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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전쟁 7


• 본문: 열왕기상 18:20-46

• 제목: 여호와의 응답이 넘치는 승리하는 예배


서론

북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 아합 보다 더 불경건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했다”고 했습니다(왕상 16:30). 여로보암의 죄를 가볍게 여겼고, 불신 결혼을 했으며, 바알을 섬겨 예배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죄를 가볍게 여겼다는 말씀은 여로보암의 죄에서 더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이 예배하게 했습니다. 아합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알을 예배하고, 아세라 상을 만들었습니다.

아합의 타락의 결정판은 여리고의 재건입니다. 벧엘 사람 히엘을 시켜 여리고를 건축했는데, 터를 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수 6:26, 왕상 16:34). 여리고 성의 재건이,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요? 여리고 성은 칼과 창으로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 여호수아의 인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곧 믿음으로 정복한 성읍이 여리고입니다. 그러니 무너진 여리고 성은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들어간다는 도리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왕국에서 믿음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북 이스라엘 왕들 중에 가장 악한 왕입니다.

이러한 아합 왕과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준비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을 찾아가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 선지자 엘리야의 선언을 듣고 아합은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회개하지 않았고, 자신의 길을 계속 갔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왕과 백성들로부터 하나님은 선지자를 사라지게 하셨고, 시돈에서 삼년 동안 머물게 하셨습니다(왕상 18:1). 하나님의 왕국에서 선지자가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시돈에 거한 지 삼년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사마리아로 보냈습니다. 드디어 비를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로 돌아왔고, 사람을 보내어 아합을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 산으로 보내라고 말합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갈멜 산에서의 대결이 시작되었습니다. 예배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와 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제: 하나님께서는 참 예배자의 예배를 받으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1. 엘리야의 제언

2. 바알 선지자들의 예배

3. 엘리야의 예배


본론

1. 엘리야의 제언

삼년 전, 엘리야는 아합 왕을 찾아가 언약의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왕상 17:1). 엘리야는 저주를 선언하고 사라졌습니다. 엘리야가 사라지자 아합은 엘리야를 찾으려고 자신의 왕국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과 나라들에도 사람을 보내어 수소문했고, 엘리야가 없으면 맹세까지 시켰습니다(왕상 18:10). 요즘말로 하면, 엘리야는 1급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시돈에 있었고, 그곳은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는 현장이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로 인해 언약의 저주인 가뭄 중에도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복을 누렸고, 죽은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언약의 왕국은 저주 가운데 있었지만, 이방의 한 여인의 가정에서는 참 선지자와 그 선지자의 말씀이 진리임을 증거하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삼년 육 개월 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아합을 만나려고 가는 중에 오바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바댜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결국 아합과 엘리야는 만났습니다. 아합의 영적 상태는 그야말로 비참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 이세벨이 선지자를 죽이는 일에는 무심했지만 자신의 가축을 위해서는 물을 찾으려고 왕권을 이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왕상 18:4-5).

그런 아합에게 엘리야는 제언을 합니다. 사백 오십 명의 바알 선지자와 사백 명의 아세라 선지자를 갈멜 산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아합은 엘리야의 제언대로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알 선지자들이 갈멜 산에 모였습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책망합니다(21절).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한 분을 선택하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침묵’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좋고, 바알도 좋다는 백성들의 신앙은 충격입니다.

대답 없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제안합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자신이 각각 송아지 한 마리를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않고 각자의 신에게 요청하여 불로 응답하는 그 분이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자고 합니다(23-24절). 바알 선지자들에게 제안을 했는데, 모든 백성이 그제야 대답합니다. “그 말이 옳도다”(24절)


성도 여러분!

엘리야의 제언과 백성들의 대답 사이의 ‘긴 간격’을 느끼십니까? 백성들은 마치 자신들의 눈에 직접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믿을 것처럼 대답합니다. 증거가 있어야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일견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신중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백성의 태도는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신중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불신자와 같습니다.

벧엘의 히엘이 여리고 성을 재건할 때, 아들들이 죽어가는 것은 증거가 아닙니까? 성경에는 첫째 아들과 막내 아들의 죽음을 말하지만 본문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서 읽으면, 모든 아들들이 죽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삼년 육 개월 동안의 가뭄은 무엇입니까? 이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가뭄, 곧 기근은 언약의 저주 중 모든 백성들이 가장 쉽게 깨닫는 종류입니다. 비와 이슬이 없으면 식물이 죽고, 강이 마르고, 죽음의 행렬이 끊이지 않습니다.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부르며 섬기는 모습. 절기는 사라지고 아무런 의미 없는 날을 절기로 지키는 삶. 제사장들이 아니라 누구든지 왕의 마음에 들면 제사장이 되는 직분의 타락. 이러한 삶에 익숙해진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엘리야의 질문 앞에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 고스란히 담겨졌습니다.

