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경계주일 설교문(참고) 이단대책위원회
디모데후서 1:9-18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은행은 우리 돈과 재산을 맡아서 지켜주는 곳이다. 고대는 귀중한 물건을 믿을 만한 친구나 신전에 맡겼다. 이때 부탁받은 친구나 신전은 맡긴 것을 지키는 일을 신성한 의무로 여겼다. 13-14절은 그런 뜻에서 사용한 ‘지키라’ ‘부탁한’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은 ‘바른말’(13절), ‘아름다운 것’(14절)이다. 이는 곧 ‘복음’(8, 10-11, 2:8-9)이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부탁하신 내용이다.
1. 바른말,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첫째,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가 지키도록 부탁받은 것은 ‘바른말’(13절)이다. 왜 ‘바른말’이라고 할까? ‘바른’은 의학용어로, ‘건강한’ ‘건전한’을 뜻한다. 이는 영혼을 병들게 하고 망하게 하는 다른 교훈과 달리 영혼과 믿음과 생활(개인, 가정, 사회)를 건강하게 하고 건전하도록 만들기에 부친 말이다. 목회서신을 보면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온다(딤전 1장, 딤전 6:3, 바른 교훈/경건에 관한 교훈).
둘째, 지키도록 부탁한 것은 또 아름다운 것이다(14절). 그 내용이 우리 구원에 관한 것이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주신 것이고,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9절). 9-10절은 복음을 요약했다. 장엄하게 파노라마처럼 전개하되 세 가지 구분하여 제시했다. 먼저, 구원의 주체를 말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사’라 시작한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신 결과다. 구원의 동기를 말한다. 즉 우리의 행위대로 아니라,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구원하셨다. 또 구원의 결과(열매)를 말한다. 곧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참고. 고전 15:53-55, 썩지아니함, 죽지 아니함을 입겠고).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결과 우리는 사망을 이기고 생명 얻었다.
셋째, 그런데 교회역사를 보면 여기서 벗어날 때가 더러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5가지 ‘오직’(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께 영광)으로 이단을 분별했다. 이단은 5가지 <오직>의 복음을 약화시켰다.
우리 고신교회와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은 바른말과 아름다운 것 곧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한국교회에 태동되었다. 고신총회는 일찍이 표준문서(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 교회정치, 예배모범, 권징조례)를 채택하고(1969년), 교단 이념을 확정했다(1976년): “신구약성경과 장로회표준서들에 의한 개혁주의 신학을 따라 믿고 전하고 생활한다.” 진리운동으로 시작했기에 고신교회 지난 70년은 진리를 거스르는 이단과 싸웠다. 진리운동은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가르치는 것과 함께 이를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책망하는 일을 병행하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디도서 1:9).
2. 바른말을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바른말에서 벗어나면 영혼과 생활이 병들고 믿음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2:16-17을 보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둘째, 말세에 사람들이 바른말과 진리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허탄한 이야기와 신화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말세의 특징(딤후 4:3-4)이다. 본 서신의 배경이 되는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다음과 같이 이들이 있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는 자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딤후 2:16-18)하는 이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하는 자들(딤전 4:3-5).
셋째, 거짓 형제의 탈을 쓰고 ‘가만히’ 들어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갈 2:4, 벧후 2:1, 유 1:4).
넷째, 바른 교훈을 떠나게 하는 것이 사탄의 미혹이기 때문이다(딤전 4:1). 악한 자 마귀에서 우리를 지키시도록 기도하며 모든 영을 시험해야 한다.
3. 어떻게 바른말, 아름다운 것을 지킬 수 있을까?
첫째, 본받아 지키라(13절)
이는 자신이 본이 되어 그 바른말을 지키라는 뜻이다. 그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다(13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믿음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은 그리스도로 인해 나타나야 할 사랑을 가리킨다. 이단에 빠진 배경을 보면 교회에 사랑이 없을 때 빠진다. 사랑이 없이 바른말을 지킬 때 가슴이 냉냉해지고 비판과 정죄의 분위기가 된다. 바리새인은 사랑 없이 바른말을 지키려고 했다. 중세교회도 가혹한 종교재판과 처형을 통해 바른말을 지키려고 했다. 다른 말을 하는 자에게 악담과 저주를 퍼붓고 과도한 권징을 시행했다. 사랑 없이 바른말을 지키려고 한 예는 아주 많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책망하고 징계할 때 사랑과 온유, 예배의 정신으로 하기를 바란다. 다음 세대에 바른말을 전수할 때 사랑으로 하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둘째, 성령으로 지키라(14절).
그 이유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는 것은 사람의 힘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가는 곳에 복과 함께 고난(수치/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고 두려움이 생길 수 있다. 특히 고대 사회는 수치 문화가 특징이었다. 수치를 큰 모욕으로 생각했다. 유교권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복음으로 인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는 것은(5, 12절)은 오직 성령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다(8절). 오직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예수를 주라 할 수 있고 아름다운 복음을 지킬 수 있다(고전 12:3). 그러므로 성령을 구해야 한다.
셋째, 생명을 주께 의탁(부탁)하라. 주께서 능히 내 생명을 지키실 줄을 확신하라(12절).
4. 결론: 지킨 자와 지키지 못한 자의 실례를 보며 결단하자(15-18절)
성경의 두 실례(바울을 버림으로 바른말을 지키지 못한 두 사람과 바른말을 지킨 오네시보로)를 보며, 나는 어떤 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선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