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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본분”

시편 8편 1-9절


박창원 목사(포항장로교회)



성경은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분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삶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소교리3문). 이런 점에서 시8편은 하나님과 사람에 관한 지식의 요체입니다. 또 시편은 찬송입니다. 예배 때 부르는 찬송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찬송으로 열고 닫는(1,9절) 본 시편은 시편 중의 시편입니다. 



오케스트라: 땅과 하늘의 합창


시8편은 감탄으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탄으로 표현합니다. 어떤 말로도 이를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감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그래서 만물(자연)의 아름다움을 목격할 때 사람은 감탄을 발합니다. 하지만 최고의 찬사는 만물이 아니라 이를 아름답게 만드신 하나님께 돌려짐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과 하늘을 증인(코러스) 삼아 찬송의 노래를 부릅니다. 



1절 말미에 그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하늘에 두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하늘에 두신 것은 땅이 이를 담기에 비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광을 하늘에 담아 두셨고, 다윗은 이를 찬송합니다. 찬송의 내용은 ‘주의 이름’입니다. 성경에서 ‘주의 이름’은 항상 ‘주의 사역’과 관련해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사역으로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시는데, 핵심은 창조와 구원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고, 2절에서는 구원자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창조와 구원은 찬송의 유일하고, 영원한 가사입니다.




옹알송: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찬송


땅과 하늘의 거창한 무대로 시작한 찬송은 곧바로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소박한 무대로 옮겨 갑니다. 다윗은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무대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극대화 합니다. 두 무대의 공통점은 감탄입니다. 유아들은 유창한 말은 못하지만 감탄사는 말합니다. 좋고 싫음에 대한 감정을 짧은 감탄으로 담아내지요. 그렇게 땅과 하늘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은 젖먹이들의 감탄을 통해 더욱 극대화 됩니다. 



다윗처럼 주님도 어린아이들의 입을 찬송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향해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송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노를 발하는데, 주님이 시8편으로 잠잠케 하십니다.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적이 없느냐 하시고”(마21:16) 대적자들을 향해 주님은 시편 8편을 인용하시며, 자신이 이 찬송의 성취자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시8편은 다윗의 노래로 쓰였지만 그리스도의 노래로 읽어야 합니다. 



아름답지만 살벌한 노래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불러지는 노래는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아이들의 목소리는 주의 아름다운 이름에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노래 가사가 좀 살벌합니다. 주님이 그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사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십니다. 가장 약한 존재인 어린아이들의 노래로 원수들이 잠잠케 되는 장면이 무슨 상황일까요? 이는 곧 전쟁에서 승리하여 원수를 굴복시킨 상황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승전의 노래를 부르며, 패배한 원수들은 아무런 대꾸를 못합니다. 



승리한 왕의 개선노래


시8편은 승리하신 왕의 노래입니다. 승리의 왕이 행차할 때, 온 백성은 즐거이 그를 맞이합니다.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승리를 외칩니다. 행렬 뒤에 포로들이 끌려옵니다. 패배한 대적들은 힘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끌려옵니다. 아이들은 대적을 조롱합니다. 그동안 자신들을 위협하고 억압했던 원수를 조롱하며 손가락질 합니다. 하지만 대적은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잠잠합니다. ‘잠잠하다’는 히브리어로 ‘샤바트’인데, 일을 다 마친 후 안식에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이는 창조 때 쓰인 단어입니다. 그리고 대적과의 전쟁을 마친 장면에서 다시 사용되는데 이는 곧 구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예루살렘 입성 때 본 시편을 인용하셨습니다. 구원의 사역을 행하기 위해 왕의 행차를 거행하시며, 자신이 시8편을 성취하러 온 자요, 대적들을 굴복시키사 그들로 잠잠케 할 것을 드러내셨지요. 한편 여기서 대적의 실체도 드러납니다. 주님은 어린아이들의 입으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대적은 거짓 교회에서 왕 노릇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나, 속으로는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의인을 핍박하고, 넘어뜨리는 사단의 하수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사단의 머리를 깨트리사, 모든 대적을 굴복시키셨습니다. 



