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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11)

설교제목/ 하나님의 자비에 동참하는 예배


설교본문/ 역대상 29:14-17; 고린도후서 9:10-15

주제문장/ 우리는 헌금순서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에 동참하여 믿음의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준다.

설교개요/ 헌금에 대한 오해가 많다. 왜 그렇게 헌금종류가 많냐는 것부터 십일조를 해야 하냐는 것까지 말이다.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구체적으로 표명하는데, 헌금은 가장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실천이다. 헌금은 자비의 봉사인데 액수의 문제가 아니며, 그 헌금과 관련을 맺고 있는 직분이 집사직이다. 구체적으로 헌신을 표명하는 헌금순서가 예배안에 있는 것이 좋겠고, 이 헌금도 교육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 헌금은 자비의 구체적인 실천인데 우리는 교회 안의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헌금은 또한 복음사역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말씀의 사역자를 지지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이렇게 헌금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구체적으로 내어놓는 것을 훈련한다.
  
■ 대상 29 : 14 - 17

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5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16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 고후 9 : 10 – 15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헌금에 대한 오해가 많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농담 같은 질문인데요. 예배 중에 제일 싫은 순서가 무엇입니까? 설교시간입니까? 헌금하는 시간이 제일 싫다고 하는 분은 없습니까? 신앙이 없는 이들이 볼 때 예배 중에 눈에 제일 거슬리는 것이 아마도 헌금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주일에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예배하러 나온 것이 얼마나 대단한 헌신입니까? 교회는 예배하러 나온 교인들에게 헌금마저 요구합니다. 헌금도 단일하지 않고 종류가 많습니다. 주일헌금만이 아니라 십일조며 감사헌금이 있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종류의 헌금이 있습니다. 장학헌금도 있고, 선교헌금도 있고, 차량헌금도 있고, 건축헌금도 있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수많은 종류의 헌금을 요구합니다. 참 이상한 것이 교인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헌금합니다.
    교회가 헌금을 강요하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하나님께서 언급하지도 않은 다양한 종류의 헌금을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까? 요즘 교회들은 예배 중에 헌금하는 시간을 따로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금은 예배당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자발적으로 헌금하고 들어가면 됩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으니 좋습니다. 누가 헌금하는지 하지 않는지 잘 드러나지 않아서 좋습니다. 헌금순서는 예배시간을 제법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 헌금시간을 없애면 예배의 효율성을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예배시간에 굳이 헌금하는 순서를 가지는 것일까요? 
    예배는 하나님과 그 백성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심으로 예배가 시작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회중은 예배의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회중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회중이 예배에 기여하는 부분이 많다는 말입니다. 성전이 사라졌고, 제사가 사라졌지만 새로운 성전이 세워졌고, 새로운 제사가 드려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새로운 성전이 섭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회중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새로운 제사가 드려집니다.
    예배 전체를 제사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제사는 제사인데 전혀 다른 제사입니다. 신약교회는 죽은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몸이 산 채로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신약의 제사는 자신의 몸을 드립니다. 죽여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산 채로 드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우리의 신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서의 몸을 말합니다. 여기서 헌금의 문제도 나옵니다. 우리의 몸이 물질이기에 물질을 헌금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몸을 드리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예배 때 회중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표명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 때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낭독했던 역대상 29장 말씀에 보면 헌금할 때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 왕은 성전을 짓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무수한 전쟁을 통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성전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에 다윗은 성전건축에 쓸 예물을 많이 준비합니다. 자기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돕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에게 광고해서 성전건축에 쓸 예물을 드리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기회를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원해서 예물을 드리자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다윗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왜 이런 언급을 했을까요? 하나님께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부족을 채워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족을 채운다는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기도합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하나님의 회중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 것이 자랑이 될 수 있습니까? 물건을 원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돌려 주었다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흥미로운 것이 헌금을 라틴어로 콜렉타(Collecta)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원래 ‘모이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예배에 모인 회중이 개인적으로 조용히 기도한 후에 목사 주위로 모입니다. 신자들이 예배하기 위해 목사 주위로 모이는 것이 바로 콜렉타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용어는 헌금 순서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로 특화됩니다. 이 단어의 영어번역이 컬렉션(Collection)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이 단어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보석 컬렉션이니, 화장품, 향수 컬렉션이니 하는 말들을 쓰지 않습니까? 그 제품들을 수집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좋은 제품을 모아 놓았으니 와서 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헌금은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배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헌신은 어느 한 순서로 제한되거나 특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전체가 하나님의 컬렉션이요, 하나님을 위한 컬렉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곤 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생각을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먼저이지만 우리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이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받은 것을 돌려 드립니다.

