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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설교 원고

주제: 합당한 예배, 세상의 소망

소주제: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본문 출 25:8-9

제목 성막 건축 명령과 합당한 예배

(부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8)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9)”(출 25:8-9)



<서론>

오늘 본문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 산꼭대기에서 모세를 만나, 성막 건축을 지시하시는 첫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 오셔서 거하신다는 것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시는 역사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지 못하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찾아와 함께 거하십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임마누엘’(참고. 사 7:14; 마 1:23)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백성 중에 거하십니까? 그분은 성소, 즉 성막을 통해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예배의 집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이 교제하는 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그 백성에게 찾아와 교제하십니다.


이 본문에 근거하여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전할 설교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 가운데 거할 집을 건축하십니다.”


저는 다음의 세 가지 순서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대지: 1. 두렵고 떨리는 예배의 집

2. 안전한 예배의 집

3. 계속 건축되는 예배의 집


1. 두렵고 떨리는 예배의 집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약 한 달 반의 여정을 지나 시내 산에 도착합니다(출 19:1). 며칠 후 하나님께서 시내 산꼭대기에 강림하십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출애굽기 19장 16절에서 19절입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16)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서 있는데(17)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18)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19)”(출 19:16-19)


여러분, 마음속에 시내 산 전체의 전경을 그려보십시오. 번개가 ‘번쩍’하는가 싶더니 천둥(우레)이 “우르릉 쾅쾅”합니다. 산 전체가 지진으로 인해 흔들흔들합니다. 귀청을 찢는 듯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산 위에는 빽빽한 구름이 있고, 연기가 자욱합니다. 그런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활활 타는 불 가운데 강림하십니다. 그리고 우렁찬 그분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 모든 현상이 한꺼번에 발생했습니다. 여호와의 강림은 참으로 장엄하면서도 큰 두려움을 일으키는 현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 멀리 산 아래서 이 광경을 눈으로 보았고, 그 소리를 귀로 들었습니다. 바로 앞이나 근처도 아니고 저 멀리 산 위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산 아래 대기하던 백성들은 크나큰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면 자신들이 죽게 된다는 두려운 현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요청합니다. 자신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로 올라가 그분의 말씀을 받아서 대신 전해달라고 말입니다. 즉 모세에게 중보를 요청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8절에서 19절을 보십시오.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18)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19)”(출 20:18-19)


19절에서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라는 표현은 마치 죽을 수도 있고,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 표현을 성경 원어 그대로 직역하면, “우리가 죽지 않도록(lest we die)”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모세의 중보가 없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확신하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공포가 얼마나 극심했으면 차라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마시길 간구했을까요? 얼마나 두려웠으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세가 그 말씀을 전달해주길 요청했을까요? 백성들이 느낀 공포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로부터 약 천오백 년 후에 기록된 히브리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18)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19)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20)”(히 12:18-20)


그렇다면 모세는 두렵지 않았을까요?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히 12:21)


이스라엘 백성들, 심지어 모세조차도 두려워 떨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렇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 때문에? 지진 때문에? 구름과 연기 때문에? 이 현상들이 백성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 것은 맞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 자신들이 너무나도 큰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는 분이십니다(출 19:21-22). 그분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신 4:24; 히 12:29; 참고. 레 10:1-2).

오늘날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자주 듣거나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은 사랑보다는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반면, 신약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말입니다.1) 심지어 오늘날 신학자와 설교자 중에도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을, 그리고 그분의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현상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 엄청난 대가를 치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심판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내릴 진노와 저주와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 모두 쏟아부으셨습니다. 이로써 그분의 공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값싼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보배로운 생명과 바꾼 고귀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약화하면 할수록 은혜의 복음, 사랑의 복음은 그만큼 심각하게 왜곡됩니다. 참 복음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뼈저리게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시내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리고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말입니다. 이를 정확히 알고 고백한 우리 선조들의 신앙이 얼마나 성경적입니까?


문: 죄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보응은 무엇입니까?

답: 죄마다 현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소교리 제84문답)


성막은 여호와께서 강림하시는 집입니다. 성막은 두렵고 떨리는 집입니다. 여호와의 불이 활활 타는 집입니다. 불이신 여호와께서 큰 소리로 호령하시는 집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심판하는 집입니다. 누구도 그분의 불꽃 같은 눈을 피하여 숨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일 공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소 휘장을 찢어 우리를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게 하셨습니다(히 10:19-20). 그래서 이제 우리는 저 멀리서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예배합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을 통해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은혜로운 공예배 중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자리는 여호와께서 강림하시는 자리입니다. 장엄하고도 엄숙한 자리입니다. 안락하고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부담 없는 자리가 아닙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이따금 졸기도 하며 참여해도 무방한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분의 불꽃 같은 눈앞에 우리의 죄가 환하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오히려 심판과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자리입니다. 떨며 즐거워하는 자리입니다(참고. 시 2:11; 빌 2:12).

