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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7)

설교제목/ 찬송: 새 노래가 흘러 넘치는 예배 


설교본문/ 출애굽기 15:1-5; 고린도전서 14:26

주제문장/ 예배때 공교회적인 신앙고백을 새 노래에 담아 찬양한다.

설교개요/ 구약시대부터 회중은 구원의 은혜를 새 노래로 찬송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로 인해 찬송이 터져 나왔는데 중세교회가 찬송에서 회중을 배제했기에 종교개혁은 회중의 입에 찬송을 돌려 주었다. 찬양대와 악기문제는 신중하게 살펴서 예배를 도와야 한다. 예배에는 여러 번의 찬송이 있다. 불러 예배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찬송하고, 사죄선언의 말씀을 듣고 찬송하고, 주신 말씀을 새기면서 찬송하고, 성찬식에서도 찬송하고, 하나님이 세상으로 보내실 때 찬송한다. 하나님께서 송영을 올려드리는 찬송은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고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야 한다.
 

■ 출 15 : 1 – 5

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5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 고전 14 : 26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 계 15 : 2-4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예배 때 제일 힘들고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음악, 즉 찬송의 문제가 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찬송도 음악이기 때문에 세대차이가 가장 민감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찬송이 더 어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독일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예배를 해도 찬송시간이 15분 이상 넘으면 안된다는 제한을 두기도 했답니다. 찬송을 하면 비말 등이 튈 수 있어서 코로나 감염의 위험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온라인으로 예배해야 할 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찬송일 것입니다. 목소리로만 찬송해도 좋겠지만 잘 하지 않으면 엉망이 될 것이기에 음원을 찾아서 틀어놓고 함께 찬송해야 할텐데 웬만한 컴퓨터 설비를 잘 갖추지 않으면 그것을 잘 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2012년에 있었던 제30회 런던 올림픽 폐막식 장면을 꼼꼼히 본 적이 있습니다. 전 세계가 어우러진 올림픽 폐막식의 주요 메뉴는 문화를 포장하기는 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음악이었습니다. ‘음악이 빠지면 아무 것도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요한 행사나 예식에서 음악이 빠지면 정말 안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예배에서 음악이 빠지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배에 찬송이 없어서 되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음악에 대해, 찬송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씁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의 음악을 주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음악을 주도하던 시절이 지났으니 교회의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교회가 어떤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요? 교회음악으로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회중은 구원의 감격을 새 노래로 부른다

    오늘 설교본문인 출애굽기 15장 말씀은 홍해에서 구출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최초로 회중찬양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후에 이 찬송은‘모세의 노래’라고 불립니다. 모세가 가사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곡조는 어떤 곡조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편 표제에 곡조에 대한 언급들이 있는데 모세가 어떤 곡조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모세가 가사만 짓고 누이 미리암이 곡조를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세가 가사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구원의 일을 경험하고서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개인적인 특정하고 내밀한 경험에 근거해서 찬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전체에게 행하신 위대한 구속사역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의 가사를 읽어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 마지막 본문인 요한계시록 15장에 보면 하늘로부터 임하는 마지막 재앙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모세의 노래가 다시금 언급됩니다. 하나님의 재앙을 벗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를 또한 ‘어린 양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 양은 유월절 어린 양을 성취하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은 모세가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완성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시키십니다. 그 가사를 다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지막 날에 부를 노래는 모세의 노래의 변주곡, 어린 양의 노래의 변주곡입니다. 가장 오래 기억될 노래, 영원히 불릴 노래가 바로 이 가장 오래되었던 모세의 노래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새 노래’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것을 이 모세의 노래와 견주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새로운 노래를 하는 자들입니다. 새로운 노래라고 하니까 최신의 가사와 곡조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옛 일, 처음부터 하나님이 하신 일을 리메이크해서 부르는 것이 새 노래입니다. 모세의 노래는 흘러간 추억의 옛 노래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주되는 새로운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구약시대만의 노래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될 새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은혜를 늘 새롭게 상기하고 노래하면 그 노래가 새 노래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해 내어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적으로 이루어져가는 구원입니다.

