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배순서 해설
안재경 목사(온생명교회)
아래의 공예배순서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와 ‘웨스트민스터 예배지침’에 근거하되, 대륙의 개혁교회 예배순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만든 예배순서입니다. 이 예배는 고신총회 헌법 ‘예배지침’(제3장 주일예배)에 그 순서가 나와 있기도 합니다. 예배를 공연에 비기는 경우도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의 분명한 흐름을 가지고 예배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십니다(God calls us)
(↑) 하나님을 부름(시편 124:8)
(↓) 하나님의 인사(로마서 1:7; 요한계시록 1:4-5)
(↑) 신앙고백(사도신경, 니케아신경)
(↑) 영광송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God cleanses us)
(↓) 십계명(출애굽기 20:2-17; 신명기 5:6-21)
(↑) 공적회개
(↓) 사죄선언(히브리서 7:24-25; 요한복음 3:16; 디모데전서 1:15;
사도행전 10:43; 요한일서 2:1-2)
(↑) 감사송
(↑) 대표기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God insturcts us)
(↓) 성경봉독
(↑) 조명위한 기도
(↓) 설교
(↑) 응답송
(↓) (↑) 세례 (필요시)
(↓) (↑) 성찬식 (한 달에 한번)
하나님이 보내십니다(God commissions us)
(↑) 헌금
(↔) 성도의 교제
(↑) 마침송
(↓) 강복선언(민수기 6:24-26; 고린도후서 13:13)
하나님이 부르십니다(God calls us)
예배의 첫 번째 파트를 ‘하나님이 부르십니다’로 부를 수 있습니다. 신자는 개인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예배를 통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부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불러내심이 예배를 시작합니다. 이 파트에는 예배부름, 기원, 신앙고백, 영광송의 순서들이 있습니다.
(↑) 하나님을 부름 - 누가 누구를 부르는가?
예배의 첫 순서는 ‘예배부름’입니다. ‘예배초청’이라고도 하는데, 전통적으로 서방교회는 ‘Votum’이라는 라틴어로 이를 표현했고, 종교개혁 이후에도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를 위해 중세시대에서 내려오던 시편 124:8을 사용했습니다. 원래 이 Votum은 헌신이나 서약을 할 때 사용하던 세속용어인데, 교회가 그 용어에 세례를 주어 사용했습니다. ‘예배부름’, ‘예배초청’의 화살표 방향을 보면, 마치 교회가 하나님을 부른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먼저 불러 모으셔야 비로소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회중이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름을 전제하고서 회중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충성을 맹세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회중의 부름을 불러냅니다. 이런 시작은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하듯이 “묵도함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문구보다 훨씬 더 언약적입니다.
(↓) 하나님의 인사 - 왜 하나님께서 인사하시는가?
회중이 삼위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기원’을 해 주십니다(로마서 1:7, 고린도전서 1:3, 요한계시록 1:4-5). 바울 사도가 교회를 향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어떤 교회들에서는 목사가 회중과 더불어 인사를 주고받는다거나(목사: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회중: 목사님과도 함께 하시길), 신자들끼리 인사하도록 유도하는 경우가(“우리 서로 인사합시다.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등) 많습니다. 이런 인사보다 하나님께서 예배 인도자를 통해 말을 걸어오시고, 손을 내미시고, 복을 선언해주신다는 것이 이 순서의 주된 의미입니다. 특히 이 순서는 예배 마지막 순서인 ‘강복선언’과 짝을 이루는 만큼 동일하게 복을 선언해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 선언이 예배 시작과 끝을 감싸고 있습니다.
(↑) 영광송 -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찬송이란 무엇인가?
예배에 찬송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찬송 자체가 하나의 예배이기도 합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수장된 것을 보고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노래했습니다(출애굽기 15장). 흥미로운 것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마지막 재앙을 언급하는 요한계시록 15장에서 어린양으로 인해 최종 승리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를 노래가 흘러간 옛 노래인 ‘모세의 노래’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예배 첫 파트에서 회중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새 찬송가 3장, 4장, 7장 등을 보면, ‘글로리아 파트리’(Gloria Patri)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이는 초대교회가 불렀던 성부께 영광을 돌리는 영광송을 뜻합니다. 이런 영광송을 부르다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로 돌아가 초대교회 신자들과 하나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배부름, 기원 그리고 회중의 첫 번째 찬송(영광송)을 ‘예배 시작의 세 가지’라고 부릅니다.
(↑) 신앙고백- 고백이 꼭 필요한가?
