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전쟁 12
⦁본문: 히브리서 10:19-25
⦁제목: 찢어진 휘장
서론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구약시대의 백성들처럼 예배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예배와 구약시대의 예배는 모든 것이 다릅니다. 구약시대 백성들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족장들,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 시대의 예배 모습은 지금 우리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 때의 예배 모습을 성경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혹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라고 말씀합니다(창 12:8, 13:4,18, 21:33, 26:25, 33:20, 35:1).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은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에는 성막이 예배의 중심이 됩니다(출 29:38-44, 레 1장-9장). 성막 예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드려야 합니다. 혹 다른 방식이나 다른 재료로 드리면 죽습니다(레 10:1-2). 물론 성막 외에 다른 장소에서 예배할 때는 나름대로의 규칙을 따라 단을 쌓아야 하고, 그곳에서 예배할 수 있습니다(출 20:22-26, 수 8:30-35, 삼상 7:15-17).
가나안 입성 후에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에서 예배해야 합니다(신 12:5-7). 솔로몬 성전이 건축된 후에는 바로 그곳이 예배 장소입니다(왕상 8:1-11,54-61). 그러니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예배처소를 만듦으로 예배를 타락시켰습니다. 물론 유다 백성들도 성전예배를 무참히 짓밟았습니다(사 1:10-17).
핵심 예배처소였던 성전은 백성들의 범죄로 완전히 무너졌고, 70년 뒤 재건되었지만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헤롯 성전이 약 40년이 넘는 동안 계속해서 건축 중이었고, A.D. 64년에 완공됩니다(요 2:20).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성전마저 A.D. 70년에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이후 모든 교회는 성전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전 예배가 완전히 새로운 예배로 변형되는 결정적 근거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배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깨닫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와 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제: 교회는 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전한 예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1. 찢어진 휘장이신 예수님
2. 예배자의 삶
본론
1. 찢어진 휘장이신 예수님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약 시대처럼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전도 없고, 제사를 집례 하는 제사장도 없으며, 그렇다고 짐승을 잡지도 않습니다. 세계의 모든 교회는 예배당에서, 정해진 시간에, 직분자들의 봉사로, 모든 성도들이 한 자리에 앉아 예배드립니다. 이러한 예배가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예배가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재현하는 현장임을 배웁니다.
본문 19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앞 내용이 이러한 결론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앞 내용은 8:1절부터 시작된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8장 이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옛 언약 아래에서 성막과 제사장의 사역을 통해 드러난 대속의 원리입니다. 성막은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히 8:5). 옛 언약은 새로운 언약으로 변화됩니다(히 8:10-13). 옛 언약 아래에서 성막은 피 흘림을 통하여 백성들의 죄가 속량됩니다(히 9:7). 이때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히 9:8). 예수님은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히 9:12).
율법은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히 10:1). 제사장이 날마다 율법을 따라 제사를 드리지만 제사 드리는 이를 온전케 하지 못하며,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히 10:1-2,11). 그래서 하나님은 한 몸을 예비하셨는데, 그 한 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히 10:5,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림으로 백성들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 10:10).
본문 19절에서 말씀하는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짐승 제사로는 죄를 한 번 밖에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짐승 제사는 날마다 지속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 한 번으로 모든 백성들의 죄를 완전히 제거합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은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어 20절에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길”이라 말씀하시고, 그 길에 대해 설명합니다. 곧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입니다. 이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의 기본적 구조를 알면 됩니다.