교회에서 예배음악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갔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고 난 다음에 예배음악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예배음악의 창시자는 다윗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성전을 짓겠다고 할만큼 하나님을 향한 경배에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그는 레위인들을 조직해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자들로 세웁니다. 다윗은 성전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장소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은 많은 시편들을 지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개인 경험을 노래한 시들을 교회의 찬송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맺은 영원한 왕권의 언약이 작용하여 아름다운 시와 노래가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의 ‘시편’입니다. 구약교회는 그 시편을 노래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왕이심을 노래했습니다. 그때부터 시편은 교회의 주요한 예배음악이 되었습니다.
    교회음악은 신약 시대에도 결코 쇠퇴하지 않습니다. 오늘 둘째 본문인 고린도전서 14장 26절 말씀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이 본문은 신약교회의 예배 요소들을 소개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가장 먼저 찬송시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가르치는 말씀과 계시, 즉 설교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방언과 통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찬송시가 가장 먼저 언급되어 있다는 것은 신약교회가 처음부터 시편을 노래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멜로디를 사용하여 회중이 유니송으로 불렀을 것입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놀라운 구원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경험하였기에 다양한 노래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신약교회가 시편만을 고집하지는 않았습니다. 서신서들에 보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이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합니다. ‘시’는 시편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구원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령한 노래들’은 모든 종류의 노래를 신령한 방식으로 부른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노래의 장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클래식이냐, 랩이냐, 팝송이냐 하는 장르 구분이 아닙니다. 시, 찬송 그리고 신령한 노래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이미 신약교회가 노래했던 찬송의 다양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는 마리아의 찬가(눅 1:47-55, 마리아의 찬가 첫 라틴어 글자를 따서 Magnificat이라고 부른다)며, 제사장 사가랴의 찬가(눅 1:68-79, 사가랴의 찬가 첫 라틴어 글자를 따서 Benedictus라고 부른다)를 불렀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11절까지의 그 유명한 구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하는 구절도 초대교회에서 불렀던 찬송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개혁한 교회는 회중찬송을 회복했다