설교는 들어도 되고 듣지 않아도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기억하면 좋고, 잊어버려도 큰 부담 없는 말씀이 아닙니다. 위로와 함께 경고의 음성이 선포됩니다. 구원의 복음과 함께 심판의 복음이 증거됩니다. 믿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복과 함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저주가 쏟아 부어집니다. 설교 후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성찬)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명확히 구분됩니다. 

시내 산과 마찬가지로, 공예배 중에도 ‘십계명 봉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팔이 울려 퍼집니다. 그다음, 온 교회의 회개 즉 언약 공동체의 ‘죄의 공적 고백’이 뒤따릅니다. 왜 이 순서가 있습니까? 이 두렵고 떨리는 말씀 앞에, 죄인인 우리가 겸손히 엎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심판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25) …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28)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29)”(히 12:25, 28-29)


2. 안전한 예배의 집

첫 번째 대지에서 전한 말씀을 생각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막 건축을 명하실 때 하신 이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8절; 참고. 출 29:45-46)


시내 산꼭대기에 강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름을 산 아래서 멀찍이 보고서도 공포에 질려버린 이스라엘입니다. 그분이 가까이 오시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과 멀리 있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들 중에 거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셔도 그들이 안전하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가능한 약속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죄인을 멸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 거하시다니…. 그런데도 안전이 보장된다니….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 안전장치가 필수적입니다. 


첫째, 중보의 장소(성막 식양)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지성소에 안치한 언약궤)로 들어가는 길은 첩첩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가장 먼저, 성막 뜰로 들어가는 길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뜰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인 동편 문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 치며 지키고 있습니다(민 3:38-39). 벽으로 둘러싸인 서쪽, 남쪽, 북쪽에도 각각 게르손(민 3:23), 고핫(민 3:29), 므라리(민 3:35) 등 레위 지파 자손들이 빙 둘러 진 치며 지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녀노소 무론 하고 죄인이 함부로 접근하면 죽입니다(민 1:51; 3:10, 38). 

이뿐 아닙니다. 성막 뜰에서 다시 동편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첫 번째 방인 성소가 있습니다. 성소는 사방이 차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위쪽마저 여러 겹의 가죽과 천으로 덮여 있습니다. 성소를 지나면 제일 안쪽 두 번째 방인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에는 천사-그룹들(angelic cherubim)이 휘장과 언약궤 위에 있어서 죄인들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이 천사들은 거룩하신 여호와의 시위대이며, 죄인들을 공격하는 군대입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계시지만, 그들과 구별되어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성막을 이렇게 설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해 이 예배의 집을 이렇게 설계하셨습니다. 이 예배의 집이 중보의 장소입니다. 중보의 장소 때문에 이스라엘의 안전이 보장됩니다.


둘째, 중보의 행동(성막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규례를 정하십니다. 희생 제사 규례입니다. 죄 없는 짐승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습니다. 여호와의 불에 타 죽습니다. 몸이 찢어지고 피가 쏟아집니다. 이 대속의 희생 제사로 인해,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죄인인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실 수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중보의 행동 때문에 이스라엘의 안전이 보장됩니다.


셋째, 중보의 직분(레위 지파 제사장)입니다. 

모든 이방인 가운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봉헌됩니다(출 19:5-6; 참고. 벧전 2:9). 이스라엘 가운데 레위인이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봉헌됩니다(민 3:11-13). 이스라엘과 레위인들을 대표하여 아론의 가문이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봉헌됩니다(출 28-29장; 레 8-10장; 민 3:9-10). 그리고 이 모두를 대표・대신하여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선택됩니다. 아론은 온 세상 열방과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대신합니다. 아론이 죽은 후에는 아론의 가문 중 당대에 단 한 사람만이 대제사장으로 봉사하며, 대대로 이어집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열방 → 열방의 대표인 이스라엘(제사장 나라) → 이스라엘의 대표인 레위인 → 레위인의 대표인 제사장 → 제사장의 대표인 대제사장 한 사람으로 집약됩니다. 큰 동심원에서 작은 동심원으로 나아가는 구조입니다. 레위인의 중보를 통해, 나아가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 더 나아가 단 한 사람 대제사장의 중보를 통해 이스라엘의 안전이 보장됩니다. 중보의 직분 때문에 이스라엘의 안전이 보장됩니다.


중보의 장소.

중보의 행동.

중보의 직분.


세 가지 안전장치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중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이스라엘 사이에는 ‘중보’가 필요합니다. 중보의 장소가 필요하므로 성막을 건축했습니다. 중보의 행동이 필요하므로 성막은 텅 비어 있는 집이 아닙니다. 각종 희생 제사가 시행됩니다. 중보의 직분이 필요하므로 레위인, 제사장, 그리고 대제사장이 봉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 가지 안전장치를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성막 용어로 선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참고. 요 2:19-22)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표현은 ‘회막을 치시매’라는 뜻입니다.2) 하나님께서 성막을 통해 죄인인 이스라엘 중에 거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죄인인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누추한 텐트 성막에 오셔서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신 것처럼, 아버지의 독생자께서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영원히 함께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중보의 장소입니다. 그분이 걸어 다니는 사람-성막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저 멀리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무너진 성전 잔해 앞에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많은 관광객이나 성지순례자와 달리,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곳이 중보의 장소가 아닙니다. 죄인들은 이제 예수님께로 와야 합니다. 성육신하여 성막과 성전이 되신 예수님께서 중보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여 설계하신 중보의 장소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이 죄인들을 위한 완벽한 안전장치입니다. 그분께 와야만 안전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단번에(once-for-all) 하나님께 희생 제사로 드리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죄인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와 심판을 희생 제물이 대신 짊어지고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어린양(참고. 요 1:29, 36)이신 그분이 우리의 모든 저주와 심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보의 행동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짐승이 울부짖는 성막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희생 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중보의 직분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표・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안전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14)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5)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6)”(히 4:15-16)