헌금은 액수가 많고 적으냐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얼마나 헌금해야 하는가가 문제지요? 가장 크게 문제되는 것이 십일조일 것입니다. 왜 굳이 십일조인가라고 물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굳이 襪분의 1’일 이유가 없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이 아닌가? 신약시대에는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령이 없지 않는가?’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는 것은 구약적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주신 율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십일조가 폐지되었을까요? 신약시대는 율법시대보다 훨씬 더 풍성해졌으니 십일조보다 훨씬 더 많이 해야 한다고 하면 무엇이라고 답할지 궁금합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구약시대에 이미 십일조보다 훨씬 더 많이 바쳤습니다. 구제헌금도 몇 년 단위로 따로 했으니 말입니다. 십일조는 단지 열 개 중의 하나라는 문자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현으로 襪분의 1’을 구별하여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襪분의 9’는 어떻게 됩니까? 나머지 襪분의 9’는 내 것입니까? 아닙니다. 전부가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상징적인 행위로 십일조를 드립니다. 십일조를 제대로 드렸느냐 하는 것은 나머지 襪분의 9’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결정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네 마음 있는 곳에 물질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십일조는 성도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했느냐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헌금함에 헌금하는 장면을 지켜 보신 적이 있습니다. 부자들은 많이 헌금했는데 한 과부는 두 랩돈, 즉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가 누구보다 가장 많이 헌금했다고 하셨습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을 주님께 돌려 드립니다’라는 고백이 중요합니다.
    헌금이라는 말은 돈을 바친다는 말입니다. 돈만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돈을 바쳤던 것이 아니라 물품을 바쳤습니다. 헌물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요. 농경문화에서는 추수한 열매를 바쳤습니다. 예전에는 추수감사절이 되면 쌀 가마를 실은 달구지가 교회로 오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제사를 드리러 나올 때에 헌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세가 되면서 헌물을 바치고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헌물이 감사의 제사로 드려진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좋은 곳에 보내어 달라는 뇌물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헌물을 바치든지, 헌금을 하든지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뭔가를 요구하고 거래하는 것이 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연보와 관련을 맺고 있는 직분이 집사직이다

    예전에는 우리가 ‘연보’라는 말을 종종 썼습니다. 이 연보라는 말을 풀어 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거둔 기부금이라는 뜻입니다. 헌금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이 연보라는 말입니다. 연보라는 말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집중적으로 언급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예루살렘 교회를 돕겠다고 한 계획을 실행하라는 말 속에 등장합니다. 이방교회가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기부한 돈이 연보였습니다. 그 곳에 보면 이 연보를 ‘은혜의 일, ‘성도 섬기는 일’, 봉사의 직무’라는 다양한 표현들로 바꾸어 가면서 쓰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하는 연보는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요, 다른 성도를 섬기는 일이요, 봉사의 직무라는 사실입니다.
    연보와 관련된 직분이 집사직분입니다. 집사직분은 연보위원과 재정관리 담당자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집사직은 가장 광범위한 봉사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집사라는 말이 봉사라는 말 자체에서 왔습니다. 집사직은 가장 광범위한 봉사직이면서 동시에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봉사직입니다. 식탁봉사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집사직이 나왔듯이 물질적인 필요까지 채우는 것이 집사직입니다. 개혁한 교회는 집사를 ‘자비의 봉사자’라고 불렀습니다. 목사는 ‘말씀의 봉사자’라고 부르고, 장로는 ‘다스림의 봉사자’라고 부르고, 집사는 ‘자비의 봉사자’라고 불렀습니다. 종교개혁은 사제의 종이었던 집사직을 성경대로 회복하여 자비의 봉사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집사는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아 자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구제를 위해 일곱 명의 사람을 택하여 세웠는데 이것이 이후의 집사직의 기원이라고 봅니다. 집사는 교회를 돌아보아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하는 이들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집사는 그리스도의 자비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노예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중세에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유럽의 인구 䃳분의 1’이상이 죽어 나갈 때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목숨도 돌아보지 않고 봉사했습니다. 중세를 지나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는 집사직이 회복되어 자비와 긍휼의 사역이 더욱 더 힘있게 진행됩니다. 요즘의 복지국가가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기독교인들이 감당했습니다.

