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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전쟁 1


• 설교본문: 창세기 4:1-15

• 설교제목: 참 예배, 거짓 예배


서론

주 안에서 한 가족된 성도 여러분!

예배의 자리로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예배를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예배를 받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 예배의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예배를 예비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그 만남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사람이 자격이 있어 그 자리에 초대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긍휼이 여기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죄인들의 죄를 덮었습니다. 이어 죄인들과 지속적으로 교제하시려고 그들을 예배의 자리로 초대했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마련한 예배는 영광스럽고 복됩니다. 언약 백성은 예배를 통하여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 교제는 실로 복되고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이 천상의 교제를 주지 못하며, 받지 못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만나 교제하는 현장입니다. 예배는 젊은 남녀가 연애하는 것보다 더 가슴 뛰는 설렘의 시간입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온 여러분들도 이 설렘으로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예배가 늘 즐겁고 복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 예배가 겉으로는 화려하고, 감격스러우며, 멋져 보이지만, 속으로는 회칠한 무덤처럼 시체 냄새 풍기는 공동묘지처럼 변질되기도 합니다. 누군가에 설렘과 행복이 넘치는 예배가, 또 다른 누군가는 파괴하고 변질시키며 공허하게 만드는 공격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바로 그러한 예배를 만납니다. 오늘 본문은 두 종류의 예배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두 종류의 예배가 어떤 결말을 가져오는지를 통해 예배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와 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주제: 하나님께서는 두 예배를 통하여 예배의 본질과 예배자의 사명을 알려주셨습니다.

1. 두 예배

2. 두 예배의 결과


본론

1. 두 예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아이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부부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이름을 가인이라 지었습니다. 가인은 “얻음”이라는 뜻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습니다(1절). 직역하면, “내가 주의 도움으로 남자를 얻었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다르게 읽히기도 합니다. “내가 사람 곧 여호와를 낳았다”라고 읽어도 됩니다. “내가 주의 도움으로 남자를 얻었다”로 읽거나 “내가 사람 곧 여호와를 낳았다”라고 읽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읽으면 강조점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람을 낳았는데, 그 사람이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바로 그러한 힘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생히 기억했습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하신 약속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입니다. 뱀 곧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바로 그 약속이, 자신이 낳은 아들 가인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니 ‘여호와를 낳았다’고 할 만합니다. 부푼 기대 속에 둘째가 태어났습니다. “아벨”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하찮음’, ‘한 숨’, ‘무의미’라는 뜻입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출생에서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한 아들로 만족한다는 뜻인지, 첫째의 자라나는 모습을 보니 약속이 이루어 질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이 선 것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두 아이의 출생은 생육하며 번성하라는 말씀의 성취이며,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 실현되는 시발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두 아들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졌습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제사했습니다. 곧 예배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았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예배를 받으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흔히 말하듯이 제물 때문이었습니까?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는 히브리서 9장 말씀에 근거하여, 아벨은 양으로 드렸기에 그 예배를 받으셨습니까?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것은 그가 곡식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까?

여호와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것은 제물 때문이 아닙니다. 고기와 피, 그리고 기름으로 드리는 제사도 있지만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도 있습니다. 소제는 곡식을 제물로 드립니다(레 2:1-3). 그러니 두 사람의 예배를 받지 않은 이유는 제물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신약성경을 읽음으로 깨닫습니다. 히브리서 11: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이유는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벨도 받으셨고, 아벨의 제물도 받으셨습니다. 반대로 가인도 받지 않으셨고, 가인의 제물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제물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배 하는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믿음 없이 예배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알려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롬 4:20-21).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벨은 바로 이 믿음으로 예배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곧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15절입니다.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아벨은 이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맺은 언약이 재현되는 현장입니다. 반면에 가인은 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많은 유대인들처럼 가인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습니다(롬 9:32).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앙’이 아니라 ‘행위’, ‘자기 의’라고해도 무방합니다.