전쟁을 마치신 주님은 어린 아이들의 입으로 승리를 선포하십니다. 젖먹이도 찬송했다는 말은 모든 백성이 찬송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온 땅 가득 울려 퍼지는 찬송과 함께 전쟁도 막을 내립니다. 전쟁이 마치면 평화, 곧 안식이 옵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며, 주님과 교제하는 겁니다. 묵상은 사람의 사명이며, 동시에 찬송입니다. 그래서 1, 9절에서는 찬송을, 3-8절에서는 사람의 사명에 관해 말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롬1:20). 만물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습니다. 그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물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만물에서 사명을 보다


시인은 3-8절에서 이를 노래합니다. 3절에서 그는 주가 만드신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보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늘을 보며 경탄 합니다. 또 시인은 주의 손가락으로 이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손가락은 일을 하는 수단입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은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가진 사람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시인은 4절부터 사람의 존재를 부각시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해 찬송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하시고, 또 인자를 돌보아 주셨다고 합니다. 4절의 ‘사람’은 ‘에노쉬’로 연약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2절의 어린아이와이 같은 존재지요. 그리고 ‘인자’는 ‘벤 아담’으로 아담의 후손을 말하는데, 아담은 ‘흙, 티끌’을 가리킵니다. 두 단어는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증거 합니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흙덩어리에 불과한 사람을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나이까?라고 감탄합니다. 




사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쓴 왕


영광과 존귀의 관은 왕적 신분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세상의 통치자로 세움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왕은 용사의 옷을 입습니다. 고대의 왕은 전쟁에 앞장서는 용사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아담’이라 이름 지으신 하나님은 그를 가키려 ‘남자’라고도 부릅니다. ‘남자’는 ‘이쉬’로, 곧 용사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연약하지만 왕과 용사며, 흙이지만 하늘의 호흡을 가졌습니다. 이를 가리켜 시인은 사람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는 것은 위치적 의미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 보다 조금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 뒤에 왕적 신분이 언급되는 이는 직분적 위치를 보여줍니다. 사람이 하나님 아래 위치하여 온 세상을 통치하는 직분자라는 거지요. 



또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는 말에는 닮음의 의미도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비슷하게 만들어 졌다는 겁니다. 이는 창조의 장면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모양)을 따라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십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기에 사람도 왕이 되게 하신 거지요.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은 위치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왕이시고, 사람은 땅을 다스리도록 세움 받은 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생각하신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음 받음의 의미를 알고,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지혜요, 본분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지혜와 본분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같아지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까지 찬탈하려 들었습니다. 그 결과 왕의 직분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인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났으며, 땅은 그의 다스림에 불복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영광의 왕은 수고로이 일해야 하는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사단의 종이 되어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용사가 오셨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연약한 인생을 건지실 승리의 왕,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가 오사 대적을 무찌르시고, 질그릇 같이 연약한 우리를 보배롭게 해 주십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십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사람을 생각하시고, 인자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둘째 아담 안에서 부르는 새 노래


시8편은 그리스도의 노래라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시편을 인용했고, 히2:5-9도 이를 증거 합니다. 특별히 히2장은 “사람과 인자”를 그리스도로 해석합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 그의 발 아래 모든 만물을 두셨다고 합니다. 이런 가르침은 시8편 안에도 숨겨져 있습니다. ‘인자’는 ‘벤 아담(아담의 후손)’이라는 말이지만, 둘째 아담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입니다. 그는 첫 아담이 실패한 사명을 성취합니다. 순종으로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찬송으로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직분을 성취하심으로 그 직분을 다시 사람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둘째 아담의 후손들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십니다. 자기 백성의 발 아래 만물을 복종시키십니다(엡1:22).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8편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회복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는 곧 창조 세계를 묵상하며, 자신의 본분을 깨달아 수고함으로 안식을 누리는 겁니다. 아담도 타락 이전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동물들을 다스림) 속에서 자신의 일상을 찾았습니다. 그가 행한 첫 번째 일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겁니다. 이름을 지어주는 건 통찰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대상을 관찰하여,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지혜가 있어야 이름을 지어 줄 수가 있지요. 아담은 이 일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잘 관찰하여, 사명을 해석하고, 일상에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사람이 본분을 따라 주어진 일상에 충실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입니다. 



