해를 위한 질문

1. 우리가 다니엘서를 읽을 때에 예레미야 29장과 관련하여 반드시 기억해야 될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을 기초로 다니엘서를 이해하는 관점은 어떠해야 합니까?


2.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신상의 규모는 어떠하며, 그가 그렇게 신상을 만든 목적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을 바벨론 왕국의 포로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언약 백성들과 관련하여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셨습니까?


4. 느부갓네살의 명령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예배생활에 우상숭배적 요소는 없는지 살펴봅시다.


5. 왕 앞에 잡혀온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세 사람의 신앙을 알려주는 표현은 무엇입니까?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어떠합니까?


6. 풀무 불에 던져진 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세 사람이 풀무에서 나온 뒤의 모습을 성경은 어떻게 묘사합니까? 이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7. 구약성경에서 풀무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 관점에서 세 사람의 구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8.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한 번 정도 금 신상에게 절하는 타협의 길을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죽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의 이 신앙과 오늘 나의 신앙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나의 예배생활을 점검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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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7(새 노래가 흘러 넘치는 예배, 출15:1-5, 고전14:26) file kosin 2021.02.08 1624
36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6(고백과 율법이 살아있는 예배, 신 4:10-14, 롬 10:10-15) file kosin 2021.01.26 1399
35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5(죄고백과 사죄선언이 있는 예배, 요20:19-23, 약5:13-18) file kosin 2021.01.15 1683
34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4(하나님의 임재가 넘쳐나는 예배시작 시124:1-8, 롬1:1-7) file kosin 2021.01.1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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