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 예배 2
말씀이 회개와 회복을 일으킨다(느헤미야8:1-12)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는 합당한 예배는 회개와 회복을 일으킵니다.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완성했습니다(445-444년). 140여년 전에 무너져 있던 성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지고 이웃들에게 악을 행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서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성전을 먼저 복구했습니다. 이어서 이제 성벽도 복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인으로서 페르샤의 총독 느헤미야가 이 과업을 지도했습니다.
이렇게 하드웨어 시설은 끝냈습니다. 다음으로 말씀의 사역자 에스라의 지도로 백성이 모여서 말씀을 배웁니다. 합당한 예배를 드릴 때 백성은 회개했습니다. 기뻐했습니다. 다시 말씀을 배우며 회개했습니다. 공동체 하나님과 언약을 새롭게 했습니다. 느헤미야 8-10장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흐트러진 예배와 삶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요? 말씀을 바로 전하고 듣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1. 합당한 예배는 말씀을 존중하고 선포한다 (1-8절)
1) 말씀을 사모하며 모임(1-2절)
1) 7월 1일이었습니다. 길게 나팔을 붑니다. 나팔절입니다.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됨을 알립니다. 1월에 한 해가 시작되지만, 7월이면 추수가 끝납니다. 그 풍요를 누리는 7월은 영적으로는 새 해가 시작되는 날로 봅니다. 안식년도 7월 1일부터 시작합니다. 기뻐하는 명절입니다.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여자도 모였기 때문에 성전에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남자, 여자, 청소년 중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다 모였습니다. 학사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지만 9장에서는 “학사”라고 합니다. “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렇게 온 백성이 남녀가 말씀을 사모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싶지만 코로나 상황 때문에 모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와 모든 교회가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영광돌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상황에 우리를 내버려 두셨을까요? 전에 우리가 예배를 가볍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을 가볍게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매를 드시고 있지는 않은 지 두렵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는 이 때에 말씀을 사모함이 오히려 더 식기 쉽습니다. 영적으로 둔갑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말씀을 배우고 주님을 경배하려는 열정을 불태워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그 날을 어서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예배를 위해 코로나 질병을 거두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예배를 사모하는 성도는 느헤미야 때의 백성처럼 우리 자신의 성벽을 쌓읍시다. 자신의 가정과 일터에서 마치 예루살렘 성벽을 쌓듯이 말씀으로 살아갑시다.
2) 말씀을 존경하며 받음(3-6절)
에스라는 특별히 만든 강단에서 섰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을 읽고 가르쳤습니다. 5-6시간 서서 말씀 집회를 했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은 말씀에 목말랐습니다. 에스라 좌우에 13명이 서 있었습니다. “레위인”이라고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백성의 지도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에스라가 읽은 말씀을 백성들에게 큰 소리로 복창해 준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열심으로 말씀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달게 받읍시다. 말씀의 단 맛을 알려면 계속 먹어야 합니다. 내 기분이 어떤 상태든지 일단 말씀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단 맛을 압니다. 우선 감정의 위로만 찾지 맙시다. 말씀 그 자체를 배우는 일에 열심을 냅시다.
에스라에게 말씀을 배우기 시작할 때 장면을 보십시오. 에스라는 백성들 앞에서 책을 폈습니다. 모든 백성은 일어섰습니다. 말씀을 이렇게 존귀히 여깁니다. 에스라는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룰 송축했습니다. 백성들은 기뻐서 “아멘, 아멘”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서서 말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말씀을 받았습니다. 합니다.
à지금도 우리는 삼위 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며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목사의 입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삼위 하나님께서 영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설교 전에 성경읽는 시간은 설교에 필요한 참고 구절만 읽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들읍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없이 형식적이지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교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경배함이 없이 지식적으로만 성경을 읽지 않는지 돌아 봅시다. 예배의 순서 순서 마다 우리 영혼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합시다.