‘예배 시작의 세 가지’ 사이에 신앙고백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고백을 왜 예배 시작부분에 넣을까요? 기독교 신앙이 마음으로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是認, 헬라어 호모로게오, 비교, 마태복음 10:32; 누가복음 12:8)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역사를 살펴보면, ‘신앙고백’이 예배 이곳저곳을 떠돌았는데 그래서 ‘예배의 집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은 뒤로 미루어 놓기보다 하나님의 인사를 받은 바로 다음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고백의 문구는 성경에 없는 것이니만큼 ‘오직 성경’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공교회성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사도신경(또는 니케아 신경)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고백은 컴퓨터의 ‘패스워드’와 같은데, ‘열려라 참깨’처럼 하나님의 궁전문을 힘껏 열어 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영광송과 신앙고백을 한 다음에 회중은 착석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God cleanses us)
예배의 두 번째 파트는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로 부를 수 있습니다. 예배하는 회중은 이미 용서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회중은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은 것처럼, 죄의 용서를 처음으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언약의 갱신이기에, 이 파트는 우리가 스스로의 의에 근거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개인적으로 매일 용서를 구했지만, 이 시간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파트에는 십계명낭독, 공적회개, 사죄선언, 감사송이 있습니다.
(↓) 십계명 - 왜 율법을 낭독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파트를 이끌고 있는 순서가 ‘십계명’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 마틴 부써로부터 배워서 이 십계명을 예배 때 도입했습니다. 십계명은 구약시대의 율법인데, 왜 신약교회가 예배 때 십계명을 교독(낭독)해야 할까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십계명의 가장 중요한 용법을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설교조차도 율법선포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십계명이란 말보다 ‘언약의 열 가지 말씀들’이라는 표현을 좋아했습니다. 십계명은 구약의 율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언약 백성들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십계명을 선포함으로써 우리는 구약교회와의 연속성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대륙의 개혁교회는 주일오전예배 때는 구약의 언약법전인 십계명을, 그리고 주일오후예배 때는 신약교회의 고백인 사도신경을 배치함으로써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고백합니다.
(↑) 공적회개 - 왜 또 다시 회개기도를 하는가?
예배 인도자가 십계명을 읽고 나면 온 회중은 그 말씀으로 자신들을 비추어 회개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예배 도중에 회개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가지는 것이 합당할까요? 중세교회는 미사에 참여하기 전에 사제에게 사적인 고해(마음으로의 통회, 입으로의 고백, 행위로의 보속)를 해야 했습니다. 종교개혁은 이것을 예배에서 공적으로 회개하도록 바꾸었습니다. 예배 때의 공적회개란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 알아듣도록 비밀한 죄를 공개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공적인 것으로 회개의 기도문을 같이 읽을 수도 있고, 신자 각자가 자신의 죄를 개인적으로 조용하게 회개하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형식이 되었든지 예배하는 하나님의 회중이 공적으로 회개하는 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사죄선언 - 고해성사의 잔재가 아닌가?
공적회개의 순서를 가지는 것은 예배 인도자인 목사가 ‘사죄선언’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듣기 위함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중세교회의 고해성사의 잔재가 아닌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개혁자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와서 이 순서를 예배에 도입하고자 했을 때 시의회가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이후로 대부분의 개혁교회 내에서도 이 순서는 자취를 감춥니다. 하지만 개혁자 루터가 고해성사를 거부하면서도 사죄선언의 중요성 때문에 고해제도를 유지한 것이나 개혁자 칼빈이 공예배 때 이 순서를 도입한 것은 바람직합니다. 한국교회와 같이 사죄의 확신을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방식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이 순서가 필요합니다. 개혁자들은 이 순서에 조건을 달아서 용서를 선포했지만, 우리는 성경구절(히브리서 7:24-25; 요한복음 3:16; 디모데전서 1:15; 사도행전 10:43; 요한일서 2:1-2 등)을 그대로 읽음으로써 용서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좋습니다.
(↑) 감사송 - 어떤 감사찬송도 상관없을까?
용서의 파트에서 우리는 두 번째 찬송을 합니다. 교회가 이 부분에서 노래한 곡을 전통적으로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이라고 부르는데,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가사의 곡입니다. 새 찬송가는 632장에 딱 한 곡 수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이 이 찬송과 함께 자리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십계명을 회개기도와 사죄선언 다음에 배치했습니다.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율법이 용서받은 죄인이 어떻게 감사하며 살 것인지도 보여준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트라스부르 예식서를 보면 십계명을 노래하는 동안 각 연이 마칠 때 이 키리에 엘레이손을 후렴구처럼 불렀는데, 이것의 기원은 주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약성경에도 이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마태복음 15:22, 25; 20:20, 30 등). 새 찬송가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노래하는 찬송들이 많기 때문에, 비단 키리에 엘레이손 뿐만 아니라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송을 잘 선별해서 불러야 합니다.