예배와 직분이 파괴된 상태에서 지속되는 교회생활은 결국 하나님과 바알을 구별하지 못하는 영적 맹인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언약의 저주, 곧 징계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징계인지 깨닫지 못하는 비참한 모습. 이것이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도 좋고, 바알도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분은 없습니까? 주일에 공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세상의 다른 것을 올려놓고 살아가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와 직장이 아무런 관련 없는 것처럼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교회에서의 삶은 대단히 열정적인데, 가정이나 사회에서는 마치 불신자들처럼 생각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면, 선지자 엘리야의 책망을 듣고도 ‘침묵’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기억합시다. 선택합시다. 여호와 우리 주 하나님만을. 우리의 바알들에게 기웃 거리지 맙시다.


2. 바알 선지자들의 예배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불을 붙이지 않은 송아지 제물이 준비되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부르짖었지만 하늘은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제단 주위에서 “뛰 놀았습니다”(본문 26절).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사람을 사용하여 기록했습니다(벧후 1:21). 본문 26절에서 바알 선지자들의 모습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뛰 놀더라”마치 바알 선지자들이 춤을 춘 것 같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는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뭔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 상태를 표현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바로 어떤 것을 결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본문 21절에서 이 단어는 “머뭇머뭇”으로 번역 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단어는 “넘어가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특히 유월절을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출 12:11,13,21,23,43,48).

바알 선지자들은 지금 유월절 흉내를 냅니다. 가짜 예배를 드립니다. 또한 바알 선지자들의 모습은 백성들의 마음을 그대로 재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중 한쪽을 선택해야 되는데, 머뭇거립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뛰 노는 모습은 겉으로 볼 때 일종의 종교의식이며 몸을 흔드는 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유월절 절기를 흉내 내는 가짜 예배이며 흔들리는 백성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모사(摹寫)입니다.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그렇게 바알 선지자들은 예배를 드렸지만 바알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조롱합니다.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27절) 엘리야의 조롱에는 바알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평가가 잔뜩 담겨졌습니다. ‘묵상하고’, ‘자리를 비우고’, ‘길을 걷고’, ‘잠이 들고’는 모두 인간의 모습이지 신의 모습은 아닙니다. 바알은 사람이 만든 신이지 스스로 자존하는 신은 아닙니다.

엘리야의 조롱을 들은 바알 선지자들은 전력(全力)을 다합니다. 끔찍한 모습이 연출됩니다. 큰 소리로 부르고,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스스로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그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사백 오십 명.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사백 오십 인의 소리와 유혈이 낭자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춤을 추는 듯 절뚝거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러나 결과는 자명합니다.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거룩한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다른 신을 들였습니다. 여로보암이 2계명을 어긴 것이라면, 아합은 1계명을 어겼습니다. 아합의 범죄는 계명을 하나 더 어긴 정도가 아닙니다. 아합은 그 자신이 바알을 섬기며, 백성들도 바알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이 아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따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백성들을 향하여 선택을 강요하면서 던진 질문을 보십시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21절) 여호와도 하나님으로, 바알도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호와만 하나님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아합 시대의 백성들은 바알도 하나님 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 할까요!

시내 산에서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들이 섬긴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하나님이라 고백했습니다(출 32:4). 여로보암이 같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한 말을 들어보세요.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왕상 12:28)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때때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시는 분으로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계시지만,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의 하나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알이 하나님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상을 만들면 안 된다는 계명(2계명)을 어기고 나니,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1계명)는 말씀에 대한 이해도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사상이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렇게 말씀의 한 부분을 제외하면 다른 말씀도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는 문이 열립니다.

예배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만을’예배해야 된다고 모두 긍정합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를 첨가합니다. 그래도 예배하는 ‘사람들’을 좀 고려해 주어야 된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즉 예배의 대상을 건드리지 않고, 예배하는 사람의 입장도 헤아려 주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대단히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성도들이 좀 편하도록 순서도 짧게, 어떤 순서는 사람의 마음도 고려해야 되니 박수도 적절히 치면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는 음악도 사람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는 감동적인 것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을’예배해야 한다는 말씀은 단 한 번도 건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배자의 형편도 고려해야 된다는 주장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도, 사람도 좋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예배는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변질됩니다. 어느덧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이 앉습니다.

