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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전쟁 11

 

본문: 고린도전서 11:17-34

제목: 몸을 찢은 자들이 예배한다고?

 

서론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파당을 짓고 나뉘었습니다(고전 1:12).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고전 5:1-2). 각각 자기의 은사가 최고라 생각하여 질서가 없었습니다(고전 12:27-31, 14:39-40). 심지어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도 있었습니다(고전 15:12). 그런 중에 오늘 본문은 다른 문제를 말씀합니다. 다름 아니라 성찬 문제입니다.

사실, 성찬 문제는 16세기 교회개혁의 시대에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찬을 제사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맞서 개혁자들은 성찬은 제사가 아니라 주님의 만찬이라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칼빈은 기독교강요 4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찬 이해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강요4,17-18).

우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의 성찬 이해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압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찬을 화체설이라 하며, 개신교회의 성찬을 기념설혹은 영적임재설이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개혁의 시대에 더 근본적인 성찬 문제는 제사인가, ‘주님의 만찬인가였습니다. 이 논쟁 안에서 화체설’, ‘기념설’, ‘공재설’, ‘영적임재설이라는 주장들이 자리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빈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찬을 제사로 가르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많은 성경구절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근거로 성찬을 제사가 아니라 주님의 만찬이라 주장했습니다.

성찬은 주님의 만찬입니다. 성찬은 은혜의 방편입니다. 말씀(설교)과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듯이 성찬도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듣고, 기도 하는 것처럼 성찬도 시행해야 합니다. 은혜의 방편을 은혜의 방편답게 사용해야 합니다. 매 주일마다 말씀을 듣는데, 성찬은 일 년에 거저 서너 번만 한다면, 그것은 은혜의 방편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처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찬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주제와 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제: 성찬을 회복함으로 예배를 파수하는 교회가 됩시다.

1. 변질된 성찬

2. 성찬의 원래 의미

3. 성찬의 능력

 

본론

1. 변질된 성찬

고린도교회는 성찬을 잘못 시행했습니다. 본문 21절은 고린도교회의 잘못이 무엇인지 잘 알려줍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21)

 

모든 교회가 그러하겠지만, 고린도교회도 부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함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경제적 차이는 교회생활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부한 이들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부자들은 미리 음식을 많이 가져왔고, 가난한 이들이 오기 전에 먼저 식사를 했습니다. 결국 생활이 넉넉지 못한 성도들은 공동식사에서 소외되었습니다. 한 성도는 시장하여 배가 고픕니다. 다른 한 성도는 미리 먹어 취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부유한 이들을 책망합니다. 22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22절 말씀은 아주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너희가 중략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본문은 분명히 빈궁한 자들너희를 대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유한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책망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잘못이 무엇인지 분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정리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만찬이 과연 성찬인가 하는 점입니다. 본문 21,22절에서 만찬이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잔치로 주로 번역되었습니다(23:6, 6:21, 14:12,16,17,24, 12:2).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성찬의 모습은 예배당에서, 예배 중에, 성도들이 함께, 준비된 떡과 잔을 받아먹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가 시행하는 성찬의 모습은 사뭇 다르게 보입니다. 사도시대의 교회는 성찬을 잔치처럼 음식을 풍성히 나누었습니다. 실제로 식사가 될 만큼 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를 성찬과 분리하여 애찬이라 주장합니다. 곧 공동식사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애찬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12).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만찬을 예수님의 성찬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만찬은 분명히 성찬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도시대의 교회가 행한 성찬의 모습은 마치 잔치처럼 음식을 풍성히 나눈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행하는 성찬은 매우 간소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예식이 변화된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튼 성찬은 풍요로운 식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책망하는 내용을 봅시다. 부한 성도들이 자신들의 양식을 먼저 먹고, 가난한 이들은 그 만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명백합니다. 기본적으로 성찬은 떡과 잔에 참여함으로 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한 몸이 되었음을 확증하는 표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곧이어 교회의 한 몸 됨을 강조합니다(고전 12).

부유한 이들이 교회의 정체성을 파괴했습니다. 성찬은 교회가 하나임을 드러내는 표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평균하게 받았듯이 교회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이를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책망은 이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미 성찬을 나누기에 너무나 큰 결함을 가졌습니다. 그 내용을 본문 17-18절이 말씀합니다.

성경은 이를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17)고 했고,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18)고 했습니다. 분쟁은 고린도교회 가운데 이미 누룩처럼 퍼졌습니다. 한 가족이 되어야 할 교회가 서로 분쟁합니다. 교회는 이를 속히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는 분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성찬을 나누려고 모입니다.

