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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할 일: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라!

임경근 목사(다우리교회)
성경: 신 6:4-6; 시 78:1-4
찬송: 시편 78편

비유로 공개된 비밀을 드러내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말씀의 종을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시편 78편의 서론을 1-3절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시인 아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에 넣어주신 율법의 말씀을 자기 백성에게 전합니다. 백성은 귀를 기울여 여호와의 종의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아삽이 율법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은 ‘비유’입니다. 예수님도 ‘비유’로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이유는 믿음으로 경청하는 자는 구원받지만, 불신앙으로 듣지 않는 자는 멸망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삽이 비유로 전하는 내용은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옛 비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밀은 ‘들어서 아는 바’이고 ‘조상들이 전해 준 것’입니다. 그러니 비밀은 더 이상 감추어지지 않고 공개된 것입니다. 언약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귓속말로 다 알려 주신 공개된 비밀입니다. 


누구에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이 공개된 비밀을 누구에게 전하고 또 전하라고 합니까? 그것은 3-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3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후대에 전하리로다. 5......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6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시 78:3-6)

아삽이 자기 백성에게 공개된 비밀을 드러내 전해야 할 대상은 다음 세대입니다. ‘자손’()는 ‘자녀’라는 말입니다. 전해야 할 대상은 ‘후대’를 포함합니다. 지금 태어난 자녀뿐만 아니라, 자녀의 자녀들에게까지도 공개된 비밀을 일러주어야 합니다. 아삽은 먼저 자기 백성에게 공개된 비밀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이 낳은 자녀에게도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자녀의 자녀들에게도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왜 아삽은 공개된 비밀을 자녀들에게 ‘숨기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본래 하나님을 떠난 죄인입니다. 죄인은 자신에게 뭐가 좋은지 나쁜지를 자기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준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가 판단의 기준이기 때문에 인간이 택하는 결정이란 늘 실수투성이고 잘못 판단합니다. 왜요?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지정의가 삐뚤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굽은 왜곡된 잣대를 가진 인간은 늘 잘못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신의 자녀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공개된 비밀’보다는 세상에서 당장 가치 있어 보이는 것들을 전하기에 바쁩니다. 아니, 오히려 세속적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그 영광과 찬송과 기이한 일들에 대해 가르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도덕적인 것’과 ‘재물의 복’과 ‘명예의 복’, ‘영광과 존귀’에 대해서는 열심히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겪게 될 가난과 고통과 겸손과 인내에 대해서는 숨기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해 열심히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죄와 비참에 대해서는 숨기고 싶어 합니다. 대신 이런 가치를 가르칩니다. 

“얘야! 너는 존귀한 존재야! 얼마나 멋지니! 자신감을 가져!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위인전을 읽어봐! 모두 다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저렇게 위대하게 된 거야! 너도 할 수 있어!”

인간의 위대함과 나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숨기고 싶어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부모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멋진 모습은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다윗의 영광과 솔로몬의 영화를 자랑스레 말해주지만, 다윗의 죄와 솔로몬의 잘못에 대해서는 숨기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예와 그 분의 능력과 그 분이 행하신 기이한 기적을 자녀들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전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가르치는 것은 아닌가요? 성경에 나타난 멋진 인간들의 모습을 본받기 위해 모범적인 인물들을 뽑아 가르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에 나타난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드온, 삼손, 사무엘, 다윗, 솔로몬 같은 인물들은 우리가 본받기 위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와 같은 자들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여 죄와 비참 가운데 허덕이니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숨기고 사람의 위대함을 가르친다면 ‘조상들이 전해 준 전통’을 숨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영예와 능력과 기이한 사적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자녀들에게 숨김없이 가르치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교회의 직무입니다. 이것이 먼저이고 우선순위에 와야 합니다. 혹시 인간의 위대함을 전할 때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먼저입니다. 


누가 전해?

그러면 시인 아삽은 누가 공개된 비밀을 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시를 가만히 읽어보면 비밀을 전할 자는 바로 ‘나’(1-2절)이며 ‘우리’(3절)입니다.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1-2절)에서 전하는 자는 일차적으로 ‘나’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종, 아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일차적 주체는 말씀을 맡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종은 공개된 비밀을 부모에게 먼저 전해야 합니다. 목사의 역할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목사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감추었던 것들을 드러내어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목사를 서양에서는 ‘말씀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고서점에서 가서 신학 책을 사서 겉표지를 넘기면 본래 소유자였던 목사의 사인이 들어 있습니다. 그곳에 반드시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라틴어 대문자 세 개가 있습니다. ‘V.D.M.!’ 이것은 라틴어 ‘Verbi Divini Minister’로,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목사가 하는 여러 일이 있지만, 가장 본질적인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는 의미이죠! 3절을 보면 말씀의 종이 이미 전해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3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먼저 부모에게 언약의 말씀을 먼저 전합니다.  

