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4


두려워 하는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과 경배 (마 8:18-27)

2021 4월

I. 설교
II. 사역
III. 주석

핵심주제: 믿음이 없어 의심하고 두려워 하는 우리를 예수님은 제자와 성도로 부르셔서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는 경배하며 예수님을 따라간다.


의심하고 두려워 하는 우리를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믿고 담대하게 예배하는 자로 변화시켜 주십나다.  

2천년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의심과 두려움이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하지 않고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시대의 성도에게  현재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로 이루어 져 있습니다

18절-22절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에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헌신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3절-27절은 갈릴리 호수/바다의 폭풍 앞에 두려워 하던 제자들의 마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한 이야기입니다.

이 일은 이후 예수님의 사역이 계속되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는 일까지 가게 합니다. 

성령님께서 들려 주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인 우리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할 지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 영광스럽게 된 인자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돌보고 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 갑시다. 성령께서 새로운 깨달음과 힘을 주시기 소원합니다.

 

1.  물질과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을 너머 예수님을  믿고 따릅시다 (18-22절)

 물질과 인간관계의 고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릅시다.  

무리들이 왜 예수님을 둘러 쌌습니다(18절). 말씀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니까  좋아 하며 몰려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인기를 어든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저 편으로 떠나 가라.”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에 헌신된 제자들로 따라 오기 원했습니다. 


1) 물질의  염려를 넘어서 

참 제자는 물질적인 고난이 있지만 주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시는 것은 23절입니다.  배 타러 가는 길에 두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12 제자 뿐 만이 아니라, 무리들 가운데 조금 더 헌신된  다른 사람을 여기서 제자라고 합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겠습니다.”

이 사람은 성경을 잘 아는 서기관이었습니다. 21절에 “그 제자들 중에 다른 자”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까, 이 사람 서기관도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였습니다. 그 때 관습은 자기가 원하는 선생으로 랍비로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불러 주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스스로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느 곳으로  떠나든지 제자로서 따르겠다는 결심을 말했습니다.” “그래 훌륭하다. 나를 따르라.”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네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나는 인자다 (그 사람의 아들이다). 땅에 여우들은 자기가 살 굴들이 있다. 새들도 아래 천막치는 곳이 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안정된 잠자리가 없다.”예수님은 그 서기관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르치고 또 기적을 행하니까, 사람들도 많이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면 편하게 살면서 지혜도 배울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가난과 고난의 길입니다.

그래서 그 서기관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소개하십니다. 인자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보다 큰 뜻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그 사람의 아들”이라 부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인자라고 부릅니다. 다니엘서 7:13, 14서 “인자와 같은 사람”에서 온 말입니다. 다니엘서 7:13, 14를 보겠습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하나님 아버지를 말합니다)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소멸되지 않을 것이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를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인자, 그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또 이 땅에 구름을 타고 영광 중에 오실 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인자에 대해 새롭게 가르쳤습니다. 인자는 그 영광을 받기 전에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리라”(마태복음 17:22).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이 영광받을 인자라 하면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가?”제자들도 사람들도 이 인자라는 말에 많이 혼돈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진 분이지만, 우리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님과 함께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낮아지신 그리스도는 가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9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부유한 분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다.” 부자들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구원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신성에 참여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는 그리스도의 가난함과 고난을 같이 겪습니다. 그 서기관이 참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안정된 생활이 없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길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이 서기관은 제자의 길이 물질의 고난의 길임을 바로 알고 따라야 합니다. 마귀에 눌린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죄인들이 회개할 때 까지 인내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골 1:24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우리 모든 성도도 “인자의 길”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인자이신 그리스도와 함께할 내세의 영광을 생각하며 이 땅에서는 고난받고 수고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은 예수님이 스스로 가난해 진 것을 본받아,  성도들 중에 가난한 성도를 물질로서 구제하라고 권합니다. 성도에게 나누어 주는 만큼 나의 것이 없어져서 교회와 성도를 세우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고후 8:14절은 말합니다. 이렇게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은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가난하고 힘들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 넉넉한 것으로 다른 성도를 보충해 주는 것은 나중에, 다른 성도들이 넉넉한 것으로 우리를 보충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구제하고 헌금하는 그 만큼 가난해 집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힘이 있는 성도는 다른 성도를 위해 시간을 쓰면서 자기 시간이 없어 집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위해 죽으셨고 제자들은 있을 집이 없이 다녔지만, 우리들은 그 만큼 고생하지 않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져야 할 고난을 감당합시다.

그러나 염려하지 맙시다. 주님과 함께 일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경제적인 것,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마태복음 6:33).


2)  가족에 대한 염려를 넘어서 (21-22절)

 다른 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가족에 대해 염려합시다.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라.” 예수님의 말씀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유대인의 관습은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내에 매장합니다. 다른 할례나, 유월절 제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매장 후에 1 주일간 아버지를 위해서 통곡하는 장례의식을 합니다.

그런데, 이 제자의 아버지가 정말 돌아가셨다면 이 사람은 집에 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를 장사한다”는 말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모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제자는 먼저 부모님 돌아가실 때 가지는 잘 모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명하십니다.  “먼저 계속 저를 따르십시오. “그리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장사하게 내 버려 두십시오.”죽은 자를 “내 버려 둔다는 말은 마태복음  4:20- 22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고기를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20절) 그리고 다시 야고보와 형제 요한이 그들의 아버지와 함께 배 안에서 그물을 깁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그 분을 따랐습니다.”(22절)

그들은 자기 재산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아버지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내버려 둔다”는 것이 이 뜻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고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왜 죽은 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할까요?

그리스도 없이 사는 것은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엡 2:15절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아버지에게 좋은 것 해 드려도,  죽은 삶을 살게 합니다. 아버지를 제대로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부모님 부양하는 일은 그만두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훈련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어머니 마리아를 부양하는 일은 버려두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일을 위해 떠났습니다. 먼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잘 세우니까, 어머니의 부양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의 마리아를 집에서 모셔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잘 세울 때,  교회를 통해 부모님을 섬기는 일도 해결할 방법을 주십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경제적인 것, 부모님 부양하는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목회로 부르셨으면 거기에 순종하면, 차차 주님이 부모님 부양 문제 해결해 주십니다.

모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따르라.”예수님이 부르실 때 부모님과 가족을 도와야 할 책임 때문에 염려가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하실 때는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먼저 순종합니다.