공예배 순서에는 ‘십계명 봉독’과 ‘죄의 공적 고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에 ‘사죄의 선포’가 뒤따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회개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우리의 예배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예배의 참석자는 우리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참석하십니다. 그러니 실로 두렵고 떨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잊지 마십시오. 이 두렵고 떨리는 예배 가운데 있는 우리는 안전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예배의 집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예배를 집례하십니다. 예배 시간에 그분이 집례하시지만,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의 종을 보내 예배를 집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집례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목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예배의 집례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장로를 통해 성찬의 식탁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먹여주십니다. 예배의 집례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집사를 통해 우리에게 맡긴 것을 거두시고, 가난한 자를 돌보십니다. 중보의 직분자이신 그분이 예배의 집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합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임합니다.


3. 계속 건축되는 예배의 집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모세 시대에 시내 산에서 성막 건축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몇백 년 후, 솔로몬 시대에 시온 산에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완공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 성전은 건축되고 있으며, 장차 완공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보의 장소, 중보의 행동, 중보의 직분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성막과 성전, 구약시대의 희생 제사,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는 끝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그분의 집을 계속 건축하십니다. 하나님의 예배를 계속 진행하십니다.


첫째, 중보의 장소인 성전이 지금도 계속 건축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막이나 성전이라는 어떤 건물이 예배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로 달라졌습니다. 이제 사람이 성전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성막(요 1:14)이요 성전(요 2:19-22)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성전을 건축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그분 자신이 성막이며, 성전이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승천하신 그분이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시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무리, 즉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내주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가 성령의 전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20)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21)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엡 2:20-22; 참고. 고전 3:16-17; 6:19-20; 벧전 2:4-5)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는 지금도 계속 건축되고 있습니다. 주일 공예배와 주중 생활예배를 통해 이 성전은 거룩함과 정결을 유지합니다. 전도와 선교를 통해 이 성전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16세기 개혁자들이 올바른 말씀과 올바른 성례가 시행되는 교회, 즉 성경적인 예배가 시행되는 교회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형교회 역시 복음 하에서 공교회요 우주적 교회인데, 전 세계에서 참 믿음(종교)을 고백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이루어지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집이요 권속이며, 이 교회를 떠나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2)


둘째, 하늘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중보의 행동을 계속하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을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오라고 하십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그분은 종들을 시켜 이 땅에서도 중보의 행동을 계속하십니다. 목사를 시켜 공예배를 인도하십니다. 성경 봉독과 설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장로들의 회(會)인 당회를 시켜 세례와 성찬을 준비하십니다. 집사들을 시켜 헌금을 거두어 구제하며 위로하게 하십니다. 직분자들이 봉사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 직분자들 위에는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중보자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러니 그분께 나아오십시오. 그분이 지금도 반겨주십니다.


셋째,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십니다. 계속 죽는 구약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23)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24)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5) …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28)”(히 7:23-25, 28)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의 집은 계속 건축되고 있습니다. 참 교회가 바로 중보의 장소 즉 사람-성전이기 때문입니다(중보의 장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참 교회를 통해 지금도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중보의 행동). 그리고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중보의 직분).

이 하나님의 집은 장차 완공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완공될 것입니다. 그때 예배의 집과 무관한 자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려 이를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 가운데 있는 우리는 송아지같이 기뻐 뛸 것입니다.


<결론>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 가운데 거할 집을 건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첫째, 이 예배의 집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므로 두렵고 떨리는 집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므로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집입니다.

둘째, 이 예배의 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집례하시므로 안전한 집입니다. 예수님께서 중보의 장소이십니다. 중보의 직분자로서 중보의 행동을 하십니다. 참 예배를 드리는 교회야말로 진정한 구원의 기관입니다.

셋째, 이 예배의 집은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지금도 계속 건축되고 있으며,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완공될 것입니다.3)

참 교회는 이와 같이 합당한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야말로 온 세상의 소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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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후 2세기의 이단자 마르시온(Marcion)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2) 한글개역성경과 한글개역개정성경에서 “거하시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σκηνόω(스케노오)”는 ‘장막을 쳐서 그 속에 거주하다(dwell in a tent)’라는 뜻입니다. 이는 구약 모세의 성막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연상케 합니다. 즉,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일종의 성막 건축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3) 이상의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이 설교의 대지는 1. 신론(죄와 비참) 2. 기독론(구속자) 3. 성령론(감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예배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우리를 만나주시는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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