3) 레위인과 백성의 지도자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동역(7절)
앞에서 백성의 지도자 13명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제 레위인 13명이 백성이 제자리에 있는 동안 율법을 깨닫게 했습니다. 아마 13개 그룹으로 나누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백성의 지도자 한 명과 레위인 한 명이 한 그룹을 맡고 있습니다.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지만 모든 성도들이 함께 협력합니다. 특히 장로들은 목사의 말씀의 동역자들이다. 예배 때에 선포된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가도록 돕는 일을 장로는 합니다. 성도를 개인으로 만나고 가정도 심방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돌아 보고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서로에게 말씀으로 교제 나누고 격려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말씀 나눔 모임이나 구역모임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격려합니다. 요즘처럼 다 모이기 힘들 때 소그룹으로, 개인적으로 모여서 격려합시다. 공적인 예배에도 개인적인 만남에도 말씀으로 교제 나눌 때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3) 말씀을 정확히 선포하고 깨닫게 함(8절)
8절은 어떻게 말씀을 가르쳤는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말씀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입니다.
첫째, 말씀을 낭독합니다. 우리 교회 설교단에서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을 말하지 않으니 감사합니다.
둘째, 읽은 구절을 통역 혹은 해석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 온 백성 중에는 성경이 쓰여 진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어로 통역했을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칠 때는 번역하듯이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 주고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가르치는 일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체험이 시작됩니다. “본문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어떤 감동을 주는가?”는 그 다음에 가르칠 일입니다.
셋째, 정구체적인 상황에서 적용합니다. 명령한다고 표현합니다(참고: 막 5:43, 7:36, 9:9).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교회에 “명령”했습니다(행 15:24). 성경 말씀이 성도들의 삶에 적용되도록 가르치고 설교합시다.
넷째, 깨닫게 합니다. 귀에 읽어 들린 말씀이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좋은 밭에 뿌려 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아”많은 결실을 맺는다고 말합니다(마태복음 8:2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깨달은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 안에서 자랍니다.
말씀을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하는 일은 오직 성령님만이 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말씀을 가감 없이 원래의 뜻을 통역하듯이 전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성도님은 말씀의 뜻을 잘 배우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웁시다.
2. 합당한 예배는 회개하며 기쁨을 일으킨다(9-12절)
에스라가 동역자들과 함께 말씀을 바로 전할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며 울었습니다. 성도들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만 전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합당한 에배입니다. 예배 때 마다 성도들이 말씀 앞에 엎드려 지는 일이 일어나기 바랍니다. 매일 회개하며 변하기 바랍니다. 예배 때 선포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려 할 때 성령님께서 일하심니다.
2) 울며 회개하는 백성을 총독 느헤미야와 대제사장 에스라, 레위인들은 위로했습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다.”(9,10,11)고 강조합니다.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절).
참된 회개가 있을 때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는 성도, 회개하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여호와 앞에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회개와 용서의 결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 기쁨 넘치기 바랍니다. 회개하는 기쁨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왔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받아서 회개와 기쁨 넘치기 바랍니다.
3)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셨습니다. 서로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영적으로 즐거웠기 때문입니다(12절). 한 사람만 기뻐하지 않고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도 함께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님께서 교회에 오셨을 때에도 일어난 일입니다. 말씀을 들은 교회는 기쁨에 가득 찼습니다. 함께 떡을 떼고 먹으며 즐거워했습니다(사도행전 2:43-47).
같은 성령님께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일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신실하게 말씀을 전합시다. 우리 모두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말고 오직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합시다. 잘 듣고 회개하며 웁시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즐거워합시다. 그래서 매일 말씀으로 인해 기쁘게 삽시다. 모여서 함께 기쁘게 식사합시다. 개인적으로도 서로 만나며 먹읍시다. 코로나19로 만나기 힘든 이 때에는 전화하고 문자하며 즐거움을 함께 합시다.
우리 교회 목사가 에스라처럼 항상 말씀을 풍요롭게 잘 가르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의 장로와 집사 직분자가 말씀 사역을 잘 지원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말씀으로 기뻐하고 순종하며 삶에 기쁨이 넘치도록 기도합시다.
3. 합당한 예배는 더 많은 말씀과 회개와 회복을 일으킨다(8:13-9:5절)
1) 더 말씀을 배우면서 초막절 예배를 회복(8:13-18)
1) 7월 1일 집회 후 대부분의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추수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의 지도자들과 제사장 레위인들이 다시 에스라에게 율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지도자들의 특별성경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을 배울 때 더 말씀에 목마릅니다.
-à 요즘은 성도들이 말씀을 바로 전하면 “딱딱하다고 싫어한다.”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양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라 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말씀을 달게 받습니다. 더 말씀에 주리고 더 달라고 합니다.
