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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전쟁 10

 

본문: 요한복음 4:19-24

제목: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서론

예배의 자리로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시고, 예배를 미리 준비하셔서 우리를 초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이 자리에 나올 수 없는 이들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예배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립니다.

구약과 신약시대의 교회 예배는 그 본질은 같지만 모양은 많이 다릅니다. 구약시대는 지정된 장소(성막이나 성전)에서, 지정된 사람에 의해(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봉사), 지정된 제물(제사에 적합한 짐승)로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교회는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여러 곳에서, 제사장이나 레위 인들이 아니라 직분자들과 회중이 함께, 짐승 제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공로로 예배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변화가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났고, 그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려줍니다. 동시에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을 통해 예배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무엇인지도도 알려줍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바로 그 원리를 따라 예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배의 원리가 어떠하며, 우리가 파수하고 지켜야 할 예배의 본질을 알려줍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지키고 보존하며, 더욱 풍성하게 가꾸어야 할 참 예배의 원리를 배우는 기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주제: 우리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1. 오염된 예배 이해

2. 소망해야 할 바른 예배

 

본론

1. 오염된 예배 이해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예수님은 수가라는 동네에 들렀습니다. 그곳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물을 좀 달라고 했고, 여인은 예수님의 요청에 냉정하게 응대했습니다. 여자가 예수님을 조금 냉정히 대한 이유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교류하지 않는 이유는 역사적 배경 때문입니다. 흔히 사마리아라고 하면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마리아는 한 성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넓은 지역의 이름입니다. 사마리아 성은 북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세멜로부터 땅을 사서 그곳에 성을 건축했고, 그리고 그곳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습니다(왕상 16:21-14).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앗수르는 이방인들을 이 성 주변에 이주시켜 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마리아는 벧엘과 단과 더불어 우상숭배의 본거지였는데, 이방인까지 들어와 같이 살게 되니 혼합주의자들 천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 사자(lion)를 보내 몇 사람을 죽였고(왕하 17:24-25), 앗수르 왕은 이 소식을 듣고 제사장 한 사람을 보내 벧엘에 살면서 여호와를 섬기는 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왕하 17:27-28). 그러나 사마리아는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온갖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마리아의 역사는 이후 한 도시를 부르는 명칭에서 더 넓은 지역을 일컫는 호칭으로 바뀌었습니다. 즉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 넓게 형성된 지역 전체를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남 유다가 칠십 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도 성전 재건에 동참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혼합주의자이며, 온갖 우상을 섬기는 더러운 자들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이에 화가 난 사마리아인들은 앙심을 품고 사사건건 성전 재건을 방해했습니다(4:1-26).

예루살렘과 멀어지면서 사마리아 인들은 자신들만의 제단을 만들고 예배처소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모세오경을 수정하여 사마리아 오경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BC 400년경에는 그리심 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리심 산에 성전을 건축한 이는 대제사장 요한의 아들인 마낫세였는데, 그는 총독의 딸과 결혼했고, 스스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BC 128, 하스모니안 가문의 요한 힐카누스가 그리심 산의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그 후, 사마리아 전체를 정복하였고,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종교적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통제는 로마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한 후에야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는 큰 앙금과 원한이 있었기에 여자는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예수님을 냉대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태도에 아랑곳 하지 않고 물을 소재로 영적 대화를 이어가셨고, 결국 여성의 흠결을 들추어냈습니다. 남편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하였고, 예수님은 그녀가 다섯 남편이 있었지만 지금 있는 자는 남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여자는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19).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인생 여정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질문을 합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녀의 모든 비밀을 알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는, 옆집에 사는 이웃의 생활 모습이 비밀로 덮여지는 시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옆집 부엌의 숟가락도 셀 수 있을 만큼 속속들이 아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남편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여성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움을 느끼기는 했겠지만, 이를 통해 여자는 뭔가 새로운 영적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모세가 예언한 바로 그 선지자, 곧 메시아가 아닌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실제로 25절에서 여자는 메시아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예배 주제를 꺼낸 이유는 예수님이 참 메시아인지를 확인하려는 의도와 사마리아인으로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앙에 대한 자긍심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4:20)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짓고 오랫동안 예배하던 전통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유대인들이 파괴하여 사마리아 인과 유대인 사이에 골은 더 깊어졌으며, 지금은 유대와는 다른 예배 전통을 가진 선조들의 믿음을 이어 받은 여인은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했습니다. 오경을 존중하고, 그 오경을 변경하여 성경으로 인정한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언약의 축복을 선언한 그리심 산이 한참 후대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역사가 깊다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한때 종교적으로 예루살렘의 통제에 있었지만 로마가 들어와 점령함으로 예루살렘의 통제에서 벗어나 종교적 자유를 누리는 그리심 산에서의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마리아인 여자의 눈에 비친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이나 모두 로마의 통치에 있으니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오히려 모세 오경의 권위만을 존중하는 사마리아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리심 산에서의 예배가, 400년이나 뒤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게 보였던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을 존중하고, 그 가치를 결코 부인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조상들이 세운 그리심 산 성전에서의 예배가 무슨 큰 결함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이 북 이스라엘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신앙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이 예루살렘 대신에 벧엘과 단에 제단을 만들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수백 년 동안 백성들로 하여금 섬기게 했습니다.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사마리아인의 삶 속에는 예루살렘 성전이나 벧엘과 단에 서있는 금송아지나 같은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뿌리 깊게 박혔습니다. 이 철저한 혼합주의적 신앙과 삶에 이방인이 대거 몰려와 함께 살았기에 그 신앙의 변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체 성전을 가졌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여자의 피 속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반감이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해가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에 녹아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마리아 여자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인 사상과 그 인간중심적 사고의 표출인 혼합주의자의 모습으로 가득한 모습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그리심 산이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기던 그 신앙이 뿌리 깊게 녹아 있는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자의 질문을 접하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수가 성 여자는 두 가지 결점을 가졌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계시를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 조상들의 전통만을 고집했습니다.