이미 성찬을 나누면 안 될 죄 가운데 있으면서 그 죄를 외면하고 억지로 성찬을 나누려는 완고한 모습입니다. 그 성찬조차 부유한 이들이 빈궁한 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나누어 먹습니다. 너무나 악한 행동입니다. 교회로서는 도저히 보여주지 말아야 할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성도 여러분.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성찬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경종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다른 성도를 미워하거나 질투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분파는 아니지만 행동이나 말로 편을 나누는 일은 없습니까? 성도들의 약점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여 둘 사이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행동은 없습니까? 삼삼오오 앉아 다른 성도를 험담 하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잘못된 모습을 갖고 있으면서 성찬에 참여하지는 않습니까? 만약 우리 가운데 이런 악한 모습으로 성찬을 행한다면, 우리는 큰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성찬에 참여한 성도가 힘을 쏟아야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하나 됨입니다. 매번 성찬에 참여하면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애쓰지 않고 무감각하다면 이 또한 책망 받을 일입니다. 성찬은 은혜의 방편입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은혜를 받으며, 그 받은 은혜를 따라 살아내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책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다른 성도를 대하는 모습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한 가족 된 성도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한 몸처럼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됩시다.

 

2. 성찬의 원래 의미

고린도교회의 잘못을 책망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성찬의 원 의미를 말씀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로부터 성찬의 원리와 방식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르친 성찬의 원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왔음을 명확히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23). 성찬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26:26-29). 모세시대에 지은 성막이나 솔로몬이 지은 성전도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는 대로 건축되었습니다(25:9, 대상 28:19).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무엇이든지 삼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는 신앙이야말로 참 신자가 취할 자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성찬을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잘못 행했습니다. 성찬의 모양은 있었으나 그 의미를 변질시켰습니다. 사도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을 한 번 더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고린도교회가 변질시킨 성찬을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이제 성찬의 원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본문 23절은 성찬이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제정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언제 잡히셨습니까? 예수님의 잡힘은 유월절과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26:17).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잡히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1:29).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은 생명과 사망을 구별하는 표였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있는 집의 장자는 살았고, 피가 없는 애굽의 장자들과 초태생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니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피 흘리심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대속입니다.

이어 사도 바울은 떡과 관련된 말씀을 합니다. 떡을 가지시고 축사(감사기도)하시고 떼어 주셨습니다. 그 떡에 대해 예수님은 친히 설명하셨는데,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떡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는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떡 자체가 예수님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떡은 그냥 떡입니다. 다만 예수님으로부터 떼어져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그 떡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위를 통해 믿음의 큰 내용을 담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수 사본에는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는 말씀에 찢겨진이라는 용어가 첨가되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찢겨진 내 몸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몸은 찢어졌습니다. 이는 매우 언약적인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에 짐승을 쪼개고 횃불로 나타나셔서 그 짐승 사이로 오고갔습니다(15:9-17). 짐승을 쪼갠 이유는 언약을 어길 경우 이처럼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짐승을 쪼갠 것은 언약 저주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떡을 떼어주셨습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찢어진 것을 보여 주듯이 말입니다.

떡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 언약의 저주를 받으신 몸입니다. 우리가 떡을 떼며 먹으므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룬 은혜의 현장입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죽으심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사도 바울은 성찬을 변질시킨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떡은 예수님의 몸이라고 가르칩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우리로 거룩한 백성이 되게 했으며, 교회가 한 몸이 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우리는 떡에 참여할 때,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죽었던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나 혼자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떡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도 동일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어 바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잔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25). 포도주 잔을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출애굽기 24:8절의 인용입니다.

출애굽기 19-24장은 시내 산 언약입니다. 언약을 맺기 위해서는 항상 특정한 절차를 따릅니다. 시내 산 언약도 절차를 따라 행했습니다. 그 절차의 마지막에 번제와 화목제물의 피를 단에 뿌리고 이어 언약서를 낭독한 후 나머지 피를 백성들에게 뿌립니다. 바로 그 피를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제물의 죽음은 사람의 죄를 대신 합니다.

언약의 피라는 말씀은 언약 맺음에 대한 확증이면서 동시에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을 주시면서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26:28).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바로 이 언약의 피 인데, 자기 백성들은 이 피를 통해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12절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피가 생명을 의미하고, 예수님의 피로 인해 새 생명을 얻었음을 확증하는 표가 잔을 받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포도주를 마십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피라고 합니다. 포도주는 언약의 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음료입니다(27:28, 49:9-12, 13:23-24, 25:6). 뿐만 아니라 포도주는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2:22-24, 4:1-4, 3:10, 3:11, 2:1-11).