두 번째 공개된 비밀을 전할 자는 말씀의 종으로부터 들은 부모들입니다. 부모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공개된 비밀을 전해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로 아삽의 권고를 듣고 있는 백성들, 곧 부모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부모를 말합니다. 복음의 비밀을 전해야 할 주체는 자녀들 가까이 있는 부모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공개된 비밀을 전하지 않으면 누가 전하겠습니까? 이 복음은 교회에서 말씀의 종을 통해 전해지지만 동시에 부모가 자신의 자녀에게 전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부모가 복음의 말씀을 자녀에게 전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교회에 맡겨 버리고 뒷짐을 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일반 교육도 교육 전문가인 교사와 전문 기관인 학교와 학원에 맡기는 것처럼, 신앙 교육도 교회의 목사에게 맡기고 부모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의 신앙에 문제가 생기면, 우선 교회의 탓을 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어렵다느니, 프로그램이 시원찮다고 비난하기 일쑤입니다. 주일학교 담당 교역자 탓을 합니다. 주일학교 프로그램 탓을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 탓을 합니다. 옳지 않습니다. 자녀의 신앙교육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모가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기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자녀 교육의 권한과 책임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6장 4-6절을 읽어 보십시오. 이 명령은 부모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이 말은 모세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한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와 자기 백성입니다. 모세가 ‘너’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20세 이상의 책임 있는 성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결혼한 자들입니다. 자녀들이 있는 부모인 셈입니다. 부모는 먼저 말씀의 종으로부터 공개된 비밀, 곧 복음을 잘 들어야 했습니다. ‘경청’하는 부모는 좋은 부모입니다. 훌륭한 부모는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닙니다. 훌륭한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자입니다. 좋은 부모는 비싼 장난감을 사 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맛있는 피자를 자주 사 주는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오직 하나님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자입니다. 

더 나아가 부모는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신 6:6).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본래 히브리어 원어 그대로 번역하면 ‘말씀을 마음에 둔다’입니다. ‘마음’은 인격의 좌소입니다.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를 차지하고 삶의 기준이 되며 지침이 되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부모는 스스로 하나님의 명령인 말씀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자녀에게 가르치기 전에 부모의 부모 됨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자식 교육하고 훈련하기 전에 부모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 우선순위가 바뀌면 문제입니다. 많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이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성경 읽으라고 하면서 본인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기도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이여!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사십시오! 


어떻게?

부모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합니다. 동시에 부모는 자녀에 대한 책무도 잊지 않고 행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그 복음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강론해야 합니다. 신명기 6장 7-9절을 읽어보면 그 내용이 상세하게 나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목사, 주일학교 교사가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겠지만, 부모가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1) 부지런히!
그러면 우리는 부모로서 어떻게 자녀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전수할 수 있을까요? 모세는 언약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는 권면과 일치하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바울은 디모데에게 영적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이 말씀을 권면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항상 힘써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합니다. 범사에 오래 참아야 합니다. 실패에 절망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2)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모세는 부모에게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합니다. 바울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말씀을 전하기에 편할 때이든지 불편할 때이든지 항상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대인들은 함께 모이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정예배를 하지 못할 이유가 충만한 것 같습니다. 매스 미디어의 발달과 더불어 삶의 형태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부모가 자녀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없어 보입니다. 심지어 자녀는 부모의 질문에 카톡으로 대답하기까지 합니다. 참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예배를 하지 말아야 하고 복음 전수를 포기해야 하고 또 그래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쁜 삶은 20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바쁘다는 것은 상대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중요하고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때와 장소를 핑계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집에 앉았을 때’, ‘누웠을 때’, ‘일어날 때’는 기본적으로 가정에서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강론하는 것은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을 거쳐 오늘까지도 가정에서 신앙이 전수됩니다. 디모데도 어렸을 때 가정에서 외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딤후 3:14-15)