 부모님은 “주 안에서”순종해야 합니다. 우선 부모님이 싫어하시더라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십시오. 부모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는 절대 순종합시다. 그러나, 부모님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것을 명령할 때는, 부모님을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릅시다. 

다른 가족과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떠나가서 가족이 행복하게 살수 없습니다.  먼저, 그리고 계속 주님을 따르면서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가족이 돈을 벌고 편하게 해 주면 같이 죽어 갑니다. 그리스도를 먼저 따를 때, 가족 전체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 부모님의 마음 상하게 할까 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있습니까? 이 시간 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자녀에게 가르치고, 하나님께 먼저 순종하십시오.

경제적 고난이 있더라도 가족 관계에 고난이 있더라도 먼저 주님을 따릅시다. “죽은 자들은 저희 죽은 자들로 살게 하라.”이 말씀을 신뢰하면서 가족과의 관계를 염려하지 말고 주님을 따릅시다.


2.  풍파 앞에 두려워 하는 제자들의 마음과 풍파를 잔잔하게 하심(23-26절)

12명의 제자들은 물질의 염려, 가족에 대한 염려를 예수 그리스도께 다 맡겨 드리고 예수님만을 따랐습니다. 이번에는 주 예수님께서 배 안으로 들어가시고 제들은 제자들로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23절).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먼저 배 안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마태복음은 일부러 예수님이 먼저 배 안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실제로 누가 먼저 들어갔는가  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앞장서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의지하며 제자로서 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 대해 이 기적을 통해 가르칩니다. 

큰 파도가 생겼습니다. 파도가 얼마나 높은지 눈 앞을 가립니다. 배가 덮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고난을 각오하고, 아버님과 재산도 버리고  따른 제자들입니다. 재난들 당해해로 인해 고난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은 소리칩니다.  “주님 구원하소서” 갈릴리 호수의 파도에서 구원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 왔다.”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5:1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배우기 위해 나왔습니다. 8:1, 5절에서는 문둥병자가 고쳐 달라고 나왔습니다. 백부장이 자기 종의 중풍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마태복음 9:21-22에서 여인이 병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 폭풍가운데 부르짖으며 나아 온 제자들을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의 병을 치료받는 것이 급합니다. 그래서, 폭풍을 먼저 꾸짖지 않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출렁이는 파도의 보다도 중요한 것은 출렁이는 제자들의 마음의 파도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들의 병을 고칩니다.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적기 때문에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옆에 두고도 믿음이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멸망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어 두려워 하며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몰랐기 때문에 믿음이 없었습니다. 주님이 자고 있으면 능력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육체적으로 깨어 있는 것에 너무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거기 계시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지킬 것을 그들을 몰랐습니다. 

“주님 구원하소서”잘 말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가 죽겠나이다.”“멸망하고 있습니다.”이 말은 틀렸습니다.  틀렸습니다.  생명이신 주님이 함께 계신데 왜 멸망합니까? 

모든 두려움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려울 때 두려움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게을러 집니다. 어려울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만 그러나, 두려움이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죽일 듯이 달려 드는 파도 앞에서, 두려움으로 겁에 질리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바로 아십시오.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바깥의 파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회복해 주기 원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병을 고침받기 바랍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에 일어나셨습니다. 폭풍과 바다를 꾸짖었습니다.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폭풍과 바다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꾸짖으시니까 큰 고요함으로 변했습니다. 


3. 예수님은 누구신가?: 믿고 경배하라(26, 27절)

1) 믿음을 성장하게 하는 예수님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는 것을 이것을 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서 말했습니다.  “이 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27절) 이 질문을 제자들이 했지만, 그냥 “그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 지금 우리들도 같은 질문을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분의 명령으로 갈릴리 호수가 잔잔하게 복종했습니다. 전에, 큰 폭풍이 일어난 것도 그분이 허락하니까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만난 이분이 과연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가 더욱 더 신뢰할 수 있도록 돕는 분이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시면서도 제자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 믿음이 작지만 나는 너희를 위해 인자로서 고난을 받는다. 너희에게 성령을 보낼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더 훈련 받아 믿고 담대할 것이다.” 주님의 심정입니다. 

형제 자매님이 지금, 마음이 떨려서 혼란에 빠졌습니까? 믿음이 작은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주님이 주무시는 것 같지만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작은 믿음을 키워 주기 원하십니다. 그 작은 믿음을 키우시기 위해 계속 환난 가운데 던져서 훈련하십니다.  그 때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주무셨던 주님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앞에 두고도 울면서 주님을 찾지 마십시오. 막달라 마리아 처럼 되지 마십시오. 무서워 문을 꼭 잠그고 숨었던 제자들 처럼 되지 마십시오. 주님은 부활하여 그 크신 능력으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계시록 21:8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합니다. “두려워 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에 갑니다. 제자들이 한 때 지옥에 갈 사람과 같은 지경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믿음의 사람 담대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인생의 위기가운데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믿음 안에서 담대함을 얻으십시오. 


2)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

시편 106:9는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말랐다.”시편 107:25, 39는 말합니다. 謉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이 능력의 구약의 하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던 예수라는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나중에 마태복음 14:33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 때 배에 있던 자들이 “그 분께 절하여 말하기를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과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서 사람과 함께 계셨습니다. 

전에 제자들이 탄 배를 바다에 빠뜨리려는 바다를 잔잔케 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땅에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밀려 드는 인생의 수많은 파도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성난 파도를 잔잔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목이 곧아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들의 고집도 꺾으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합시다.  우리 인생이 아무 문제도 없고 안락하기 때문에 주일에 예배로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물에 빠뜨리는 듯한 위기와 위험들 때문에 교회로 모입니다. 예배 가운데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만나 주십니다. 인생의 풍파가운데 예배로 모입니다. “아직 믿음이 없느냐? 아직 두려워 하느냐?” 주님의 음성은 꾸짖는 소리가 아닙니다. 애타고 안타까와 하는 목소리입니다. 간절히 부르짖는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십니다.

주일 예배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6일 동안 살아가며 계속 예수님을 만납니다. 주일 예배의 말씀과 찬송과 기도를 생각하며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때로는 우리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것 같아도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마음에 찾아 오십니다.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십니다. 담대하게 우리의 사명을 다하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된 우리들을 많은 위험 가운데 서 훈련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인자”로 불리우십니다. 하늘의 영광 가운데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분이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와 비참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릅시다. 사람들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비난 받아도, 먼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주님을 따릅시다. 우리 주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폭풍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문제들만 바라 보지 마십시오.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리스도를 신뢰하십시오.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주님을 찬양하지 마십시오. 이 문제 가운데서 함께 하시는 주님께 먼저 감사찬양합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의 질병을 치료합시다.