이미 우리가 알듯이 성막이나 성전은 두 개의 방이 있습니다. 첫째 방을 흔히 성소라, 둘째 방을 지성소라 부릅니다. 성소에는 등대, 떡 상, 향단이 있으며,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큰 커튼)이 있는데, 휘장에는 천사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 중 하루만 들어가는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언약궤는 두 천사가 세워졌는데, 하나님의 보좌라고도 불립니다. 그래서 지성소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라 하며, 성소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대표자인 제사장을 만나는 장소라 이해합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성소에 들어갈”이라는 말씀은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에서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휘장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하루 만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이 이제는 휘장이 열려 언제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전에는 짐승의 피라는 대속의 표와 대제자사장의 중보적 사역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사역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직접 들어가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여기 “담력”을 얻었다는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밝히 드러내다’는 뜻입니다(요 7:4,13,26, 10:24, 11:54, 16:25,29, 18:20). 둘째는 ‘담대하게’라는 뜻입니다(행 2:29, 4:13,29,31, 28:31, 고후 3:12, 7:4, 엡 3:12, 6:19, 빌 1:20, 히 3:6, 4:16, 10:35). 밝히 드러났기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신으로 담대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직접 들어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몸을 본문 20절은 “휘장”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마 27:51, 막 15:38). 예수님의 몸이 찢어졌습니다. 이는 매우 구약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어졌다는 말씀의 의미를 더 풍성히 이해하려면 구약의 언약 맺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맺거나,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약을 맺을 때에는 특별한 절차가 있었습니다. 그 절차 중 짐승을 쪼개는데, 이 행위는 아주 특별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에 3년 된 암소, 암염소, 숫양을 준비하여 중간을 쪼갰습니다(창 15:9-10). 하나님께서는 타는 횃불로 나타나셔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창 15:17).
짐승을 쪼개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예레미야 34장은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34:17-22절입니다.
“₁₇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₁₈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₁₉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₂₀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₂₁또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을 그의 원수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 ₂₂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 성읍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의 성읍들을 주민이 없어 처참한 황무지가 되게 하리라”
언약을 맺을 때에 양 당사자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는 것은 저주의 표입니다. 곧 약속을 맺고 난 뒤, 어느 쪽이든지 약속을 어기면 짐승이 쪼개진 것처럼 저주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적용해 봅시다. 오늘 본문 20절은 휘장이 예수님의 몸이라 했습니다. 성전의 휘장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가는 닫힌 휘장을 찢고 들어가는 길을 여셨다는 선언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에서 “새로운 살 길”이라 했습니다. 여기 “살 길”이라는 말씀은 ‘생명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언약을 어긴 쪽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언약을 파기한 쪽은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이며, 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언약을 어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약을 어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언약의 저주를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한 마디로 정리했습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죽음을 새 언약의 완성이라 부릅니다. 실제로 히브리서 10:15-18절은 성령님의 증거를 소개하면서 새 언약을 말씀합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언약의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생명의 길을 여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인해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예배를 즐깁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자기 백성들이 담대히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 하나님의 죽으심과 은혜로,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믿음을 따라 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 예배의 형식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더 이상 짐승으로, 제사장의 집례로, 피 뿌림으로, 성전에서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직분자들의 봉사로, 온 성도들이 함께 예배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죄의 공적 고백, 그리고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성찬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자비의 사역인 헌금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심으로 예배가 드려집니다. 이 예배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죽음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언약의 저주를 받으신 그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삼위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한 자리에서 가장 풍성하게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재현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우리 고신교회 헌법은 예배를 “언약적”이라고 했습니다(헌법, 예배지침, 제1장2조2항).
우리가 예배에 참여할 때, 언제나 삼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회상되며 재현되기를 바랍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하고 큰 구원의 역사가 예배의 순서와 요소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러니 예배 순서 하나하나에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세심히 발견하고 깨달으며 확인하는 예배자들이 됩시다. 특별히 찢어진 휘장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언제나 우리 가슴을 울리는 예배의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예배자의 삶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보좌에 직접 나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받은 백성들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곧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은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자는 예배자의 삶이 따릅니다. 본문 21절 이하는 바로 그 예배자의 삶을 말씀합니다.
본문 21절과 22절은 휘장을 여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합니다. 곧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라는 가르침은 사실 히브리서 3장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교회입니다. 히브리서 3:6절에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곧 교회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씀은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과 관련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수 9:23, 삿 18:31, 시 42:4, 52:8). 그러니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씀은 교회가 새로운 성막과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자주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고전 3:9, 딤전 3:15, 벧전 4:17).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대제사장이시며, 동시에 아들이십니다(히 3:1-6).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사환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봉사했습니다. 바로 그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본문 22절은 바로 이 점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예수님의 피 흘림을 통해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은 택하신 백성들의 전 인격을 온전케 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로 표현했습니다. 이어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라는 말씀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성도가 믿음을 가졌다는 증거로 물세례를 받습니다.