디모데가 배운 곳은 가정이며 그의 어머니와 외 할머니였을 것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성경을 배웠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유대인으로 개종하지 않은 불신자였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가정은 어머니가 복음을 자녀에게 잘 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영적으로 낳은 더베와 루스드라 출신 디모데(행 16:1)는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성경을 잘 배운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부지런히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자 아버지가 있지만, 일에 바쁘고 신앙이 없어 자녀의 신앙교육에 등한히 하는 가정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이 부분에서 많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3) 가정예배를 통해
‘집에 앉았을 때나,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를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중세 1천년 동안 로마 천주교회는 가정의 역할을 교회가 빼앗아 갔습니다. 가정의 어머니의 역할을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뺏어갔습니다. 가정의 아버지의 역할을 사제, 특히 교황을 ‘파파’(Papa), 즉 ‘아빠!’ 혹은 ‘아버지’라고 부르며 뺏어갔습니다. 이것을 개신교회 성도들은 오래전부터 ‘가정예배’ 혹은 ‘가정 경건회’를 통해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집에 앉았을 때, 누워 있을 때, 일어날 때의 상황은 가정에서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집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모습은 가정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 있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그림입니다. 특별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식사 전이나 식사 후에 가정예배를 하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먹는 것처럼 영의 건강을 위해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아침과 저녁 식사 전에 가정예배를 했습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 식사 후에 가정예배를 했습니다. 자연스레 신앙교육을 한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특별한 사회 환경에서는 좀 다른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당장 온 가족이 식사 시간에 한 식탁에 모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가능한 이런 시간을 마련한다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다른 시간을 택해 가정예배를 해도 될 것입니다. 

혹은 ‘길을 갈 때’는 여행 중의 상황을 말합니다. 가족이 여행 중이든지 혹은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경우에도 신앙교육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멀리 다른 나라에 떨어져 있는 자녀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스카이프를 통해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며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부모의 주도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4) 손목과 문설주에 말씀을 기록해
유대인은 신명기 6장 7-9절의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실제로 율법의 구절을 적어 손목에 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집의 문 주변에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모세가 손목에 성경구절을 매라고 한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암송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문설주에 말씀을 기록한다는 뜻은 가정을 움직이는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문은 온 가족이 드나들면서 계속 바라봅니다. 절대로 문설주에 기록된 말씀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이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가족이 결정해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이사를 어디로 가야 할지? 자녀가 어떤 대학을 가야할 것인지? 아빠의 직장 문제? 어떤 옷을 사 입어야 할지? 가족 전체가 함께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면서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일에 생업을 쉬며 교회에 가 예배하는 가정! 온 종일 하루를 거룩하게 보내기 위해 일과 학업을 쉬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가족, 혹은 영적인 교회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모습! 이런 것들이 바로 손목에 말씀을 달고 다니며 문설주에 기록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매일 온 가족이 가정예배로 모인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읽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예배를 통해 우리는 부모로서 자녀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5) 이마와 바깥문에 말씀을 기록해
모세는 또 다른 방법을 소개합니다. 말씀을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바깥문에 기록하는 방법입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유대인이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정말 그렇게 합니다. 말씀을 적은 쪽지를 돌돌 말아 넣은 함을 이마에 붙이고 다닙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따라 할 것이 아니라,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을 미간에 붙이는 것은 자기 자신이 보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마를 쳐다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마에 말씀을 써서 붙이고 다니면 성도들 서로 교육하고 교육 받는 효과가 있습니다. 모든 가정이 가정예배를 하고 성경을 읽고, 깊이 있는 성경공부를 하며 골방기도를 한다면 서로 격려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바깥문에 기록한다는 것은 성도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 때 서로서로 격려를 주고 격려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혼자 보다는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이마에 붙이고 바깥문에 기록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함께 하면서 많이 배우고 가르치는 효과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말씀을 이마에 붙이고 바깥문에 기록한다는 의미는 불신자들을 향한 선포와 경고의 의미도 있습니다. 곧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표입니다. 다른 신자를 보고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구나!’라고 알도록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를 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적용한다면 점심시간에 식사할 때 식사기도를 하고 밥을 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아, 저 분은 그리스도인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의 의미도 있지만, 그리스도인 스스로에게 책임 있는 말과 행동을 하도록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신앙훈련을 하는 의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바깥문에 기록하라는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그 집을 지나가는 자들은 ‘아, 이 집은 예수 믿는 집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적용을 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라는 의미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식당에서 온 가족이 식사를 할 때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모습을 떠 올려 보십시오. 여러 사람들이 보니 부끄럽다고 여길 수 있지만, 우리 가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점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이니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인 아삽은 말씀의 사역자가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백성은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이미 가르쳐 주었습니다. 열심을 내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과 타인을 위해 말씀을 가까이 하며 읽고, 공부하고, 실천하는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임은 부모에게 주어졌고 가정예배를 통해 구체적으로 오늘 우리도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며 다음 세대로 이어 받아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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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소책자(종교개혁과 가정) 설교, "가정에서 할 일: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라!(신 6:4-6; 시 78:1-4)" 임경근 목사. file 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2017.05.04 475
33 5월 시편 설교, "헛수고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시편 127편)" 임경근 목사 종교개혁500주년관리자 2017.05.04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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