(↑) 대표기도 - 누가, 무슨 내용으로 기도할 것인가?
예배인도자인 목사는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를 인도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 기도를 ‘대표기도’라고 부르며, 주로 장로들이 합니다. 대륙의 개혁교회에서는 설교 후에 이 기도순서를 넣어 ‘기독교의 모든 필요를 구하는 기도’(A Prayer for all the needs of Christendom)라고 부르며, 목사가 회중을 대표해서 기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명하는 동시에 기독교회가 구할 수 있는 모든 내용들을 다 포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를 ‘목회기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신자들은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배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God instructs us)
예배의 세 번째 파트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로 부를 수 있습니다. 예배 시작부터 하나님의 임재가 넘쳐나며, 모든 순서들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보여줍니다. 이 세 번째 파트에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자를 통해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 해명해 주십니다. 물론 모든 예배 순서가 설교를 중심으로 꿰맞추어져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의 사역자를 통해 회중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파트에는 성경봉독, 조명기도, 설교, 응답송이 있습니다.
(↓) 성경봉독 - 교인 중에 성경을 봉독해도 되는가?
설교 직전에 성경봉독을 합니다. 우리는 설교할 본문만 낭독하는데, 교회사에서 성경봉독은 성경 전체와 관련을 맺습니다. 이것을 렉시오나리(Lectionary)라고 불렀습니다. 회당에서는 율법과 선지서 두 부분을 낭독했고, 이후 신약교회에서는 구약의 말씀뿐만 아니라 복음서와 서신서의 말씀도 낭독했습니다. 교회절기에 맞추어 정해진 성경본문을 읽기도 했습니다. 또한 어떤 특정한 본문을 정해서 연속으로 읽기도 했습니다. 설교 직전의 성경낭독은 설교할 본문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의 낭독입니다. 이는 설교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설교와 상호보완적입니다. 성경본문은 하나님께서 회중 전체에게 주신 말씀이기에 신자 중에서 잘 준비하여 봉독할 수도 있습니다. 회중의 한 사람이 성경을 낭독하면, 그 말씀이 온 회중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서 있기는 어렵기 때문에 성경봉독의 시간만큼은 서서 듣는 것도 고려해볼 만합니다(느헤미야 8:5).
(↑) 조명기도/찬송 - 찬양대의 찬송이 왜 있는가?
성경봉독 후에는 바로 설교로 들어가는 것도 좋고, 말씀을 받기 위한 다른 간단한 순서를 넣는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설교할 목사가 말씀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를 하거나 온 회중이 말씀을 감사함으로 받겠다는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찬양대의 찬양순서가 이 곳에 자리합니다. 따라서 찬양대의 찬송은 가능한 그 날의 설교와 관련된 것이 좋지만, 현실적으로는 고려하기가 힘든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찬양대의 찬송은 공연을 위함이 아니라 온 회중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중세교회는 회중들에게서 찬송을 빼앗아 사제들의 전유물로 만들었지만, 종교개혁은 다시 회중들에게 찬송을 돌려주었습니다.
(↓) 설교 -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하시는가?
종교개혁은 공예배에서 설교를 가장 중요한 순서로 봅니다. 특히 대륙의 개혁교회는 설교단을 아주 높은 곳에 배치함으로써 이를 잘 드러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의 입장에서는 설교 이전의 순서들을 대충 지나보내고 설교에 집중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설교 이전의 순서들은 설교를 위해 준비하는 순서들로 보기보다는 그것 자체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점층적으로 표현해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설교시간에 목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입이 되어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고 적용합니다. 설교는 성경공부도 아니고 강연도 아닙니다. 개혁자들은 설교에 ‘예언적’이고 ‘체질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르고 깊고 풍성하게 선포된 설교는 항상 효력을 가져온다고 확신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봉독부터 이미 시작하며, 그 본문이 적용을 제한하며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 지금도 말씀하신다는 것을 아는 회중은 참으로 복됩니다.
(↑) 응답송 - 아멘으로만 노래해도 되지 않을까?
공적인 말씀의 선포 후에 회중은 그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감사하면서 ‘응답송’을 합니다. 이때 찬송은 설교의 내용을 묵상하는 찬송이면 좋습니다. 매주일 설교할 본문을 선택하는 일도 힘든 일이지만, 설교 후에 부를 찬송, 응답송을 선택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설교에 딱 맞아 떨어지는 찬송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때는 그냥 ‘아멘송’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새 찬송가는 640장부터 아멘송입니다. 두 번의 아멘, 세 번의 아멘, 네 번의 아멘, 일곱 번의 아멘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아멘이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선포해주신 말씀에 온 회중이 많은 물소리와 같은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 (↑) 세례나 성찬 - 자주 시행할 수는 없을까?