성찬 상에서 잔을 받아 마실 때마다 성도들은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립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믿음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더불어 새 시대, 새 백성의 표를 즐김입니다. 언약의 복을 누린다는 확실한 표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런 성찬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킨 고린도교회를 책망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전하신 성찬의 원래 의미를 다시 한 번 강조함으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래서 본문 27절에서 바울은 아주 강력하게 질책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는 권면은 오늘 우리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소중히 대해야 합니다. 자칫 소홀히 대하여 죄를 범하는 자리에 이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찬의 원래 의미를 깊이 있고, 풍성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찬의 의미, 성찬의 유익, 성찬이 베풀어지는 순서, 성찬을 받기 전과 후의 성도의 자세 등등. 성찬과 관련된 수많은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찬이 은혜의 방편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찬을 많이 행해도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한낱 공허한 행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코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쪼록 성찬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성찬의 능력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잘못을 지적했고, 이어 성찬의 원래 의미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해결점을 제시합니다. 사도는 두 가지 권면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어서 최종적으로 마지막 한 말씀으로 권고합니다.

먼저 두 가지 권면 내용을 살피고, 이어서 사도가 덧붙여 최종적으로 권고한 말씀의 의미를 살피겠습니다. 두 가지 권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살피고 성찬에 참여해야 된다는 것(28), 둘째는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33).

자기를 살피고 성찬에 참여하라는 사도의 권면은 성도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성찬에 합당치 않게 참여했습니다(27). 그들은 분쟁 중에 있으면서 성찬에 참여했고, 그것도 모자라 부유한 이들은 먼저 취할 정도로 먹고 마셨으며, 가난한 이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평균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식탁에 참여해야 하는데, 이들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서로 편을 나누고 다투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를 살피고 성찬에 참여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둘째 권면은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권면은 좀 더 직접적입니다. 기다리지 않고 먼저 먹은 이들은 부유한 이들입니다. 그러니 이 권면은 성찬의 본질을 파괴한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조언입니다. 한 떡에 많은 사람이 참여함으로 한 몸임을 드러내는 표가 성찬입니다(고전 10:17). 그래서 교회는 성찬을 나눌 때마다 각 지체들이 하나님의 한 가족임을 증거하고 고백하며, 그렇게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부유한 이들은 먼저 취할 정도로 먹었기에 성찬의 본질을 무너뜨렸습니다.

사도의 두 가지 권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교훈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동시에 혹 성찬을 잘못 행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찬 참여 횟수가 많을수록 우리 신앙은 성숙해야 합니다. 은혜로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찬이 아무런 은혜도, 감흥도 없다면 깊이 자숙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할수록 옆자리에 앉은 성도와 한 몸처럼 되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나와 함께 교회된 성도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다면, 이는 주님의 상을 경홀히 여기는 행위입니다.

 

이제 사도가 최종적으로 권고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이 말씀 속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큰 가르침이 숨겨져 있습니다. 본문 17절에서 34절까지 사도 바울은 모이다는 용어를 여러 번 사용했습니다(17,18,20,33,34).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무엇을 위한 모임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모임의 내용을 말씀합니다. “교회에 모일 때에”(18)먹으러 모일 때에”(34)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모이는데, 그 모임이 교회가 되고, 동시에 성찬을 위한 모임입니다. 마치 모임이 두 가지 목적 때문처럼 제시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두 가지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의 모임을 지칭합니다.

흩어진 지체들이 모임으로 교회가 됩니다. 그렇게 모인 교회가 성찬을 나눕니다. 이 둘은 필연적으로 하나입니다. 교회는 성찬을 나누어야 합니다. 성찬을 나누는 모임은 교회입니다. 모임으로 교회가 되고, 교회가 됨으로 성찬을 나눕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임을 조금 뒤에 예배로 연결합니다. 고린도전서 14:26절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린도교회가 예배를 위해 모입니다. 그래서 찬송, 말씀, 계시, 방언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모임으로 예배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모임으로 교회가 되고, 모여 성찬을 나누는 고린도교회를 봅니다. 또한 고린도교회는 모임으로 예배합니다. 이 셋, 곧 교회 됨, 성찬, 예배는 서로 다른 의미와 각기 다른 행위이지만 본질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모임으로 교회가 되고, 그 교회는 예배하며 성찬을 나눕니다. 예배하는 공동체는 교회이며, 그 예배에는 반드시 성찬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성찬은 교회에서만 시행되어야 하고, 그렇게 성찬이 시행되는 현장은 예배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해 위에 오늘 본문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사도는 본문 34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내용은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입니다. 일종의 재판입니다. 모임으로 교회가 되었고, 그 교회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예배 공동체인 교회가 성찬을 훼손시켰습니다. 이는 교회의 본질을 훼손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단순히 성찬 하나를 잘못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본질과 예배를 타락시키는 죄를 범했습니다.