예배는 사람을 고려하면 안 됩니다. 예배는 철저하게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예배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만이’찬양 받으셔야 하며, 하나님‘만이’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며, 하나님‘만이’말씀하시고, 하나님‘만이’자기 백성과 교제하시고, 하나님‘만이’우리의 보호자가 되며, 하나님‘만이’우리를 파송합니다.


성도여러분!

바알 선지자들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그들은 한 사람 엘리야와 비교할 때, 사백오십 배나 많았습니다. 엄청난 수 적 차이입니다. 그들은 열정적인 예배 자들이었습니다. 큰소리를 질렀고, 도구를 사용하여 자기 몸을 상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예배에 드린 시간을 보십시오. 하루 종일 예배했습니다. 엄청난 시간을 예배에 사용했습니다.

많은 수자도, 뜨거운 열정과 긴 시간도, 참 예배의 기준이 아닙니다. 참 예배는 겉모습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의 대상으로 여기는지, 여호와 하나님이 명령한 대로인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참 예배와 가짜 예배를 가늠 하는 시금석입니다. 우리 모두 가짜 예배가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됩시다.


3. 엘리야의 예배

실패한 바알 선지자들을 물리친 엘리야는 백성들을 가까이 오게 합니다. 가까이에서 확실히 보고 믿으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이 예배에 동참하라는 초청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돌을 취해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 나옵니다. 본문 30절입니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했다고 합니다.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이라는 말씀은 그곳에 오래 전부터 제단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제단이 무너졌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왕국의 참 예배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실로 이스라엘은 참 예배를 파괴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더 이상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서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예배 장소를 만들었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만든 벧엘과 단의 제단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합 왕은 벧엘과 단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에 바알을 위한 제단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에서 예배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렇게 파괴된 예배를 선지자 엘리야가 재건합니다. 산에서 참 예배가 재현됩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돌 열둘을 취하여 제단을 쌓고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송아지를 나무 위에 놓습니다. 네 개의 통에 물을 채워 세 번이나 반복하여 제물과 나무 위에 부었습니다. 곧 열두 돌을 취하여 제단을 쌓았듯이 물도 열두 번을 부었습니다. 제단에서 흐른 물이 도랑을 가득 채웠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행동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불이 잘 붙도록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불이 붙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직감적으로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선지자가 세운 제단은 무너진 제단입니다. 원래 있던 제단이 무너지고 새롭게 세운 제단입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 물이 흘러 주위를 가득 채웁니다. 이는 마치 에덴의 동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덴의 동산도 산에 건설되었습니다. 잃어버린 낙원. 바로 그 에덴의 동산이 재건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벧엘과 단에서 예배함으로 참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곳에서 진정한 생수가 흘러넘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참 예배는 성경으로 돌아갈 때 온전해집니다.

엘리야는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릅니다. 곧 언약의 하나님을 부릅니다. 바로 그 언약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선지자 자신이 그 하나님의 종이며, 또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음을 백성들이 알게 해 달라고 청원합니다. 엘리야의 요청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조상들의 하나님이 진정한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 둘째는 엘리야 자신이 그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 셋째는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고 있음을 백성이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간절한 요청에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습니다.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백성들은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사실 불이 제단에 임했다는 것은 그곳이 언제나 하나님의 집임을 확증합니다. 성막이 지어지고 처음으로 제사를 드릴 때에도,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에도 그러했습니다(레 9:26-28, 대상 21:26-27, 대하 7:1). 불의 임함은 그곳이 하나님의 집임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예배가 시작되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문 39절에서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라고 했습니다. 백성이 엎드린다는 말씀은 바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이어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잡아 기손 시내로 데려가 죽입니다. 판결이 이루어졌습니다. 대적들을 처형함으로 여호와의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 행위는 언약이 갱신되어 온전해졌다는 표입니다. 그래서 시내 산 언약이 체결되었을 때, 백성들의 대표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출 24:11).