2) 함께 말씀을 공부하던 지도자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일곱달 절기(초막절)에는 초막에 거할지니라”(14절, 출 23:16)를 읽었습니다.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 온 지 100여년이 되었지만, 초막절 지키는 것 조차 잊었습니다. 구약 성도들에 1년에 세번 지켜야 하는 3대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 조차 잊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하나님이 일 주일 동안 풀로 임시 집을 짓고 그 안에 사는 절기입니다. 과거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를 여행하던 것과 그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셨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7월 15일-21일에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는 중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즉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백성들이 다 초막을 지었다.”바벨론 유배에서 돌아온 것은 제 2의 출애굽과 같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그 조상처럼 이제 바벨론/페르샤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그들은 말씀을 중심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초막절의 첫날과 8일째 되는 날(7월 15일, 21일)은 “규례를 따라”성회로 모였습니다(18절, 레위기 23:36, 39). 그 성회의 날에 안식했습니다. 주중에도 매일 에스라는 율법을 읽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1:11에 초막절에 모일 때 율법을 읽어라고 한 대로 읽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잊혀진 초막절 같은 것이 없을까요? 우리에게는 성찬이 잊혀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로마교회가 성찬을 미신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개신교는 신중하게 대합니다. 좋은 태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하실 때, 1년에 두 번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가능한 자주 성찬을 하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코로나 전염병이 지나가면, 한 달에 한 번은 성찬을 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복음을 받으려 합니다.
2) 금식하며 더 회개하고 언약의 회복(9:1-5)
말씀을 듣고 더 들으면서 교회가 바뀔 때, 성도는 회개도 더 깊어 갑니다.
7월 21일로 초막절은 다 끝났습니다. 3일 후 7월 24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모였습니다. 이방인과 절교하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2절). 기쁨으로 초막절을 끝냈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금식과 회개는 7월 10일에 대속죄일에 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대속죄일은 빼먹고 초막절 집회만 했다가 다시 회복했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계속 회개를 일으키십니다.
그들은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햇습니다(2절). 회개는 감정적으로 후회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사람들과 결혼하며 거룩함을 저버린 삶에서 돌아서는 것이 었습니다. 회개는 거룩한 삶을 향한 개혁입니다. 소원합니다. 삶을 새롭게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죄도 회개했습니다. 10 여년 전에도 그들은 이방인으로부터 “떠나지”않은 것(스 9:1)을 회개했습니다. 그 같은 죄를 다시 범하고 있음을 회개했습니다.
-à 말씀은 그것을 들은 성도의 마음에 회개를 일으킵니다. 우리에게 말씀은 계속 회개를 일으키고 우리를 새롭게 되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들이 지은 죄도 회개하는 철저함과 용기도 본받읍시다.
회개할 때 말씀과 함께 했습니다. 말씀을 인도하며 가르쳤던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며 회개기도를 인도했습니다(5절). 하루 동안 낮 4분의 1은 말씀을 듣고 4분의 1은 죄를 고백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합당한 예배는 말씀과 회개가 있는 예배입니다.
3) 언약공동체의 삶을 새롭게 하기로 결단(9:38)
말씀을 더 풍성하게 회개를 더 깊게 하면서 구약 교회는 더 변화되었습니다. 회개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9:38).
이방인과 결혼 등을 그만두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나아가 그 동안 흐트러 졌던 모든 것을 개혁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언약을 맺습니다. 10장에서 백성의 대표로 하나님과 언약을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언약의 내용은 첫째로, 이방인과 혼인하는 것을 그만 두어 생활의 순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둘째, 십일조와 헌물을 충실히 하여 여 성전 예배를 회복하겠다고 합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고, 세상에서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헌신합니다.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합당한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새롭게 했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때도 비슷한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도은 “개혁운동”을 조직하여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루터와 칼빈,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유럽 곳곳에서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는 주님의 종들이 일어났습니다. 교회 전체를 새롭게 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에스라 시대에 모든 백성이 성전에 다 모여서 말씀을 간절히 사모한 것을 본받읍시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모든 성도가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없다고 예배가 흐트러 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영상의 도움을 받아서 각 가정에서 예배합시다. 말씀과 함께 하시는 삼위 하나님께 경배하며 말씀을 받읍시다.
우리가 말씀을 신실하게 받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죄를 비춰 주시고 회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계속 회개하며 새로운 삶으로 살아 갑시다.