II. 사역

개역

사역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                                                        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23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다(막 4:35-41; 눅 8:22-25)>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18 그런데 예수님은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떠나 가기를 명령하셨다. 

 19 그리고  한 서기관  나아 와서 그 분께 말했다.

선생님, 어디로 떠나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

 20  그리고 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여우들은 굴들을  공중의 새들도 아래-천막치는 곳들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인자 (그 사람의 아들)  그 머리를 가눌  곳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21  그런데 그
제자들 중에 다른 자가 그 분께  말했다.

주님, 먼저 떠나 가서 저의 아버지를 장사하게  저를 허락해 주십시오.”

 22 그런데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다.

“저를 따르고 있으십시오 

그리고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장사하게 내 버려 두십시오.”

 23 그리고 그 분이 그 배에 들어가신 다음 그 분의  제자들 이 그 분을 따랐다.

 24 그리고 와, 큰 지진바다에서 생겼고, 그래서 그 배가 파도들에 의해  덮이고 있었는데, 그 분 자신은 주무시고 있었다.

25 그리고 그들이 나아 와서 그 분을 일으킨 다음에   말하기를, 

주님, 구원하소서. 멸망하고 있습니다.”

 26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겁쟁이들이고  있느냐?  믿음적은 자들아”

그 때 일어나신   다음에  그 폭풍들과 그 바다  꾸짖었다.

그리고  큰 고요함이 생겼다.

 27 그런데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고 말하기를, 

“그 분 자신이 어떠한 분이기에,  그 폭풍들과 그 바다까지도 그 분께 복종하고 있는가?”


III. 주석

말씀 753/마태 47

불안정과 위험 가운데 함께 계시며 가르치고 능력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리스도의 뒤만 따르라 (마 8:18-27)


2016-4-10


1. 제자의 길에 대한 가르침:  생활의 안정과 사람들과의 세상적 관계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18-22

   1)  상황: 무리를 떠나 저 편으로 떠나 가기를 명령하셨다. (18)

2)  어디로  떠나 가시든지 따르려는 서기관에게 , 19절

     - 인자는 어디에  머리 둘 곳이 없다, 21절

3) 먼저 떠나가 서 아버지를  장례하기 원하는 다른 제자에게, 21절

   - 나를 계속  따르라.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게, 22절.


2. 제자의 길에 대한 체험: 자연을 복종시키는 주님을 믿고 두려워 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23-27

1)  상황: 배에 들어가는 데, 제자들이 그 분을 따랐다, 23절

2)  큰 지진이 생겨 바다를 덮었고, 그 분은 주무시고 있었다, 24절.

그들이 나와서 그 분을 일으키며, 25

3) 대화: 

그들이 말함:       주님, 구원하소서. 멸망하고 있습니다.”, 25절

      그들에게 말함:    “겁쟁이들이고 있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 26절.

2)   일어나신 다음에 폭풍들과 바다를 꾸짖음,  26

  큰 고요함이 생김

1) 그 사람들: 기이히 여겼고 말하기를

      “그 분자신이 어떠하기에 폭풍들과 바다고 복종하는가?”


키아스 무스.

--- 따름의 문제, 큰 지진은 큰 고요함으로 변한다. 따름의 핵심.

중심은 주님과 제자의 언약적 대화.

1) 제자로서 주님을 따르는 것 (23)은 “그 분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 (26)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새롭게 해석한다. 

2) 큰 지진 생겨나  바다 덮었고, 그 분은 주무셨지만 (24,25), 그 분은 일어나 바다를 꾸짖었고, 큰 고요함이 생겼다 (26절)

3)  “주님 구원하소서, 멸망하고 있습니다.”제자들의 말에, “겁쟁이들이 되고 있느냐? 믿음적은 자들아”

주님은 믿음 적은 자를 부르셔서 연단시킨다. 

  마 6:30-33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플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여 염려하지 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8장은 6장 말씀에 대한 주석이다. 말씀으로 주석. 그리고 행위 주석


18-22  ,  23-27 5개 절은, 두 개씩의 대화로 이루어 진다.

  18-22: 주님 앞에 나아 온 서기관과 주님의 대화,  다른 제자와 주님의 대화,

  23-27:주님 앞에 나아 온 제자와 주님의 대화, 주님 바다를 꾸진어 잠잠- “그 분이 누구?”-주님 대답?=독자.

본문대지:  빈곤과 사회로부터 소외와 자연의 불안정 가운데서도 주님의 능력을 믿고 따르라.

본문목적:  이 땅의 불안전과 위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주님의 가르침과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주님의 뒤를 따라 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본문상황:

   경제적으로 힘듬, 주거 문제도 힘들다.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게 하는 많은 사회적 관행들, 사람들의 모임에서 격리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공동체

   사역을 위해서는 자연 재해의 위험을 통과하여 나가야 한다.

일반 성도들도 이런 불안함과 위협이 있다. 복음 사역자는 더 더욱 그렇다.


설교 상황

   경제적 힘듬. 성도이기에 정직하게 일하므로 더 빈곤

  사회적 격리,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지만, 우리의 우선순위는 다르다.

  주님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들을 많이 만난다.

문제는, 우리를 경제적, 사회적으로 힘든 상황, 천재지변의 위험에 노출시킨 그리스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기회로, 그 직분자로 쓰셨다.

고후 12:9  “네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

그리스도의 뜻, 임재, 그 능력을 바라 보라.

설교목적:  주님의 가르침과 능력을 신뢰하여 이 땅의 위험 앞에 겁쟁이가 되지 않고 주님의 뒤를 담대히 따르도록 격려하기 위해.

설교대지: 주님의 가르침과 능력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주님의 뒤를 따르라.


내용

본문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가르친다.

동시에 제자/성도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빈핍, 소외, 재난의 위험, 그 비참을 가르친다.

제자들을 가르친다. 믿음없는 그들, 죄인들을 가르친다.

구원을 가르치고,

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믿음 약한 자를 계속 가르치고, 보호하며 인도하시는, 구원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로 감사하게 한다.

-위험에 익숙하라. 자주 노출되라. 그러면 자주 주님의 능려을 체험한다.