시인은 7절부터 이런 삶에 대해 노래합니다. 창조의 기사를 언급하며 사람이 다스려야 할 영역을 소개합니다. 소와 양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 바다의 물고기가 다스림의 대상입니다(창1:28). 그런데 소개의 순서가 창조의 역순입니다. 창조는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로부터 땅의 생물로 나아가는데, 시인은 반대로 소개합니다. 이는 사람의 가까이 있는 것부터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다스림이 일상의 삶으로부터 시작함을 강조합니다. 




다스림: 경작으로 문화를 꽃 피우다.


또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라 경작입니다. 하나님은 동산을 다스림의 현장으로 주셨습니다. 사람에게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셨습니다(창2:15). 경작은 농사의 용어입니다. 농사는 수고함으로 열매를 얻는 것이요. 하나를 심어 많은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단순히 농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든 삶에 적용됩니다. 사람이 열매를 얻기 위해 수고하는 모든 삶이 경작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리켜 문화라 합니다. 실제로 ‘경작하다’는 말의 라틴어 ‘꼴레르(colere)’에서 ‘문화(culture)’가 나왔습니다. 즉, 다스림은 일상의 현장에서 수고함으로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문화입니다. 이 일을 잘 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일하심을 주목해야 합니다. 



시인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을 본 후에 자신이 손으로 해야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먼저 본 후에야 선한 다스림을 할 수 있습니다. 선한 다스림은 세상이 하나님의 질서대로 운영되게 하는 겁니다. 이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세상에 나타냅니다. 형상은 라틴어로 ‘이콘(icon)’인데, 어떤 실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만물 역시 일종의 이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콘을 바라볼 때,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이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세는 하나님의 이콘이 아니라 사람의 이콘을 만들었습니다. 성경과 만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찾지 않고, 온갖 형상 속에서 인간의 영광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사명의 삶이 사라져 갔습니다. 세상을 향한 지혜로운 다스림이 사라지고, 문화적 행위 또한 줄어만 갔습니다. 흔히 중세를 가리켜 문화의 암흑기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닌 인간의 아름다움을 주목했더니 정작 인간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린 거지요. 



이 어두움을 종교개혁이 극복합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자들은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문화적 삶을 충실히 살았습니다. 그들이 한 첫 번째 일은 형상을 깨트리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던 형상을 깨트림으로 성경과 그리스도를 보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본 자들은 예배당 밖으로 나가 만물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를 묵상하고,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가 다스림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정과 학교, 일터를 지혜롭게 다스렸으며, 만물이 하나님의 지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연구하고, 가르치며, 그 아름다움을 예술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아담의 문화적 삶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재연되며, 지금 우리에게도 요구됩니다. 중세의 성도들이 이콘의 시대를 살았다면 우리는 아이콘의 시대를 삽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아이콘을 주목하며 삽니다. 하늘 한번 볼 겨를 없이 손바닥만 들여다보며 삽니다. 하나님을 묵상하기보다 자신의 일과만 생각하기 바쁩니다. 그래서 문화의 빛이 가장 찬란히 빛나는 시대이건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문화의 본래적 기능과 가치는 사라져만 갑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사역은 활발하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선한 다스림은 소멸해 가는 일그러진 문화의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시편8편 다시 부르기


시대는 시8편 다시 부르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성경과 만물의 두 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사명을 깨닫고 열렬한 문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이콘을 깨트림으로 말씀과 경건을 회복했던 것처럼 우리도 아이콘을 내려놓고 말씀과 경건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만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고, 자신의 일상으로 들어가 선한 다스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고, 그 영광을 찬송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성공과 번영으로 자신의 영광을 찬송하며, 끊임없이 반성경적인 가르침과 문화를 생산합니다. 강력한 대적들 앞에서 선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일상 속에서 문화적 삶을 사는 것이 무기력하게만 보입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원수들을 잠잠케 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문화는 없습니다. 이 보다 더 귀한 가치는 없습니다. 눈을 열어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봅시다. 그리고 눈을 들어 만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시다. 눈을 돌려 일상을 봅시다. 그리고 손을 놀려 일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일합시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이며, 이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본분인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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