    중세가 되면서 교회음악은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교회음악이 퇴보의 길로 접어듭니다. 예배를 드릴 때 찬송은 오직 성직자들이 성가대를 이루어서 노래했습니다. 찬양대 학교가 곳곳에 세워졌고, 이런 학교들에서 음악을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이들이 예배음악을 장악했습니다. 예배찬송이 전문가들과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된 것입니다. 게다가 찬송가사는 오직 라틴어였기에 회중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주후 8세기 이후에 악보가 생기고 아름답고 웅장한 멜로디가 붙여진 ‘그레고리안 찬트’가 만들어지면서 예배는 더더욱 노래중심의 예배가 되어갔습니다. 예배하는 회중은 가사는 모른 채 끊임없이 반복되는 운율에 자신들의 귀와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세기에 회중은 찬송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습니다. 예배 때 그들의 눈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예배당 안에는 보이는 요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귀는 반쯤 열렸고, 그들의 입은 완전히 닫혔습니다.       
    예배음악에 있어서 종교개혁이 한 중요한 기여는 성가대, 즉 성직자들이 전유한 찬송을 회중의 입에 되돌려 준 것에 있습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당시 유행하던 곡조에 자신이 지은 가사를 실어 회중들이 부르게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한편 종교개혁자 칼빈이 한 중요한 기여는 경건한 작곡가를 고용하여 시편 150편 전체에 곡을 달아서 예배 때 회중이 부르게 했습니다. 이 곡을 ‘제네바 곡조’(Genevan Psalter)라고 부르고 개혁교회들에서는 이 시편곡이 예배찬송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합니다.
    개혁한 교회는 회중찬송을 회복했습니다. 예배 때의 찬송은 모든 회중이 다같이 찬송해야 합니다. 특정한 그룹이나, 특정한 이들이 찬송을 주도하고 나머지 회중은 구경꾼dl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당장 찬양대 문제를 거론하시겠지요? 어느덧 한국교회에서는 찬양대가 없는 교회, 특별찬양이 없는 예배를 상상하기 힘듭니다. 찬양대가 없으면 예배가 예배다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찬양대가 없으면 교회가 부흥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찬양대를 만들고 유지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면 찬양대를 전문화시키기 위해 전공자들을 고용합니다. 지휘자, 반주자, 심지어 관현악단을 구성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찬양대와 악기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우선, 우리는 중세교회의 성가대라는 말보다는 찬양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찬양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까?’라고 묻고 합니다. 반대로, ‘교회에서 찬양대가 아예 필요 없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두 물음 다 잘못되었습니다. 찬양대는 교회 형편에 맞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찬양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찬양대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찬양대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면 갈수록 찬양대의 찬양이 중세교회처럼 연주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중은 가사는 모른 채 곡조만 듣고서는 좋았다, 좋지 않았다는 느낌만 가집니다. 회중이 공감할 수 없고, 아멘으로 화답할 없는 찬양이라면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우스개 소리인데요. 어떤 찬양대 지휘자가 담임목사에게 찾아와서 한 대원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노래를 너무 못 부르는 대원이 있는데 내 보내려고 해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답니다. 그 사람이 찬양대에서 나가지 않으면 지휘자인 자기가 나가겠다고 최후통첩을 한 것입니다. 목사가 그 찬양대원을 불러서 말합니다. “당신 목소리를 못 듣겠다는 신자들이 여러 명 있으니 성가대를 그만 두면 안되겠느냐?”고요. 그랬더니 그 대원이 말했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목사님 설교 못 듣겠다는 사람을 50명 이상이나 알고 있는데요.”
    찬양대는 철저하게 회중과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합니다. 찬양대는 회중의 찬양을 도울 뿐만 아니라 회중의 찬양을 잘 인도해야 합니다. 찬양대는 어떻게 하면 회중이 하나님을 잘 찬양할 수 있도록 도울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찬양대의 찬양을 들으면서 회중이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픈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찬양대는 회중의 찬양을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회중이 구경하라고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대는 회중과 함께 찬양해야 합니다. 예배 때 찬양대와 회중이 따로 놀면 안됩니다.
    예배음악과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악기입니다. 예배 때 어떤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악기란 것이 너무나 중요하지 않습니까? 지난 번에 오르간 이야기를 드렸습니다만 종교개혁 이후에 엄격한 이들은 오르간조차 마귀가 좋아하는 악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예배 때 악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예배 때 소위 말하는 생음악으로만 찬송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찬송 인도하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칸토르(Cantor)라고 부릅니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 찬송을 인도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찬송이 엉망이 될 테니까요.
    이후에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오르간이 예배악기로 자리를 잡습니다. 오르간이 예배음악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을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회중의 찬양과 관련지워 본다면 오르간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는 풍금을 사용하다가 어느 순간에선가 피아노로 대체되었습니다. 한국의 음악문화 때문이기도 하고, 더 크게는 경제적인 요인 때문이기도 합니다. 파이프 오르간을 제작해서 들여놓을 수 있는 교회가 몇 교회나 되겠습니까? 전자오르간 정도면 모를까 말입니다. 연주자를 구하기도 힘들고 말입니다. 피아노가 예배악기로서 보편화된 상황에서 우리는 예배음악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는 수많은 전자악기들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기타는 어떻습니까? 드럼은 어떻습니까? 우리 고유의 민속악기는 어떻습니까? 이런 악기들을 예배 때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시편 마지막 편인 150편에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다양한 악기들이 동원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타악기도 있고, 관악기도 있고, 현악기도 있습니다. 춤추는 것도 있습니다. 물론 마지막 절은 성악에 관해서 말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우리가 읽었던 출애굽기 말씀에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양하고 나니까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들고 나오자 여인들이 덩달아 소고를 치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악기에 대한 이 모든 논의는 예배의 공적인 성격, 특히 예배음악은 회중찬송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진지하게 논의해 가야 할 것입니다.