- 세속적 종교, 성경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혼란된 마음을 정돈하라.

주님은 물질 축복을 약속하지 않았다. 주님을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길은 머리 둘 곳이 없기도 하고,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외롭게 될 것을 말하셨다. 세상의 물질적 풍요, 그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의 친구의 안정을 버리고 주님을 향해 떠나야.

심지어 자연환경까지도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기가 클수록, 우리의 능력 밖으로 힘들수록, 주님의 크고 강하신 능력이 나타날 때이다.

나의 사고방식은 무엇에 기초해 있는가?

나의 경험, 사람들의 경험, 세상 나라의 경험?


우리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경험하고 있다. 눈에 보이게 나타나지 않지만, 믿음의 세계에는 이미 새 세계가 들어와 있다. 믿음으로 나가는 성도의 삶의 발자취,교회의 흐름에서 주님의 새 나라는 나타난다.


보이는 안정 보다 보이는 불안정을 택하라.

보이지 않는 주님 자신이 방패요 산성이다.

보이는 방패와 산성은 제한적이다. 한 곳에만 있다. 주님 자신은 언제 어디서나 도우시는 분으로서 영원하고 무한하시다.

“그러나 너는 먼저 나를 따르라. 안정에 대한 계산 때문에 다른 길로 나가지 말라. 주님이 먼저 가신 길, 성령님 통해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면 불안정해 보여도, 그 길이 가장 안정된다. 영원한 복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그 나라 들어가기 짜지 여행자의 삶에서 주님이 보호하신다.


앞 부분의 대화와 바다의 경우. 세가지 겹침- 제자들, 따랐다. 나아와

독특한 기법. 23절, 제자들 à 27절에 사람들로 바꾼다.

  20절 인자 (사람의 아들)과 21절의 제자들과 관련하여 chiasmus인가?

아니면 제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 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 그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인가? 

주제- 안전이 없음 (집이 없음), 죽은 자를 장사 지내려 함- 죽은 자에 관심, 세상의 관계를 끊음. 

-거처가 없는 것을 각오하고, 사회적으로 격리되는 것 보다 주님 나라를 더 귀하게 여겨 따라 온 제자들, 그들에게 자연재해, 지진이 일어난다. 그러나 큰 지진을 생겨나게 하기도 하고, 큰 고요함을 생겨나게 하는 “주님”폭풍들과 바다까지도 그 분께 복종하고 있는 그 분의 능력을 보여 주신다.

제자들은 주님의 큰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가장 큰 고난을 당하도록 선택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은 “겁내는 그런”상황이 오히려 믿음이 나타날 때이다. 그들의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인자가 영광으로 나타날 때이다.

육체로 임재하실 때 그 분이 하신 일을 영적인 임재 가운데, 제자들을 통해, 교회를 통해 성령으로 일하신다.


R. T. France,

18-22는 두 명의 잠재적 제자의 행동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중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는 “카리스마적 기도자”.  “율법, 경건, 그리고 관습에 날카롭게 역행하는” (M. Henkel) , R. T. France, 324.

18-22는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 헌신되지 않은 ‘무리’와 완전히 헌신된 12명 사이의 회색지대의 사람 두 가지의 경우를 보여 준다. 다양한 반응은 씨부리는 비유에 의해 선명해 진다 (13:3-8, 18-23) , R. T. France, 325.

누가는(눅 9:57-62) 3명의 잠재적 제자를 말하지만, 마태는 세 번째 경우를 생략, 마가의 일반적 경향, 세 번째 인사하러 가는 것은 두 번째와 비슷하기에, R. T. France, 324. 각주 6.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을 누가는 예루살렘 십자가 지기 위해 여행하는 출발 지점에서 다룬다.


18절, 예수님은 사람들이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또나 가기를 명령5:1, 14:13)

크리소스톰:  그 분은 과시하지 않는다.  그 분은 우리가 알 듯이 육체의 치유자 일 뿐 아니라, 영혼의 치유자요, 자기 절제를 가르치는 교사다,  Chrysostom, 185-6.---그 자신을 나타냄에 의해, 그들의 질병을 보냄에 의해,  나타내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  의해. ,  Chrysostom, 186.

사람들은 그 분이 산에서 가르침을 끝내고 따랐고, 치유를 끝내고 따랐다. 그 분의 얼굴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우리도 지상 상황 끝난 후 구름 속에서 그 분의 영광을 볼 것이다. ,  Chrysostom, 186.

그 분은 물러 간다고 하지 않으시고, “저 편으로 떠나 간다”고 하여 다시 만날 소망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Chrysostom, 186. (HS  지나친 해석.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살피려는 크리소스톰의 방법론은 배워야 한다.)

칼빈; 252페이지, 앞쪽에 따로 다룸. 다른 복음서들은 갈릴리로 갔다고 하지만, 사실은 강 건너 편이므로 갈릴리로 가지 않았다고 말함. 즉 가버나움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봄., Calvin, 252. 

사람들의 압박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있기 위해 . , R. T. France, 325.

마가는 제자들이 떠나는 것으로 말하지만 (아마 막 4: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로”에서 온 듯) , 마태는 예수님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  그 분이 무리를 보고 떠나는 것은 무리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뒤에서 보겠지만, 그들이 그 분을 제자로서 따르게 하기 위해서다, Robert H. Gundry, 151. 

누가의 경우는 제자로서 출발하는 것을 말하지만, 마태의 경우는 제자도의 진성성에 강조점이 잇다. “이 복음서 기자는 교회가 거짓과 참된 기독교인으로 섞인 조직임을 염두에 두고 있다.”, Robert H. Gundry, 151.


18절 가다라 지방

데가 볼리로 알려진 곳 헤롯이 통치하지 않는 헬라의 자치도시. 돼지를 키우는 등 외국 지역으로 유대인들은 그 곳으로 ‘떠나 가기’를 꺼린다. , R. T. France, 325.

누가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의 맥락에서 다루는 것을 마태는 이곳에서 다룬다.

19절 나아오는 것

5:1

8:2, 문둥병자, 5 백부장.


19절, 한 서기관이 나아와서 그 분께 말했다. 