두 사람의 예배는 겉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가인도 아벨도 여호와께 예배했습니다. 다른 신에게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예배의 대상이 같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손으로 수고한 제물을 들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갔습니다. 한 사람은 곡식으로, 다른 사람은 짐승으로. 둘 모두 땀과 수고의 열매를 들고 나아갔습니다. 두 사람의 신분도 같았습니다. 가인이나 아벨이나 모두 여자의 후손이었습니다. 곧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두 사람 모두 겉으로는 신자였습니다. 둘 모두 정성을 다해 예배했습니다. 둘 모두 열정적으로 예배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예배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 자리합니다.


친애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아벨의 예배입니까, 가인의 예배입니까!

가인처럼 예배하는 이들은 예배하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합니다. 자신이 바친 제물을 보라고 합니다. 마치 빈손으로 오지 않고 정성으로 헌금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열정적으로 부르는 그 모습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멋지게 꾸민 예배당에서 최상의 하모니로 찬양하는 저 찬양대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어보라고 합니다. 멋진 소리를 내는 온갖 악기들을 동원하여 드리는 이 정성을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모든 것이 다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우리의 겉모습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이 드린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겉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믿음으로 예배하는 성도들은 사죄의 선포가 선언될 때, 자신의 죄가 정말로 사라졌다는 확신에 찬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감사의 찬송이 드려질 때, 죄 사함의 감격이 넘칩니다. 설교를 통하여 찾아오실 때, 기꺼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며 즐거워합니다. 성찬이 베풀어질 때, 하늘의 희열을 맛봅니다. 기도가 드려질 때, 어떤 모습으로든지 그 기도에 확실히 응답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모습. 참 예배는 현실적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실제로 즐기는 성도들이 드리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이런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2. 두 예배의 결과

가인과 아벨의 예배는 겉모습이 같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자신의 행위와 의를 자랑하는 예배였습니다. 반면에 아벨의 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진 예배였습니다. 성경은 무엇 때문에 이런 내용을 창세기의 앞부분에 기록했을까요?

창세기 3:15절은 두 씨(The seeds)를 말씀합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입니다. 두 씨 사이에 적개심이 지속될 것이라 했습니다. 예언의 말씀대로 아담과 하와에게는 두 씨가 태어났습니다. 두 세력 사이에 적개심이 표출되었습니다. 그 적개심의 첫 소재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구별하는 첫 시험지였습니다. 사단의 씨와 여인의 후손 사이에 불꽃 튀는 첫 싸움은 예배전쟁이었습니다. 이후 사단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짓 예배를 심어 놓으려고 호시탐탐 노립니다. 여자의 후손들은 거짓 예배를 제거하고 참 예배를 드리려고 생명을 겁니다. 이 예배전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새 언약 공동체 안에서도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전쟁은 지속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행위’와 ‘자기 의’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가인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조차 ‘자기 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약속에 대한 신뢰는 없고 자신과 자신의 생각만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교만한 자세로 제사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판결했습니다.

가인은 분노했습니다. 본문 5절은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안색이 변했다”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의 얼굴은 떨어졌다”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않고, 외면합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외면하는 것은 가인의 분노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전혀 다른 의미도 포함합니다. 이것은 언약관계의 단절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마치 부부가 이혼을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사장의 축복을 기록한 민수기 6:24-27절은 이러한 측면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제사장의 축복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의 복이 지속되기를 비는 선언입니다. 얼굴을 보지 않음은 언약의 복으로부터 단절입니다(창 3:8, 시80:3,7). 하나님의 얼굴빛이 사라지면 그 백성은 흑암의 고통 가운데 빠져갑니다(시 143:7).

가인은 얼굴을 떨어뜨림으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파기되었음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가인에게 왜 너는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려 나와 맺은 언약을 파기하느냐고 묻습니다(6절). 그리고 권면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나와 맺은 언약에 참예하게 된다. 그러나 선을 행하지 않으면 사자가 먹이를 가로채려고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죄가 너를 노린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죄인을 향하여 인내하십니다. 회복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의’와 우리의 ‘행위’를 자랑하는 거짓 예배의 모습으로 변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돌이키라고 권면하며, 회복의 길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의지합시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권면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예배전쟁은 충격적인 결말을 초래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아벨이 참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배자가 참 예배자를 죽였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은 예배를 통하여 사단의 씨임이 드러났고, 다른 한 사람은 참 예배자였기에 죽었습니다. 참 예배는 사라질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참 예배자들이 사라지면 하나님의 구원도 실패합니다.