예배 중에 다양한 찬송이 배치되어 있다

    예배 순서에서 몇 번의 찬송이 있는지 보십시오. 최소한 네 번의 찬송이 있습니다. 예배의 중요한 파트마다 하나씩 찬송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 파트에 자리잡고 있는 찬송을 통해 찬송의 다양한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예배 첫 부분(‘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이때의 찬송은 찬송가 앞 부분에 배치되어 있는 경배와 찬양 위주의 곡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불렀던 여러 영광송들을 이때 부르는 것도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새 찬송가 3장, 4장, 7장 등을 보면 글로리아 파트리(Gloria Patri)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초대교회가 불렀던 성부께 영광을 돌리는 영광송입니다. 이런 영광송을 부르면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로 돌아간 듯 초대교회 신자들과 하나라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의 파트(‘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십니다’)에서 우리는 두 번째 찬송을 합니다. 교회가 이 부분에서 노래한 곡을 전통적으로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이라고 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가사의 곡입니다. 새 찬송가 632장(‘주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에 딱 한 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의 말씀이 선포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덕을 찬송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신 것을 찬송할 때에 얼마나 큰 위로와 감격이 넘칩니까? 이 순서에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찬송도 자주 하면 좋겠습니다. 부활주일만이 아니라 매 주일이 부활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세 번째 파트(‘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인 말씀의 선포 이후에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감사하면서 찬송합니다. 이때 찬송은 설교 내용과 딱 맞아 떨어지는 찬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와 꼭 맞아 떨어지는 찬송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설교에 화답하는 찬송을 고르기가 힘듭니다. 목사에게 두 가지 고민이 있는데, 하나는 설교본문을 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말씀과 맞는 찬송을 정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주제와 꼭 맞아 떨어지는 찬송을 찾기가 힘들다면 아멘 만으로 노래해도 되겠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예배 때 찬양대가 기도의 후주로 종종 사용하는 아멘송이 새 찬송가 640장부터 나와 있습니다. 두 번의 아멘, 세 번의 아멘, 네 번의 아멘, 일곱 번의 아멘 등이 있습니다. 설교 후에 이 아멘송으로 화답하는 것도 좋은 방식입니다.  
    예배의 마지막 파트(‘하나님이 보내십디다’)에도 찬송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으로 파송하시기 직전에 우리는 찬송합니다. 주기도송을 단골메뉴로 부르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굳이 주기도송을 고집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으로 내보내시기에 세상으로 진군하는 진군가라고 생각해되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을 이들이 세상에서 복이 되기 위해 나아갑니다. 예배 마지막에 어떤 찬송을 하는 것이 좋을지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음악은 얼마든지 발전될 수 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의 예배음악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우리 교회 예배음악이 구태의연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음악을 억압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배음악을 얼마든지 발전시킬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마다 ‘음악위원회’를 두는 것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음악은 목사 한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에 맡겨둘 일이 아닙니다. 당회가 예배를 책임지고 있지만 당회가 교회음악의 모든 부분을 다 책임지기에는 벅찹니다. 교회에는 예배음악의 문제를 넘어서 음악과 관련된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배가 아닌 경건활동을 위한 모임 등에 사용할 음악이며, 개인적으로 부를 찬송을 가르치는 것 게다가 우리 자녀들이 교회음악을 잘 배워가야 하는 문제 등이 있습니다. 교회에 음악과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역사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한 두 가지만 언급해 보려고 합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난 다음에 예배에서 찬양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시편의 교독 내지는 시편의 교송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시편찬송 전통은 없지만 시편교독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찬송가 뒷 부분에 있는 아주 제한적인 시편 교독문에 의존하기 때문에 너무나 아쉽습니다. 시편교독을 계속하려고 한다면 시편 전체로 확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쉽지는 않겠지만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신총회는 예배때 고려서원에서 나온 ‘시편찬송’을 사용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이후에 예배찬송의 더 획기적인 발전은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시편을 교독하거나 교송하는 것을 넘어서 전체 회중이 두 파트로 나뉘어서 시편이나 찬송을 교창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자체에 서로 화답하는 내용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교창을 회복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성경 자체에 나와 있는 다양한 고백들과 찬양들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가사로 사용하여 곡을 붙여 노래하면 좋겠습니다.