크리소스톰:  한 사람은 부와 교만, 부적절한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 나왔다.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한 부자 관원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부적절한 만용을 꾸짖지 않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그런 것을 참아 내도록 가르친다. 그래서 그 분은 그들을 공개적으로 책망하지 않고, 그들의 은밀한 생각에 대해 대답하여 그들이 책망 받는 것을 그들만이 알도록 내려 둔다. 그래서 이중적으로 유익을 준다. 먼저는 그 분은 그들의 양심을 안다는 것을 보여 주고, 다음으로 그들에게 이 드러냄 후에 감춤을 주어서 그들이 원한다면 자신이 다시 회복하도록 허락한다. 이 사람에게 대해서도 그렇게 한다.”,  Chrysostom, 186. (HS-크리소스톰은 주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고려하는 것을 계속 찾고 있다.)

그는 이익을 추구하고, 부를 추구했다. 

1) 사람들의 악을 공개 책망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대답에서 그들의 목적을 노출하는 예

a)  “네가 왜 나를 선한 선생이라 하느냐?”,  Chrysostom, 186. 

b)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가”“누가 나의 어머니요 형제냐? 친척됨을 과시하는 것을 문제 삼음,  Chrysostom,187.

 c)  “자기를 나타내소서”“너희 때는 항상 있으나 내 때는 아니다.”

2) 반대의 경우 (좋은 것을 드러낸 경우를 의미: 해신)

a)  나다나엘 “보라 악이 없는 참 이스라엘”

b)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본 것을 말하라.


c)  “무엇을 보러 광야에? 흔들리는 갈대? 좋은 옷 입은 사람?” 요한은 흔들리는 갈대 아니고, 부를 탐하지 않음을 보여 줌. “그들의 양심”에 말함. ,  Chrysostom, 187.

그 사람에게 “나는 실로 그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멸시한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다”고 말하는 “큰 부드러움”과 “눈높이 맞춤 condescension”- 세례 요한과 대조적으로 먹기를 탐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 낮아지심. ,  Chrysostom, 187.

그 사람에게

칼빈: 따르려는 한 사람은 떠나 보내고, 떠나려는 사람은 묶어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기관은 조용하고 편한 삶에 익숙해 져 있고, 영예를 즐겼기 때문에, 비난들, 빈곤, 박해들, 그리고 십자가에 잘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실로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쉽고 편한 생활, 각종 편리함으로 채워진 집들을 꿈꾸고 있다. 반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가시들 가운데 걷고, 계속된 환난 가운데 십자가로 행진해야 한다. 그가 더 원할수록 그는 덜 준비되어 이다. 그는 마치 그늘에서 쉽게 , 땀과 먼지에 시달리지 않고, 전쟁의 무기들이 날아오지 않는 곳에서 싸우기를 원한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그런 사람들을 거절한 것을 놀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심각히 생각하지 않고 달려 오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것이든 첫번째의 불편함을 당하면 좌절하고, 포기하고, 자기 임무지역 (초소, post)를 거의 내버린다.  뿐만 아니라, 이 서기관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가정의 식탁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수고하지 않으면서 사치스럽게 살 수 있는 곳을 추구하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경고를 받자.  십자가나 환난들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가볍게 혹은 쉽게 자랑하지 말라. 반대로, 어떤 조건들이 우리를 기다리는 지를 일찌감치 생각하자.”, Calvin, 388.

나아 옴, 25절, 제자들이 나아 옴

 5:1, 8:1

, R. T. France:  보통 유대 관습에서 학생은 자기가 원하는 랍비를 선택할 수 있는 관습이 있으므로, 예수님이 그를 부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원했다. 아직 제자도가 뭔지 잘 모르고. , R. T. France, 326.

21절에 “제자들 다른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


19절, 선생님.

누가에는 없는 것을 마가는 삽입, 예수님의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Robert H. Gundry, 152.
마태복음에서는 오직 제자 바깥의 사람들만 이 호칭 사용. 가롯 유다는 그 히브리어인 랍비를 두 번 사용 (26:25, 49) , R. T. France, 325.

1) 부자 관원 (19:16)

2) 바리새인 (12:38, 22:16, 24, 36)

3) 세리 (17譬)

4) 헤롯당원 (22:16)

5) 사두개인 (22:24), Leon Morris, 200.


19절, 어디로 떠나 가시든지

“당신이 어디로 간다고 해도 wherever  you may be going to” 장기간의 헌신이 아니라 그냥 건너편에 가는 것일 수 있다.  , R. T. France, 326. 


20절,  여우도 들을,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칼빈: 그리스도 뿐 아니라 제자의 삶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영접한 호의적 사람이 있었는데도 왜 이것을 말하는가? 서기관에 경고하지 위해서다. 선생님 그분 자신이 빌린 집에서 빈궁한 생활을 하는데, 서기관 자신이 마치 부자 선생을 가진 것 처럼 풍요롭고 부유한 고용이 될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 Calvin, 288-9.

제자들은 과거형으로 말하고, 예수님은 “말한다”고 “역사적 현재는 예수님이 교회에도 말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Robert H. Gundry, 152.

머리 둘 곳 없는 것은 단순히 집이 없는 것이 아니다. 누가의 경우에는 예루살렘에서 버림 받기 위해 떠나며 집이 없다. 마태의 경우는  가다라 지방에서 배척될 것이고 배에서 주무신다. , Robert H. Gundry, 152.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앞의 배 여행이 아니라,  그 분의 제자들이 헌신한 순회 생활스타일을 말한다. 목수의 아들 (13:55) 로 사회에서 안정된 지위가 있었지만  고향을 버렸다 (4:13) . 가버 나움에서 머리 둘 곳이 있었고 때로는 여행 중 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베다니, 2:16 26:6), 실로 제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기대했지만 (10:11). 그러나 지금 배타고 가는 순회 여행 (4:23)에는 숙소가 확실하지 않다. 실제 그 분은 배에서 잠잔다 (24절).  공중의 새의 “일반적인 거주지”말함. , R. T. France, 326.

머리 가누신 때 (클리노): 십자가에서 (요 19:20) “주님 the Master는그 분의 사역 동안에 가지지 못했던 쉼을 거기서 발견했다.”, Leon Morris, 201.