둘째, 그녀는 혼합주의자였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예배해야 되는데 예루살렘과 그리심 산을 같은 권위로 이해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의 두 가지 잘못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 이해를 점검하는 기준입니다.

첫째, 전통은 중요하지만 항상 계시된 말씀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우리 고신교회는 개혁주의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개혁주의 전통의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개혁된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입니다. 전통은 존중하되, 그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교정하고 개혁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예전은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전달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한 선교사님들에게 우리는 늘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런데 예전과 관련하여 아쉬움도 많습니다. 우리의 예배에 남겨진 전통들을 존중하면서 더 성경에 가깝게 바꿔야 합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만 예배 전에 종을 쳤습니다. 이제 예배를 시작하겠다는 신호입니다. 그것은 좋은 전통이지만 성경에 더 가까운 예배요소로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종을 치는 행위는 한국교회의 문화에서 나왔지 성경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대를 따라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 예배 전에 종을 치지 않느냐?”고 항의하면 안 됩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 때도 좀 더 성경적인 자세와 모습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대체로 신앙고백을 하면 기도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신경을 암송합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행위이고, 아주 중요한 예배 요소 중 하나입니다. 고백은 자신의 믿는 바를 하나님 앞에 선서하고 공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오히려 눈을 들고 서로의 고백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선서하듯이 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을 할 때, 행동으로 표현한다면, 오른 손을 들어 약속의 표로 삼아도 좋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예배를 전통이 아니라 그 순서가 갖는 원래의 의미에 부합되도록 개혁해야 합니다. 축도 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도는 기도의 의미보다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는 의미가 강하기에 눈을 들어 축도자의 손을 보며 마음껏 하나님의 복을 받아들이고, 그 복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다져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둘째로 사마리아 여자는 혼합주의에 깊이 물든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예루살렘과 자기 조상들이 예배하는 그리심 산을 비교했습니다. 사실 그리심 산은 하나님께서 정한 예배 장소가 아닙니다. 성전은 오직 한 곳 예루살렘 성전 밖에 없습니다. 그곳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예배를 받으신 유일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마리아 여성은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을 비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예배를 상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것은 좋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공예배는 공예배 만이 갖는 순서와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 아무리 좋게 보여도 공예배에서 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둘을 섞으면 안 됩니다.