참 예배자의 죽음은 거짓 예배자의 정체를 드러내는 표였습니다.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그 정체를 숨기고 예배했습니다. 가인은 아벨과 같이 예배하면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인의 정체를 환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거짓 예배 속에 숨은 가인의 정체는 드러났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도 “그의 제사”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실 가인의 악함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 왔습니다.

아담과 여자가 범죄를 행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여자에게 동산 모든 것들을 양식으로 주었습니다. 오직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금했습니다. 아담과 여자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뱀의 말을 청종했습니다. 사단 곧 뱀은 선악의 나무 열매를 먹으라 권합니다. 먹으면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여자는 바로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사단의 약속을 더 신뢰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단의 말이 더 믿을 만하다고 누가 결론을 내립니까? 하나님의 약속보다 사단의 말이 더 좋게 들리고, 더 믿음직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누가 결정합니까? 아담과 여자, 바로 그 자신들입니다. 이때 인간의 이성은 모든 것 위에 올라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단의 말을 따라간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는 인간 스스로의 생각이 모든 판단의 최고 권위자의 자리에 앉습니다. ‘자기 행위’, ‘자기 의’가 드디어 인류 역사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죄와 비참의 심연 속으로 빠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행위를 의지하며, 자기 의를 드러내는 거짓 예배자는 참 예배자를 공격합니다. 거짓 예배를 드리는 거짓 교회는 참 예배를 드리는 참 교회를 공격합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헤롯이 사도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세상이 참 예배자를 공격하는 것보다 거짓 예배자가 참 예배자를 공격하는 일이 더 고통스럽고 더 빈번합니다.

우리는 아벨의 삶을 통해 예배자의 영광을 기억합니다. 바른 예배자로 살다 죽는 것이야말로 예배자의 가장 큰 영광입니다. 우리가 파수해야 할 예배. 우리의 생명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는 예배. 한 시간의 예배를 위해 생명을 던진 선조들의 신앙을 기억합시다. 예배전쟁은 지금도 계속됨을 기억하며,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됩시다.


결론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예배가 기다립니다. 참 예배와 거짓 예배입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거짓 예배는 자기 의와 행위를 의지하며, 예배하는 자체를 자랑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뇌물을 드리는 것처럼 변질된 예배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예배를 드리는 예배 자들입니까? 부디 참 예배자들이 되길 기도합시다.

예배전쟁은 지금도 계속 중입니다. 거짓 예배자는 참 예배자를 죽이려 합니다. 이 두렵고 무서운 전투가 우리 앞에 기다립니다. 우리는 거짓 예배자들의 공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보기에 멋지고, 화려하며, 장엄해 보여도 그 속에 믿음이 없으면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이런 예배에 익숙한 자들은 비록 미숙하며, 소박하고, 단출 하게 보여도 참 예배자들을 공격합니다. 이 공격으로부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이로 인해 죽음이 우리를 기다린다 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참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이해를 위한 질문

1.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이며,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씀을 “내가 사람 곧 여호와를 낳았다”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번역할 때, 강조점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히브리서 11:4 참고)


3. 믿음은 무엇이며, 믿음의 내용은 어떠한지 로마서 4장을 통하여 정리해 보고, 이것을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적용해 보세요.


4. 두 예배의 본질을 기억하며 우리의 예배와 나의 예배는 어떠한지 반성해 봅시다.


5. 본문 5절은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민수기 6:24-27절에 기록된 제사장의 축복과 연결하여 이해할 때,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6. 요한일서 3:12절은 두 예배의 결말을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바는 무엇입니까?


7. 예배전쟁으로 부름 받은 교회와 성도들의 사명을 기억하며 나와 우리 교회의 예배에서 더욱 힘을 쏟아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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