헌금순서의 중요성을 알아야 하겠다

    개혁한 교회는 헌금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해 왔습니다. 개혁한 교회는 예배 전에 헌금하기도 했고, 예배를 마친 후에 헌금하기도 했습니다. 예배 중에 헌금할 경우에는 설교 전에 하기도 했고, 설교 후에 하기도 했고, 심지어 설교 도중에 하기도 했습니다. 설교 도중에 하는 헌금은 어떤 헌금이었겠습니까? 설교가 하도 길었기 때문에 설교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때 헌금순서가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헌금순서를 가집니다. 왜 굳이 예배시간에 헌금순서를 가집니까? 예배 순서를 하나라도 더 늘이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예배순서에 넣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의 헌신을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헌금함에 헌금하고 예배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예배 안에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드리는 헌금순서가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떤 분은 신앙고백을 ‘온전한 헌신’이라고, 십계명을 ‘감사의 헌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례는 ‘약속된 헌신’, 마지막으로 헌금은 ‘비이기적인 헌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가장 비이기적인 헌신입니다. ‘네 물질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말씀처럼 헌금은 가장 구체적인 헌신의 표현입니다. 예배시에 헌금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몸짓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짓 중에 하나가 바로 헌금하는 몸짓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순서에 헌금하는 순서를 가집니다. 우리는 헌금순서가 설교 후에 오는 것이 좋겠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우리의 헌신을 표명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헌금 시간에 우리는 헌금바구니를 돌립니다. 예배하는 회중이 많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헌금시간이 길어지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배하는 회중이 많으면 헌금 바구니가 돌아가는 도중에 교인이 아닌 사람이 예배에 참석했다고 돈을 집어가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잠자리채(?)입니다. 헌금 바구니에 막대기를 매달아서 그 막대기 끝을 잡고 멀리 앉아 있는 교인들에게까지 뻗었습니다. 

    헌금시간이 밋밋하니까 감동을 주기 위해 특송을 하거나 특별연주를 하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예배인도자가 헌금과 관련된 성경구절을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피아노 반주만 조용히 합니다. 헌금하면서 다른 것을 끼워 넣는 것은 헌금순서를 빛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헌금 자체의 중요성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헌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순서입니다. 우리는 헌금하는 행위에 집중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사를 받으신다는 것을 크게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헌금하기 전에 헌금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는 헌금 후에 예배인도자인 목사가 기도를 합니다. 헌금위원이 헌금봉투를 함에 넣어서 목사에게 올려주면 목사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복을 빌어주는 기도를 합니다. 예전에는 십일조를 누가 했는지 언급하기도 하고, 감사 헌금의 내용들까지 일일이 언급하면서 기도하기도 있습니다. 나중에는 주보에 헌금명단이 오릅니다. 헌금봉투가 혹 분실될 수 있기 때문에 헌금한 것이 전달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차원이라면 헌금명단을 밝히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닙니다. 물론 헌금액수까지 공개하는 것은 분명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헌금하는 것도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헌금하는 것도 교육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감사의 제목을 주보에 올리는 교회를 보았습니다. 다른 신자들의 감사내용을 보면서 나도 감사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목적일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헌금은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모든 헌금은 무명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헌금 뿐만 아니라 십일조도 무명으로 합니다. 이렇게 무명으로 헌금하는 것은 내 수입을 교회에 알리기 싫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요? 이름을 밝히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헌금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히 지나친 생각입니다.
    예배 때 헌금하는 순서를 가지는 것은 우리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이 됩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들에게 헌금에 관해 미리 교육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왜 헌금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가르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마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교회 갈 때 아빠가 항상 동전 두 개를 쥐어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교회에 헌금할 돈이고, 다른 하나는 주일이 지나서 아이가 과자 사 먹으라고 준 것입니다. 헌금을 잘 하면 먹을 것도 생긴다는 것을 교육하기 위해 동전 두 개를 한꺼번에 준 것입니다. 어떤 주일에 그 아이가 교회 가다가 동전 하나를 하수구에 빠뜨렸습니다. 아이가 울기 시작합니다. 왜 울겠습니까? 아빠가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하수구에 빠진 동전이 헌금할 동전인지, 과자 사 먹을 동전인지 몰라서 울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그 어린아이만의 문제일까요?