헌금 시간은 반드시 예배 중에 있어야 합니다. 은행계좌로 입금하는 것은 공예배를 타락시키는 행위입니다. 예배음악의 문제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 음악이나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당회는 반드시 예배음악에 합당한 찬송을 사용하도록 감독해야 합니다. 공예배 중에 찬송가에 없는 복음송이나 집회에서 부르는 CCM을 불러서는 안 됩니다. 성찬이 없는 예배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성찬은 교회가 모일 때마다 행한 중요한 예배 요소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매주 성찬을 행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마리아 여성의 질문을 통해 우리가 점검해야 될 예배의 요소들을 살펴봅시다. 우리의 예배가 합당한 순서와 요소로 구성되도록 기도하며 준비하는 교회가 됩시다. 당회가 이 직무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건강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소망해야 할 바른 예배

여자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답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 강조점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내 말을 믿으라는 것이요, 둘째는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곧 시간의 문제입니다. 셋째는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씀으로 예배의 본질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답변 중에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중심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먼저,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좋은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특정한 한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옛 언약 시대에는 성막을 중심으로 예배하다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자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왕정시대에는 다른 곳에서 예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를 거부하고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예배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북 이스라엘은 급속히 타락했습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직분도 함께 무너지고 백성들의 삶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결국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멸망했습니다. 아합 왕 시대에 수도 사마리아에 우상을 섬기는 것도 하나님의 벌을 받는데 한몫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만이 진정한 예배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도 이 예배장소를 우상숭배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중략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1:10)라고 했습니다. 또한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1:13).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심각한 우상숭배의 장소로 변질되었는지 낱낱이 고발합니다. 성전은 가증한 곳이 되었습니다. 질투의 우상을 만들어 섬겼고, 70명의 장로들은 성전 벽에 온갖 짐승과 곤충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을 섬겼으며, 여자들은 바벨론 신인 담무스를 경배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 계단에 앉아 태양을 섬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8).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다(10:4,18, 11:16).

예수님의 답변 속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옛 성전을 허물고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지금의 예루살렘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요(2:16), 강도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21:13). 참 성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2:19-22). 이제는 그리심 산은 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하여 버리시고(23:37-39, 24)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이 되어 아버지께 예배하는 시기가 왔다고 했습니다.

옛 언약 시대에 있었던 것들이 사라지고 새 언약 시대에는 새로운 것이 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것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모형과 그림자 대신 원형과 실체가 와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새 시대를 말하며, 새로운 예배 형태를 선포하셨습니다.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로 변한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정리하시고, 온전하고 완전한 성전인 예수님을 보내셔서 참 예배자를 찾으시는 새 시대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시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평가하셨습니다(12:39, 16:4, 8:38). 이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네 남편을 데려오라 하시고, 그 여자가 음란한 여성임을 밝히 드러내는 것과 흡사합니다. 음란한 여자에게 참다운 구원의 길은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참 성전인 예수님 안에서 예배할 때 영생을 얻으며 진정한 안식을 누린다고 초대했습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예배가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예배인지, 혹 우상숭배의 모습은 없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판결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경고하신 그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경고한 핵심은 형식은 가졌지만 내용이 없는 예배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그 자체가 우리의 가 되거나 공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삼위 하나님과 언약 맺음을 다시 재현하는 현장이기에 그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 우리는 그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받았다면, 그 말씀을 의지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말씀이고, 나의 삶은 그 말씀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면, 이는 정말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실제적 무신론자의 삶이라 규정합니다.

예배는 통과의례가 아닙니다. 매 주일마다 일상적으로 해치워야 하는 행사도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예배를 이렇게 대한다면 우리는 온전한 예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가증스러운 자들이 됩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광과 찬송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일예배를 드린 후에 일상의 삶에서는 물질이나 명예를 최우선에 둔다면, 이것이야말로 우상숭배의 전형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교회가 성전이 되어, 교회로 모여,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제사장의 중보가 아니라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제사장이 아니라 직분자들의 봉사로 말씀과 성례와 찬양과 기도로 드리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영과 진리성령과 진리라는 의미와 진리의 성령이라는 의미를 모두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말씀은 예배 중에 어떤 신비스러운 성령체험을 한다거나 예배순서를 무시하고 성령님의 인도라고 하면서 무질서하게 순서 없이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이 풍성하게 드러나도록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15:26, 5:32). 성령님은 무질서한 은사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님은 은사를 품위 있고, 질서를 따라 사용케 하십니다. 그러니 성령님으로 충만한 예배는 당회가 확정한 예배 순서를 따라 그 순서에 담긴 의미가 풍성하게 드러나도록 시행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인 교회가 맺은 언약이 재현되는 현장이 되게 하는 예배여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진리의 성령님에 의해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도들과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에게 역사하셔서 예배가 무엇인지, 예배에는 어떤 순서가 있어야 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예배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에 교회가 출현했고, 교회는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했습니다.