그렇게 나갈 때 우리는 세상과 확실하게 다른 언약공동체로서 분리되어 살아갑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참된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교회와 성도가 합당하게 예배하고 거룩하게 살 때,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됩니다. 이런 회개가 회복의 복을 얻도록 우리가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고 받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참고> 느헤미야 8:8과 성경해석
제사장 겸 서기관 에스라의 인도하에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깨닫게 하매”기록된 말씀에서 교회와 성도가 인도를 받는 방법을 네 단계로 나눕니다.
배우는 과정 |
개역개정 |
히브리어 |
헬라어 |
의미 |
1. 읽음 |
낭독하고 |
카라아 |
아나-기노스코 |
성경을 읽음 |
2.말씀의 뜻을 가르침 |
낭독 |
파라셔 |
디다스코 |
본문의 의미, 의도, 일반적 가르침 |
3.삶의 적용과 실천을 가르침 |
해석 |
숨 샤칼 |
디아-스텔로 |
지금 구체적 삶에 적용하여 |
4.성도가 깨닫고 받아들임 |
깨닫게 |
빈 |
순-이에미 |
믿음으로 받아들임 |
성경을 읽고 번역하듯이 문장의 뜻을 가르침
첫째로, 하나님은 말씀의 직분자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백성들은 듣습니다. “카라아”는 성경을 ‘읽는 것’뿐 아니라, 공동체의 모임으로 ‘부르심’이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성령님을 통해 이름을 ‘불러 주심’을 뜻합니다.
둘째로, 성경을 읽은 후, 말씀의 직분자 에스라와 레위인들은 성경의 글자의 의미들을 해석합니다. 개역 성경의 “낭독”은 “읽는다 (카라아)와 “뜻을 통역하듯이 가르친다 (파라셔)”는 두 단어가 들어있습니다 (에스라 4:18의 낭독도 마찬가지임)
바벨론과 페르샤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히브리어가 능통하지 않았을 수 있기에 실제로 성경의 여러 부분은 마치 통역하듯이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포로 생활 동안 지키기 못했던 초막절과 같은 명절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을 것입니다. (느 8:13-9장)
파라셔는 헬라어로 “디다스코”즉 “가르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뜻을 가르칠 때 제일 먼저는 본문의 의미, 그 시대에서의 의미를 번역하듯이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 주고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가르치는 일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체험이 시작됩니다. “본문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어떤 감동을 주는가?”는 그 다음에 가르칠 일입니다.
말씀 사역자가 성령님의 인도로 구체적 적용을 가르치고, 성도들은 깨달아 받음
세번째로, 그 본문 말씀이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가르칩니다. 느헤미야에서 “해석”을 나타내는 “심 샤칼”을 문자적으로는 “지혜를 준다. 맡겨 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이 듣는 사람의 삶에서 구체적인 “지혜”로 스며 들게 합니다. 헬라어로 번역된 “디아스텔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거나 보여 주신 다음, 그것에 기초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명령하신 것”(막 5:43, 7:36, 9:9)을 말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로 사도들이 “명령한 것”(행 15:24)에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 성도가 혼자서 해석학의 규칙을 적용하여 자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을 적용하는 것도 “자동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깨달음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명령하심이 우리의 적용과 실천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인도를 말씀의 사역자는 교회 공동체에 선언해 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성경 읽으며 말씀을 배운 다음에도, 그 배운 말씀이 구체적 순종과 실천으로 어떻네 나타날지를 기도 가운데 성령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네 번째로, 그 배운 내용을 성도들은 깨닫고 받아들입니다.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는 “그 읽은 것에 대해 그들이 깨달았다.”입니다. 말씀의 사역자가 성경 말씀을 읽고, 말씀 안에 담긴 것을 가르칠 때,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헬라어로 “순-이에미”는 씨뿌리는 비유에서 여러 번 쓰였고,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마 13:23)는 구원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귀에 읽어 들린 말씀이 마음 안에서 깨달아 지는 것,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받는 것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의 목표입니다. “깨닫는 것”은 성도의 마음 속으로부터 떠오르는 주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말씀의 객관적인 것, 실질적인 그 내용이 그대로, 더 풍요롭게, 교회와 성도의 영혼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말씀의 직분자의 가르치는 행동 속에서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함을 성도 안에 집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구원의 은혜를 얻는 것은 개인의 해석과정이 아니라, 성령님이 객관적인 말씀을 교회와 직분자를 통해 전달해 주시는 성령님의 생생한 활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