헌금은 복음사역과 자비의 구체적인 확증이다

    헌금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아니냐고 말할 분들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도 교회에 들어간 돈은 절대 사회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오해 때문입니다. 헌금을 가지고 교회 건물을 계속해서 확장하고, 주차장 부지를 넓혀가고, 나중에는 수양관이나 묘지까지 마련하려고 하니까요. 그런데 교회만큼 사회를 위해 봉사를 많이 하는 종교나 단체가 있을까요? 개 교회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구제를 하는지 모릅니다. 복지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역량이 한계가 있기에 교회가 나서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에 발맞추어서 요즘 교회들이 여유가 있으면 복지센터를 짓는 것이 유행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개혁한 교회는 한 번의 예배 때 세 번의 헌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한번은 교회 자체를 위해, 마지막으로는 다른 특별한 필요를 위해서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사용처가 분명해집니다. 하지만 단 한번 헌금할 때에는 그 헌금을 어떻게 분배해서 사용하느냐의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재정의 절반 정도는 교회 자체의 프로그램이 아닌 지역사회봉사와 선교사역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교회마다 형편이 다르기에 이것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무리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가 복음전파를 위해 세워졌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구제를 열심히 해야 하지만 교회가 구제기관인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교회에 손을 벌리지 않고 자비량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복음의 정신을 생활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도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좋을까요? 목사가 자비량으로 교회를 봉사하면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기에 좋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이끌지 않겠습니까? 목사는 교인들이 헌금한 것의 일부를 생활비로 받습니다. 이것은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목사는 교회에 매여야 합니다. 자기는 교회돈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게 목회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교만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절반 이상이 목사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는 미자립교회입니다. 규모가 작은 교회 같은 경우에는 교회 예산의 대부분이 목사 가정의 생활비 지원에 다 들어갑니다.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인건비가 너무 비싼 것이지요. 그런데 바울 이후에 교회는 복음의 순전한 파수와 전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했기에 목사가 오직 복음을 위해서만 헌신하도록 교회가 생활비를 전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옳은 것입니다. 목사가 생활비에 대한 염려 없이 설교와 복음선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마지막 날까지 구원의 기관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헌금은 헌신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헌금은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에 동참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힘입었기에 하나님을 본받가 그 크신 긍휼과 자비에 동참합니다. 교회가 구제를 잘 하지 않으니까 십일조마저 교회에 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직접 구제하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신자는 개인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통해 가난한 자들이 필요한 도움과 더불어 복음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박애 정신 때문에 연보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 헌금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돕는 것입니다. 헌금순서를 통해 집사를 포함한 신자 모두는 교회와 온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푸는 사명을 실행합니다. 내 먹기에도 부족한 듯 보이지만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 드렸을 때 모든 사람이 배 부르게 먹고 남았던 오병이어의 기적이 오늘도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이 교회를 통해 이런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복된 주일을 주시고 우리에게 공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예배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등 다양한 경건 활동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주의 몸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헌신을 고백할 때에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우리를 만나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위해 헌신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을 통해 저희들의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모자람을 채우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저희들의 헌신이 하나님을 부유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왔으니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알게 해 주옵소서. 주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도록 해 주신 은혜, 주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헌신으로서의 예배를 아름답게 드릴 수 있게 해 주시고, 예배 후에는 저희들의 삶이 이웃의 고통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을 복 주시되 특별히 집사직을 복 주셔서 자비의 모범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아름답게 드러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이 하나님이 긍휼이 많으신 분이요, 우리를 먹여주시는 분임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자신의 몸을 온전히 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묵상하고 나누기

1. 교회가 헌금을 강요한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헌신은 헌금에 국한된 것일까요?(참고/ 롬 12:1)

3. 헌금의 태도에 관해 생각해 봅시다.(참고/ 대상 29장)

4. 십일조의 의의에 관해 말해 봅시다.

5. 연보의 의미와 집사직의 중요성에 관해 말해 봅시다.

6. 헌금순서의 중요성에 관해 말해 봅시다.

7. 복음전파와 구제의 관계를 삶에 적용해 봅시다.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헌금액수가 많을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맞습니까?

2. 신자는 연보를 통해 이웃사랑을 실천한다, 맞습니까?

3. (    )의 봉사인 헌금을 통해 이웃사랑과 (    )전파를 구체적으로 확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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