20절, 사람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 자기를 지칭하는 말로, 그 분의 그 룹 외의 집단에게 사용. 마 16:13에서 “인자”를   같은 평행 본문인 막 8:27에서는 “나”로 사용.  원래 다니엘 7:13-14에서 ‘인자 같은 이’는 “하나님에 의해 하늘 보좌에 앉혀져 있는 승리하는 인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이 본문의 언어와 이미지를 반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성경적 자료로부터 그 분 자신이 선택한 호칭을 만들어 내고 coin, 그것을 원래의 그 분의 하늘의 영광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그 분의 사역의 측면들을 언겁하는 것으로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한다.” 마태복음에서 세 가지 의미

 䄙) 그 분의 미래의 하늘의 영광 

2) 그것에 선행해야 하는 지상의 고난,

  3) 더 적게는, 그 분의 현재 지상의 신분과 권위”


“예수님이 이 호칭을 편하게 생각한 이유는, 당신 용법에서 이미 만들어 진 호칭으로서의 함축이 없었기에, 그것은 그 분의 낮아지심과 인정되심 vindication, 죽음과 영광 등, 기존의 어떤 모델에도 맞지 않는 그 분 자신에 ehr특한 역설적 사명의 전 범위에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분의 비유들이 그러하듯이, ‘인자’라는 칭호는 수수께기와 같이,듣는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진 구멍 안에 집어 넣기 보다 새로 한 생각을 하도록 도전했다.”, R. T. France, 327.

9:6, 12:8에서는 그 분이 단 7:13-14에서 말하는 하늘의 영광과 상당히 떨어져 있는 현재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9:6과 12:8은 권위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현재의 상태지만).  마태복음이 진전될수록 인자의 하늘의 권위가 더 분명해 지겠지만, 이 본문은  그 영광과 동떨어진 상태. “제자들의 인간적 조전의 모든 불안정을 공유하는 상태”를 말한다. , R. T. France, 327,8.

레온 모리스

1) 미래 영광- 14번 (10譫, 12:32, 13:41, 16:27, 28  19:28,  24:27,30, 30, 37,39, 44,  25:31,  26:64)

2) 배격과 고난- 10번 (12:40, 17:9, 12, 22, 20警,28,  26:2, 24, 24)

3) 지상 사역- 7번 (8:20, 9:6, 11:19, 12:8, 13:37, 16:13, 18:11

다니엘 7:13-14에 기원. 하나님께 가깝고 메시아적 의미를 가진 분 이것을 쓴 이유 네가지

1) 드문 용어요, 민족주의적 연관들이 없기 때문

2) 신성의 의미 ,overtone

3) 사죄적 의미들,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의미

4) 인간성에 대한 undertone. 그 분은 우리의 약함을 취하심. , Leon Morris, 202.


두 번째 헌신자.

21절, 그  제자들 중 한 사람.

12명 이외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

‘하늘 나라의 제자된 서기관’(13;52), 아리마대 요셉 (27:57에 적용.  “마태는 이 용어를 잠재적 헌신된 추종자, 예수님과 함께 여행하려 생각하는 자원자”의 의밀로 사용, R. T. France, 328.9


21절, 주님 먼저 떠나 가서 저의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주소서.

크리소스톰:  이 사람은 거룩한 의무를 다하겠다는 것.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말하신다. 아마 여기 죽은 자는 “그 분의 죽은 자”가 아니라 “불신자”로 생각된다.

게을러서 매장하지 않으면 부모를 경시하는 것. 그러나, 여기서는 하늘의 것이 너무 귀하므로 생략하라고 한다. 우리도 영적 관심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지혜 (필로소피아)를 보라. “그 분은 이를 그 분의 말에 못박았다. 이를 통해 그를 끝없는 악들로부터 자유케 했다. 매장 이후, 유언장 점검, 재산 분할 등등으로 마침내 진리의 항구에서 멀어지지 않ㄷ록 예방했다. 그를 그 분께 가까이 오도록 묶는다 ,  Chrysostom, 197.

그런데 만약 병이 걸린다면, 무덤에 가지 못한다. 영적인 일 때문에 못하는 것은 더 당연하다.   다른 곳에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거기에 아무 유익이 없는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 보다, 복음을 전하여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해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에게 긴급한 것이 많을 지라도 한 순간도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됨을 배운다. “가장 중요한 일일지라도 영적인 것 보다 먼저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인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듯이 보이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악을 행하면서 살아 있는 경우는 죽은 사람 보다 전혀 낫지 않다. 혹은 죽은 사람 보다 너 못하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죄로부터 벗어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롬 6:7)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육적으로 죽은 사람 보다 더 못한 상태:

정욕이 야수 보다 더 찢는다. 무절제로 썩어 간다. 온 곳에 악의 냄새, 죄에 묶여 있는 것 보다 몸이 묶여 있는 것이 낫다. 손은 배에 탐욕으로 묶여서 구제하지 못한다. 염려에 묶여 하나님의 집으로 오지 못한다. ,  Chrysostom, 188. 

죽은 사람은 사람 같지 않듯이 영적으로 죽은 영혼은 영혼 같지 않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일으켰듯이 이런 영적으로 죽은 자를 일으키도록 기도하자. 그들의 비참에 대한 무감각의 돌을 치워 주자. 그들의 묶인  것을 치워 주자. 나사로의 무덤의 냄새 때문에 누이들도 피했지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 주님을 산 채로 만날 그 날까지.  우리가 이렇게 삶을 영위하면, 우리 이웃도 내세를 얻을 것이다. ,  Chrysostom, 189.

칼빈: 아마 이 사람의 아버지는 아주 나이가 많은 듯하다. 그는 부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할 시간을 위해 좀 떠나게 해 달라고 부탁한 듯하다.  부모의 죽음 까지는 자유가 있는 것으로 본 듯하다.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자녀들은 자기 부모들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다른 일로 부를 때 그들은 이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명령에 첫 번째 위치를 두는 식으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그 분 자신에게 즉각 해야 하는 일이라고 명령할 (iubet)때에, 그 의무는 우선순위에서 뒤져야 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로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요구로부터 부르심이 요구하는 것을 바로 보고, 땅의 부모가, 우리 모두의 최상이며 유일한 아버지의 명령 (ius)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Calvin, 389.

21절, 죽은 자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칼빈: 그리스도께서 매장을 금지한 것으로 보는 것은 수치스럽고 잔인. 왜냐하면, “매장은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기원된 관습이며, 부활의 소망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도들에게 의해 시행된 것”, Calvin, 389-90.  “이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다음을 가르치려 하셨다. 우리를 정도로부터 벗어나게 하거나 지체하게 하는 것은 죽음 이외의 단어가 적합하지 않다. 혹은 마치 그 분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모든 열심 studia와 모든 부분의 삶을 하나님에 대한 복종에 바치는 사람만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땅에 붙어서 subsidunt 복종을 사람에게 바치고  preebeant  moriebus 하나님을 지나치는 pretereunt 사람은 죽은 사람가 같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돌보는 일에  헛되고 유익없이 일하고 있다.frustra et  inutiliter occupant. , Calvin, 391.