잘못 시행된 성찬은 교회의 본질을 파괴합니다. 성찬을 아무렇게나 하면 예배가 타락합니다. 성찬은 교회가 한 몸임을 드러내는 표입니다. 그 성찬을 모욕했으니 교회를 갈기갈기 찢은 것과 같습니다. 몸을 찢은 자들이 모여 예배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증한 행위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교회의 하나 됨을 찢는 범죄를 저질러 놓고 한 자리에 앉아 예배하는 일은 없습니까? 예배는 흩어진 지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하늘과 땅이 만나 즐기는 현장입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 모인다든지, 우리의 이름을 내기 위해 모인다든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예배한다고 모이는 것은 참으로 가증한 행동입니다.

성찬을 온전히 시행하는 것과 교회됨을 지키는 것은 예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배 따로, 성찬 따로, 교회됨도 따로,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셋은 서로 떨어져 독립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온전한 예배, 거룩한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됨과 성찬이 훼손되지 않도록 힘을 다해 지켜야 합니다. 예배 전쟁은 교회됨의 전쟁이요, 성찬을 파수하는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교회의 공적 예배 안에서만 행해야 합니다. 신학교나 선교단체, 심지어 사적 모임에서 성찬을 나누는 일은 올바른 성찬시행이 아닙니다. 교회 한 부서에서 성찬을 나누는 것도 심각한 성찬 훼손입니다. 심지어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공적 회원이 되지 않은 이들에게 성찬을 베푸는 행위는 큰 범죄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찬을 파수해야 할 교회의 책무입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 땅의 교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온전치 못하여 실수하고, 결함을 가지며, 죄와의 싸움에서도 종종 무너집니다. 완벽하거나 온전한 교회가 아니라 실수와 죄를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많은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교회로 모임으로 예배하며 성찬을 나눕니다. 성찬 없는 공예배가 없고, 공예배에는 반드시 성찬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성찬은 은혜의 방편이며, 눈에 보이는 말씀입니다. 성찬을 바르게 행함으로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교회가 됩시다. 성찬을 통하여 말씀이 더욱 왕성한 교회가 됩시다. 온전한 예배를 파수하는 참 교회가 됩시다.


설교 이해를 위한 질문

1.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찬 시행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잘못을 두 가지로 정리하여 말해 봅시다.

2.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성찬 시행을 통해 나의 성찬 참여에 어떤 약점이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3.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을 한 번 더 가르칩니다. 성찬의 떡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4. 성찬에서 포도주를 나눕니다. 성찬에서 주어지는 잔의 의미를 출애굽기 24:8절과 연결하여 설명해 보세요.

5. 사도는 고린도교회가 잘못 시행한 성찬을 교정합니다. 사도가 제시한 두 가지 처방은 무엇입니까?

6.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찬을 교정하면서 마지막으로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모인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교회와 성찬과 예배의 관계를 정리해 보세요.

7. 성찬은 은혜의 방편입니다. 나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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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1년 총회 주제 모범설교문(공지) kosin 2020.12.22 4081
13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7(기념 보석 호마노, 출애굽기 28장 9~12절) file kosin 2021.09.16 1666
12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8(하나님께서 정하신 합당한 예배, 히브리서 9장 1~5절) file kosin 2021.09.16 1685
11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9(성령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평강, 계시록 1장 3~6절) file kosin 2021.09.16 1477
10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9(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영혼을 쏟아 일하라, 엡 6, 5-9) file kosin 2021.10.26 1537
9 예배전쟁 10(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요4장) file kosin 2022.01.05 1470
» 예배전쟁 11(몸을 찢은 자들이 예배한다고 고전11장) file kosin 2022.01.05 1314
7 예배전쟁 12(찢어진 휘장 히10장) file kosin 2022.02.07 1458
6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10(떡상과 진설병, 레위기 24장 5~9절) file kosin 2022.03.04 1227
5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11(향단, 출애굽기 30장 1~10, 34~38절) file kosin 2022.05.19 890
4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12(물두멍, 출애굽기 30장 17~21절) file kosin 2022.05.19 924
3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10(예배자의 기쁨, 계시록 5장) file kosin 2022.09.06 860
2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11(하나님께 예배하며 영원히 다스림, 계시록 22장 1-8절) file kosin 2022.09.06 938
1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12(첫번째 크리스마스의 예배, 누가복음 1장 1-20절) file kosin 2022.09.0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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