그 예배에는 말씀과 성례와 기도, 그리고 찬양 특별히 시편 찬송이 있었고, 나눔의 표인 헌금이 있었으며, 신앙고백과 죄 사함의 은혜가 넘쳤습니다(2:42, 44-47, 고전 11:17-26, 14:26). 이런 예배에는 직분자들의 봉사가 반듯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삼위 하나님과 그 백성의 친밀한 교제가 풍성한 예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예배를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 고신교회의 예배가 성령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길 기도합시다.

 

결론

사마리아 여자는 한 마디로 혼합주의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존중하며,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여러 남편을 두었지만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닙니다. 여자의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대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곧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여자의 잘못된 예배 이해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잘 점검해야 합니다. 예배순서 중 전통과 성경의 가르침을 구별하여 정리해야 합니다. 전통은 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또한 사마리아 여자는 철저한 혼합주의자였습니다. 예배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배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려내어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려고 고안해낸 것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전통과 혼합주의를 경계하며 예배하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동시에 잘못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합시다. 사마리아 성전은 말할 것도 없고 벧엘과 단에서의 금송아지 경배는 우상숭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도 온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참 예배장소인 예루살렘 성전도 타락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인간의 탐욕을 채우는 예배가 되지 않게 합시다. 우리의 예배는 삼위 하나님과 언약을 재현하는 현장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자가 됩니다. 참 예배자가 되는 모든 성도들이 됩시다.

 

설교 이해를 위한 질문

1. 물 좀 달라는 예수님의 요청을 사마리아 여자는 냉정히 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참고, 4:9)

2.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 사이의 적대감은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그 역사적 배경을 정리해 봅시다.

3.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는 여자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그녀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4. 사마리아 여자는 두 가지 큰 결점을 가졌습니다. 이 두 가지 큰 결점을 통해 우리가 지금 우리의 예배를 보면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5.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답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 3가지 강조점은 무엇입니까?

6. 예수님은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른다는 말씀하셨습니다. 옛 언약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린 예배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예수님께서 제안한 온전한 예배는 어떻게 드려집니까?

7. 진리의 성령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가 참다운 예배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신약 교회에 제시된 예배의 요소들을 정리해 보세요.

8. 나의 예배 모습을 오늘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고, 개혁하고 더욱 힘을 쏟아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다른 성도들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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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12(첫번째 크리스마스의 예배, 누가복음 1장 1-20절) file kosin 2022.09.06 1124
52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11(하나님께 예배하며 영원히 다스림, 계시록 22장 1-8절) file kosin 2022.09.06 934
51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10(예배자의 기쁨, 계시록 5장) file kosin 2022.09.06 856
50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12(물두멍, 출애굽기 30장 17~21절) file kosin 2022.05.19 919
49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11(향단, 출애굽기 30장 1~10, 34~38절) file kosin 2022.05.19 884
48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10(떡상과 진설병, 레위기 24장 5~9절) file kosin 2022.03.04 1223
47 예배전쟁 12(찢어진 휘장 히10장) file kosin 2022.02.07 1452
46 예배전쟁 11(몸을 찢은 자들이 예배한다고 고전11장) file kosin 2022.01.05 1309
» 예배전쟁 10(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요4장) file kosin 2022.01.05 1462
44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9(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영혼을 쏟아 일하라, 엡 6, 5-9) file kosin 2021.10.26 1532
43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9(성령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평강, 계시록 1장 3~6절) file kosin 2021.09.16 1470
42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8(하나님께서 정하신 합당한 예배, 히브리서 9장 1~5절) file kosin 2021.09.16 1679
41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7(기념 보석 호마노, 출애굽기 28장 9~12절) file kosin 2021.09.16 1660
40 예배전쟁 9(생명과 바꾼 예배 단3장) file kosin 2021.08.25 1526
39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8(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의 가정- 설교 두 편, 엡 5, 21-33 ) file kosin 2021.08.09 1687
38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7(하나님의 종인 공직자에게 복종하라 롬 13,1-7 ) file kosin 2021.08.09 1703
37 예배전쟁 8(재개된 예배의 능력 대하31장) file kosin 2021.08.09 1798
36 예배전쟁 7(여호와의 응답이 넘치는 승리하는 예배 왕상18장) file kosin 2021.07.08 2508
35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6(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출애굽기 25장 8-22절) file kosin 2021.06.10 2076
34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5(동쪽 문, 민수기 3장 38절, 참고-창세기 3장 24절) file kosin 2021.06.10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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