두 번째 사람의 경우 “주님”이, 누가에 없던 것이 첨가된 것도 앞서 “선생님”이 첨가 된 것과 같이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Robert H. Gundry, 153.

누가의 경우 “떠나서”는 분사인데, 마태는 허락의 대상이 되는 첫 번째 동사로 만든다. 그래서 아버지를 장사지내기 위해 떠나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 떠나는 것과 아주 대조를 이루게 한다. , Robert H. Gundry, 153. 

유대인 관습에서 매장은 24시간 내에 급히 이루어 져야 한다. 이 것부터 먼저 하고 따르려 함. , R. T. France, 329.

24시간 이내에 부모를 매장하는 것은 긴요한 임무. 대제사장도 부모의 장례를 위해서는 더럽힘을 허용.  

일반인들도 기도의 의무, 율법의 연구, 성전 제사, 할례, 유월절 희생의 죽임, 마길라읽는 것 등도 면제 (Ber 31, Meg 3b). 매장 후 1주일간 곡하는 의무. 이 사람이 집을 떠나 있는 것을 보니, 실제 뷰모가 죽은 것은 아닌 것 같다, Leon Morris, 203.

그러나,  K. E. Bailey. 이 용어는 “임박한 임종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남은 여생동안 자녀의 책임을 다하는 것에 대한 관용구”(아랍 주석가들과 자신의 중동 문화와 관용구 경험에 기초하여) 이 점에서 기다리는 것은 며칠이 아니라 몇 년이 될 수 있고, 그가 제안한  제자도의 지연은 심각하지 않았고, 그 점에서 예수님의 대답은 덜 쇼킹하다. , R. T. France, 329.

이렇게 받아들이더라도 예수의 요구는 깊이 뿌리 박은 문화적 기대들”과 상충되고, 자녀의 의무를 다하는 자들을 ‘죽은 자들’이라 말하는 것은 가혹하다. , R. T. France, 329,30. 謄절 처럼, 그것은 그 사람을 뽑아 내는 심한 표현이다. 예수님의 요구의 문화적 ‘감수성 없음’은 하늘 나라의 메시지의 급진적 새로움과 비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가족 연대의 가장 중요한 기분도 그것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4:22, 1037, 12:46-50, 19:29) 참조. 하늘  나라에서 참 생명을 발견한 사람과 비교하면, 바깥애 남아 있는 사람은 ‘죽은 자들’이다.  영적인 삶이 없는 사람에게  네크로스 (문자적으로 죽은 자, 시체)라는 이 상징을 사용하는 것은 복음서의 다른 본문에는 없지만, 그것은 10:39, 16:25-26 과 같은 말의 빛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상징이다. 또한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 나타난다 (엡 2:1, 5, 골 2:13, 계 3;1). 제자의 임무는 생명에 관련되어 있지, 죽음에 관계된 것은 아니다.”, R. T. France, 330.

그러나,  Robert H. Gundry는 본문에 그런 암시가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본문이 이런 의미를 전혀 가지지 않고, 예수님이 즉각적이고 불순물 없는 제자도에 대한  강력한 imperious  요구를 완화시키는  것은 마태를 offend하고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 자신 – ‘내를 따르는 것은, 엘리사를 그의 부모님에게 인사하는 것을 허락한 엘리야를 따르는 것 보다 더 긴박하게 요구한다’고 말하셨을 예수님 –을  offend할 것이다. 

이런 요구는, 예수님 자신이 인정한 오계명의 요구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서기관들과 가는 권위’를 가진 예수님이 이것을 요구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간여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하늘 나라는 정상적인 사회 생활의 리듬을 혼란케 하는 것을 기꺼이 하려고 하는 어느 정도의 열광주의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apparently. 참된 제자도는 소수 운동으로 남았고, 그 분의 가르침과 치유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완전한 제자도가 부족했음에 대해 예수님은 거의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초대된 사람은 많지만, 선택된 사람은 적다 (20:16, 22:14, 참고 7:14)”, R. T. France, 331.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매장하게 하라.”, Leon Morris. “왕국의 주장들은 절대적이고 즉각적이다”(Nixon) , Leon Morris, 204.



8:23-9:8. 두 번째 그룹의 기적.

1) 지리적으로 강을 건너 갔다가 강을 건너 오는 것.

2) 주제: “전례없는 예수님의 권위’ 세 번째의 분명한 초점 (9:6-8). 그러나 첫 번째 제자들의 반응 (8:27), 두 번째 데가볼리 사람의 반응 (8:27)에 나타남. 

첫번째 그룹은 육체적 치유였고 (비록 8:16에 요약이 나오지만) , 이 구룹에도 세 번째 중풍병자의 치유이지만, 주요 초점은 아니다. 이제 새롭게 세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의 권의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바람과 물을 잔잔하게 하고, 마귀의 영을 추방하고, 죄를 용서하는 것을 통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하는 것이 보다 강고하게 물어진다. , R. T. France, 333,4.

마가와 비교.

마태는 이야기 자체 보다 귀신이 알아차린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에 초점. 가다라 귀신 추방을 마가는 330단어, 마태는 135개로 간략하다.  마가에서 추방된 귀신의 반응 (5:15, 18-20)은 마태에 생략.  중풍병자 추방도 지붕을 뜯는 장면 마태는 생략. 폭풍이야기도 축약. 예수님이 이물에서 주무신다는 표현도 생략. , R. T. France, 334.

HS: 마태의 관심은 그 육체적 임재 가운데서 일하셨던 그리스도의 임재를 지금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영적 임재 가운데서 어떻게 믿고 제자로서 따를 것인가를 다룬다.


23-27절: 바다의 폭풍

크리: “그 분이 그들을 데려 간 것은 이유 없지 않고, 혼란으로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기적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가장 탁월한 훈련자처럼, 그분은 두 사실을 보도록 기름붓고 있었다. 위험에 실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명예롭게 차분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들이 교만해 지지 않도록 –왜냐하면 가들 사람들은 보면서 그들은 같이 있게 했기 때문에 – 그  분은 그들이 바람에 의해 던져지게 한다. 이것을 교정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시련들을 고상하게 견디도록 훈련한다 discipline.”