본문 22절 전반 절이 이런 의미이기에, 후반 절에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했습니다.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통하여 온전케 되었으니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자기 백성들에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주십니다. 여기에 성령님의 역사가 개입됩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새 언약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새 언약의 특징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돌 판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는 것입니다(히 10:16). 곧 성령님의 내주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성령과 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탄생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아가자”라는 말씀이 뒤 따라 나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자라는 말씀은 온전한 예배의 자리, 곧 보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히브리서 12장에서 확인합니다.
“₂₂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₂₃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₂₄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예배자들은 예수님의 몸인 휘장을 지나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함께 예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천상의 예배입니다. 비록 우리 성도들의 몸이 여전히 땅에 있지만 예배하는 시간은 천상의 하늘예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예배를 우리가 어찌 가볍게 여기겠습니까.
영광스럽고 복된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다음 3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얻어 의인이 된 성도들은 반드시 온전한 예배자가 되어야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3가지 권면은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모습입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23절).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된다는 권면은 히브리서를 읽는 당시의 성도들에게는 아주 요긴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를 읽는 당시의 성도들은 큰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 이어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고 권했습니다(히 10:32). 핍박과 환난에서 견디는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온전한 예배는 성도들이 어떠한 환난이나 핍박에도 능히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둘째, 서로 돌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24절).
칼빈 선생은 “서로 돌아보아”라는 말씀을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서로 협력해야 된다는 의미로 해설했습니다. 교회에는 늘 신분과 성별과 각기 다른 개성을 소유한 이들이 모입니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더불어 예배는 교회의 지체들이 함께 하나가 되어, 한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참 예배자들은 언제나 서로 돌보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이런 성도들이 됩시다.
셋째,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25절).
모이기를 힘써야 된다는 말씀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교회로 모임이며, 예배로 모임입니다. 교회는 모임으로 교회됨을 확증하고, 모임으로 예배합니다(고전 11:18,20,33, 14:26). 그러니 교회는 예배와 성찬을 위해 모임으로 온전한 교회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은 지체들을 교회되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교회는 그 보좌 앞에서 예배합니다. 그러니 예배는 하늘 보좌에서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홀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천만 천사들과 장자들의 모임(총회)이 함께 합니다. 예배는 이렇게 영광스럽습니다. 예배의 영광을 느끼며, 누리고, 깨닫는 성도들, 교회가 됩시다.
이렇게 예배에 참여한 성도들은 환난과 고난 중에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예배가 땅 위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또한 예배자는 홀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지체들과 함께 예배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예배자는 지체들을 사랑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나아가 더 풍성한 예배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배를 폐하는 자리에 이르지 않아야 합니다.
결론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교회는 하늘의 보좌로 직접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믿음을 성도들의 마음에 심으시고, 그 표로 물세례를 받게 합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으며,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예배를 더욱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예배자들이 됩시다. 그리하여 예배를 파괴하려는 어떤 공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배를 파수하는 교회가 됩시다.
⦁설교를 이해를 위한 질문
1. 족장들이 드린 예배를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며, 시내산 언약과 솔로몬 왕 시대의 예배 장소와 예배 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간략하게 말해 봅시다.
2. 본문 19절은 “그러므로”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히브리서 8:1절부터 주신 말씀의 결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8:1절 이하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봅시다.
3. 본문 20절은 성전의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특권은 무엇입니까?
4. 언약에는 항상 정해진 절차가 있습니다. 그 절차 중 짐승을 쪼개는 행위가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어떻게 연결됩니까?
5.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에서 큰 제사장이십니다. 그 제사장으로 인해 성도들은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6. 예배의 영광스러움을 본문 22절과 히브리서 12:22-24절을 연결하여 설명해 보세요.
7. 참예배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될 세 가지 권면은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예배 모습과 예배자의 삶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