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도 낭독이 아니라 곡조를 붙여서 찬송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같이 읽었던 모세의 노래에 곡을 붙인 것도 있습니다. 이사야 40장의 그 유명한 가사들이든지, 하박국 3장의 고백도 찬송하기에 적절합니다. 신약성경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에 나와 있는 다양한 고백과 찬양에 곡을 붙여 예배 때 노래하면 좋겠습니다. 이미 곡조화된 것들이 많이 있으니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음악은 신학적 확신과 고백의 문제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음악은 취향의 문제, 교회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확신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아는가, 그리스도의 구속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으로 아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회중은 한 마음, 한 믿음으로 노래합니다. 예배찬송은 공교회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새 노래입니다. 개인적으로 찬송할 때는 얼마든지 내밀한 경험이나 감정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새 찬송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19세기, 20세기 부흥시기에 작사 작곡된 복음성가나 CCM이라고 하는 것들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과 체험을 풍성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회중이 예배 때 부르는 찬송은 신중하게 골라야 합니다. 예배는 사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회중의 공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때는 모든 신자들이 다같이 흔쾌히 동의하고 고백할 수 있는 공교회적인 고백에 합당한 찬송을 해야 합니다.
    찬송은 일차적으로 삼위 하나님을 향한 송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것을 찬송합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배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르게 알고 고백하고 찬양한 신자들은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찬송하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 속에서의 성도의 삶은 예배 때 어떤 찬송을 드렸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도 늘 새 노래를 부릅니다. 신자들이야말로 늘 최신 유행가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천상의 유행가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주위 환경이 급변할수록 하나님의 구원은 늘 새롭기 때문에 신자들은 새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은 고난 가운데서 더더욱 새 노래를 부릅니다. 신자들은 구원받은 은혜를 늘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방식으로 노래합니다. 이런 찬송이야말로 고백이요, 기도요, 말씀선포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영원한 찬송과 경배와 송영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립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여 주시고 우리를 예배로 불러주셔서 하나님을 영운히 찬송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헛된 소리에 귀 기울이던 우리의 귀를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구속의 말씀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헛된 소리를 지절거리던 우리의 입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구속의 은혜를 찬송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의 입술과 마음에 담아 하나님께 올려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예배 받으시옵소서. 저희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 가운데 있지만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시고, 교회로 모여 예배할 때 하나님의 회중이 한 마음으로 새 노래를 부르게 하옵소서. 이 새 노래야말로 온 세상을 진동시키고, 하나님의 대적을 전율케 하는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의 입술과 마음에 새 노래를 담아주신 은혜에 감사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말씀 묵상하고 나누기

1. 찬송이 현대인과 신자의 삶에서 어떤 영향을 끼칩니까?

2. ‘모세의 노래’가 교회의 삶에서 어떻게 이어집니까?

3. 구약과 신약의 예배음악이 어떻게 발전합니까?

4. 개혁은 중세교회의 예배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회복했습니까?

5. 예배 때 찬양대와 악기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6. 예배순서에 들어있는 찬양의 다양함을 말해 보세요.

7. 예배 중 찬양을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해 봅시다.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예배 때 찬송이 되도록이면 많아야 한다, 맞습니까?

2. 예배 때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정해져 있다, 맞습니까?

3. 예배찬송은 공교회적인 (    )고백을 하는 (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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