하나님께서는 불로 응답하셨고, 하나님의 사자인 선지자는 재판관이 되어 바알의 선지자들을 처형했습니다. 왕은 백성을 대표하여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갱신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삼년 육 개월 동안 닫혀 있었던 하늘은 드디어 비를 내렸습니다. 언약의 저주가 풀려 복이 내렸습니다. 참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참 예배는 많은 숫자가 드리기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바알 선지자 사백 오십 명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참 하나님의 백성이 드릴 때에 그 예배는 참 예배, 응답 받는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비록 갈멜 산이지만 무너진 단을 재건했습니다. 무너진 단을 제거하는 선지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 성전에서 예배하려는 참 예배자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예배는 숫자의 만고 적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드리는 예배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온전한 예배자들이 됩시다.

열정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라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바알 선지자의 열정을 보십시오.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할 만큼 뜨겁게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는 가짜 예배였습니다. 엘리야는 뜨거운 열정보다 언약의 하나님을 찾았고, 그 언약의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예배 받으시는 분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예배해야 합니다. 약속 하시는 하나님.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그러니 예배는 언약 갱신의 현장입니다.

오랜 시간 하나님을 부른다고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 예배는 짧은 시간이냐, 긴 시간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 예배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무엇을 행하시는지를 알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엘리야는 본문 37절에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 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되 돌이키시는 하나님.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가 관건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로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진정한 예배자입니다.

참 예배자는 언제나 승리를 보장합니다. 승리는 참 예배자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사단은 교회를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사단은 교회 내부에 적을 두어 공격하기도 하고, 교회 외부에 적을 만들어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교회가 승리하는 길은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는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이러한 예배로 무장한 교회와 성도들이 됩시다.


결론

우리는 늘 문제를 갖고 살아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없고, 어려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참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참 예배자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대적의 공격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지키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고신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설교 이해를 위한 질문

1. 아합 왕의 범죄를 정리해 보세요(참고, 열왕기상 16:29-34). 여리고 성의 재건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언약의 저주를 선언한 후 잠시 그릿 시냇 가에 있다가 사르밧 과부에게로 갔습니다. 선지자가 사르밧에 거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3. 갈멜 산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머뭇머뭇 하지 말라고 책망합니다. 바알과 하나님 중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오늘 말씀사역자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 외의 다른 것 중에 선택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혹 머뭇거림은 없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머뭇거린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본문 21절에서 “머뭇머뭇”과 26절의 “뛰놀더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바는 무엇입니까?


5. 바알 선지자들의 예배를 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아 주의해야 할 예배에 대한 우리의 모습과 생각을 정리해 보고, 다른 성도들과 나누어 봅시다.


6.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은 불로써 응답하셨습니다. 불이 내렸다는 것이 다른 구약성경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7. 엘리야는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를 통해 참 예배의 의미를 정의해 봅시다.


8. 참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언제나 승리합니다. 엘리야의 승리를 정리해 보고, 깨달은 바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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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10(떡상과 진설병, 레위기 24장 5~9절)

    Date2022.03.04 Bykosin Views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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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예배전쟁 12(찢어진 휘장 히10장)

    Date2022.02.07 Bykosin Views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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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예배전쟁 11(몸을 찢은 자들이 예배한다고 고전11장)

    Date2022.01.05 Bykosin Views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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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예배전쟁 10(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요4장)

    Date2022.01.05 Bykosin Views1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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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9(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영혼을 쏟아 일하라, 엡 6, 5-9)

    Date2021.10.26 Bykosin Views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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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9(성령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평강, 계시록 1장 3~6절)

    Date2021.09.16 Bykosin Views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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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8(하나님께서 정하신 합당한 예배, 히브리서 9장 1~5절)

    Date2021.09.16 Bykosin Views1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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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7(기념 보석 호마노, 출애굽기 28장 9~12절)

    Date2021.09.16 Bykosin Views1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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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예배전쟁 9(생명과 바꾼 예배 단3장)

    Date2021.08.25 Bykosin Views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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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8(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의 가정- 설교 두 편, 엡 5, 21-33 )

    Date2021.08.09 Bykosin Views1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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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7(하나님의 종인 공직자에게 복종하라 롬 13,1-7 )

    Date2021.08.09 Bykosin Views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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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예배전쟁 8(재개된 예배의 능력 대하31장)

    Date2021.08.09 Bykosin Views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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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예배전쟁 7(여호와의 응답이 넘치는 승리하는 예배 왕상18장)

    Date2021.07.08 Bykosin Views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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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6(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출애굽기 25장 8-22절)

    Date2021.06.10 Bykosin Views2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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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5(동쪽 문, 민수기 3장 38절, 참고-창세기 3장 24절)

    Date2021.06.10 Bykosin Views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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