성례에 상향성과 하향성의 두 화살표로 표시한 것은 성례가 하나님의 약속을 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마침내 이루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감사함으로 그 약속을 받아 하나님께 충성을 고백합니다. 성례는 약속의 말씀을 인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 후에 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것을 확증하는 성례이기 때문에 잘 준비하여 진행해야 합니다. 세례의 방식(세례냐, 침례냐)보다 중요한 것은 유아세례입니다. 언약의 자녀가 예배에 참석하는 첫 주일에 세례를 베푸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자녀가 인침을 받는 것을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능한 예배에서 성찬식이 자주 베풀어져야 합니다. 성찬은 신자 개인의 믿음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하나됨을 구현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십니다(God commissions us)
예배의 마지막 파트는 ‘하나님이 보내십니다’로 부를 수 있습니다. 회중은 이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헌신을 표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주간 동안 함께 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백성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들을 불러 모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삼위 하나님께서도 백성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그들과 함께해 주실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예배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예배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 파트에는 헌금, 성도의 교제, 마침송, 강복선언이 있습니다.
(↑) 헌금 - 헌금시간이 왜 사라졌는가?
신자는 예배를 통해 다양한 헌신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만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서도 헌신을 표현합니다. 흥미롭게도 헌금은 라틴어로 ‘콜렉타’(Collecta)라고 불립니다. 이는 원래 ‘모이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즉 예배에 모인 회중이 개인적으로 조용히 기도한 후에 사제 주위로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용어가 헌금 순서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단어의 영어번역은 컬렉션(Collection)입니다. 예전에는 ‘연보’라는 말을 종종 썼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거두는 기부금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 집중적으로 언급됩니다. 연보와 관련된 직분이 집사직인데, 이는 식탁봉사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나왔듯이, 신자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직분입니다. 개혁한 교회는 집사를 ‘자비의 봉사자’라고 부르고, 헌금순서를 ‘자비의 봉사’라고 부릅니다. 요즘 교회들은 예배당 입구에 헌금함을 설치해 놓지만, 그보다는 예배시간에 회중의 헌신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헌금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 성도의 교제 - 광고가 예배 안에 들어와도 되는가?
예배 마지막에 ‘성도의 교제’라는 순서를 넣을 수 있습니다. 소위 ‘광고’ 순서로 알려져 있지만, 광고를 성도의 교제라는 바꾼 것은 이 순서가 신자 개인이나 가정사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알리기보다는 성도의 교제라는 공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시간에 교회가 공적으로 기도할 내용이라든가, 새로운 신자를 소개한다든가, 먼 곳으로 이사하여 이명하는 교인들에게 인사하는 시간을 주는 것 등이 필요합니다. 광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서가 아니기 때문에 예배 시작 전이나 예배를 마친 후에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만일 예배의 시작과 마침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길다고 불평하는 분들이 광고를 위해서는 10분 이상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광고시간은 가능한 짧은 것이 좋습니다. 광고조차도 공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 마침송 - 진군가로 생각할 수 있는가?
예배의 마지막 부분에도 찬송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으로 파송하시기 직전에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어서 하나님께 나아갔던 신자들은 이제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오후예배(혹 저녁예배)가 있기는 하지만, 예배의 마침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과 관련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굿 바이, 잘 가!’ 하시면서 신자들을 배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신자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십니다. 예배 마침 찬송은 하나님의 군대인 신자들이 세상으로 힘있게 행진하는 진군가입니다. 이 곡은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회중에게 익숙한 곡을 선곡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배 마침 찬송을 ‘주기도송’으로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물론 성찬식에서 주기도문을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 강복선언 - 예배의 끝인가, 아니면 절정인가?
예배의 마지막 순서는 강복선언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축도’(祝禱)라는 용어로 통일해서 사용합니다. 축도라는 것은 ‘복을 빌어주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대개는 민수기 6장 24-26절의 대제사장의 복선언,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삼위 하나님의 복선언을 사용합니다. 이 순서는 기도가 아니라 목사가 하나님의 복이 내리기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복선언’이라는 표현이 좋겠습니다. 이 강복선언을 상징하는 것이 목사가 두 손을 높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를 통해 한 주간 세상에서 살아갈 신자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동행을 약속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두 손을 들고 복을 주시면서 승천하신 장면(마가복음 24:50-53)이 이 순서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계시됩니다. 강복선언은 예배의 마지막 순서이지만, 대륙의 개혁교회의 지적처럼, ‘예배의 절정’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