“왜냐하면 이전의 기적들도 위대했지만, 이것은 그 안에 일종의 훈련이 들어 있고, 사소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유사한 표적 (역자 각주: 홍해의 기적- 나중에 말함)이다. 이 때문에 그 분은 제자들만 그 분과 함께 데리고 간다. 왜냐하면 기적들을 나타날 때는 그 분은 백성들도 함께 있게 했듯이, 이제 시련들과 두려움들이 그 분에 대항하여 일어날 때 그 대는 그 분은 그 분이 훈련하시던 온 세상의 챔피온들만을 데리고 있다.”, Chrysistom, 189.

칼빈:  Saboro (기원전 63/4-24 AD) 그의 지리학 책은 라틴어로 1469년 출간.  모두가 알듯이 게네사렛 호수는 정결하여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건전. 사보로를 인용하여, 가데렌 호수는 정결하지 않고  균이 있다고 말함. 그래서 두 개의 호수. 여기서 언급된 호수는 게네사렛. 그것을 건넌 후에 예수는 가다렌에 도착  (마태가 말하는 겔레센, 8:28? 사본이 다른 듯). 시기를 마태와 누가는 말하지 않지만, 마가는 씨 부리는 비유 이후라고 말함. 마태와 누가는 시간 순서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음. 그래서 누가는 “어느 날”을 삽입. , Calvin, 422,3.

칼빈: 폭풍이 우연히 일어난 것은 아님. 하나님이 어떻게 그 분의 아들을 파도의 폭력에 의해 아무렇게나  움직이게 하겠는가?  이 기회를 통해 사도들의 믿음이 얼마나 약한가를 알도록 기회를 만듬. , Calvin, 423. (크리소스톰이 그들 믿음의 연약함을 나타낸다고 이미 말한 것을 칼빈이 인용)

“(그리스도는 가짜로 주무셨다는 어떤 사람의 주장과 달리, 그 분은 진짜 주무셨지만) 그럼에도 분의 신성이 그 분 위에 돌보았기에, 사도들은 위로가 즉각 제공되지 않거나, 도움이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을 것 처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알자 sciamus.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arcana Dei Providentia에 의해 다스려 졌다 fuisse gubernatum. 즉 그리스도가 주무셨고, 강한 바람이 일어났고, 파도가 배를 덮었고 그리고 배가 금방 파선할 위험에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배우자 discamus. 어떠한 어려움이 일어날 때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주님에 의해 연단되고 있다는 것을 tentari.   그런데 autem 만약 재난 mala이 너무나 거져서 우리를 압도할 정도로 높아진다면,  ut 우리의 인내를 훈련하고 그리고 이렇게 하여 우리의 감추어진 약함이 빛 가운데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동일한 하나님의  협의/계획consilium으로 일어남을  fieri (배우자가 생략). 이것은 사도들이 다도에 의해 덮일 때, 전에 감추어 져 있던  latebat 그들의 약함이 드러난 것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다.” , Calvin, 424. Latin, 265

여기서 감추인 섭리arcana Dei Providentia와 consilium을 같은 의미로 사용.

폭풍이 하나님의 장엄의 표시- 출 19:16-25, 시 29:1-11, 사 63:19-64:2, 겔 1:4-28구약에서 하나님이 바람과 폭풍을 지배하고 (요1 38:8-11, 시 65:5-8, 89:8-9), 특히 시 107:23-30의 폭풍 장면을 메아리친다. 

여호와께서 바다를 잠잠케 하는 것- 시 65:7,  89:9, 107:23-32.

“그 외의 예수님의 자연 기적 (14:15-21, 23-33,  15;32-38, 21:18-22)는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으며, 기독론적 함의는 여기서 오직 수사적 질문 (27절)에서 나오지만, 하나의 유사한 기적이 1433에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첫번째 분명한 인정을 하게 할 것이다.”거기에 예수님의 신적 권한에 대한 자기권위 주장,  죄용서(9:3-6)를 더한다면,  어쩌면 이사야 그 자신이 의도한 것 이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1:23)이라는 호칭의 그 이상의 문자적 차원이 있다는 것, 바로 제자들에게 점진점으로 명백하게 된 것을 마태의 독자들이 인식하도록 마태는 의도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 R. T. France, 3334.


그러나 본문은 제자도에 관한 것.

23-27은  배타고 풍랑 만난 것은 제자도에 관한 상징

1)  제자 (21,23), 따른다 (19,22,23) 반복. 

2) 마가복음은 제2자들이 먼저 배에 들어가 있고 예수님이 오심 (4:24), 마태는 예수님이 들어간 후에 제자들이 다라 오는 것으로. 

3) 제자들이 “구하소서”하니까 예수님이 잠잠케

4) 마가복음은 풍랑 잔잔하게 한 후에 제자들에게 구짖음, 마태는 먼저 제자를 혼내고 풍랑을 꾸짖음, R. T. France, 335

5) 선생님, 주님이 반복, R. T. France, 324.

6) 나아와  (19, 25) HS

본문이 ‘패라다임적 의미’가 있다고 해서 예쉼의 기적 자체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아니다. 마태의 “의미의 다차원성”을 기억하라. , R. T. France, 335

제자도의 위험과 영광에 대한 복음적 패라다움이 된 이야기”“제자들이 바다 위에서의 필요가 예수님의 제자도에 전반적으로 간여되어 잇는 역경의 상징이듯이, 역시 같은 관련에서 그 분의 말씀이 일으키는 큰 평화는 요한의 말… (요 16:33)의 의미를 취한다” (G. Bornkamm) , Leon Morris, 204 재인용.

해신: 역사적 비유. 제자들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친다.


23절, 그리고 그 분이  그 배에 들어가신 다음 , 그 분의 제자들이 그 분을 따랐다.

마가는 다른 배들도 그 분을 따랐다고 하지만, 마태는 한 배만 있다고 함, Robert H. Gundry, 154.

마가와는 달리 마태는 예수님이 먼저 배에 들어 갔다고 말함으로써, 제자들은 그분을  “따르는 자”임을 강조한다. , R. T. France, 324. 326.

12명의 제자만 만 것은 배의 크기를 고려한 실제적 고려가 있었을 듯. 어쩌면 앞에 나온 두 명 제자는 자격 되도 차지 못했을 수도!

당시 배가 발굴된 것에 의하면, 가로  8.2* 세로 2.35* 깊이 1.25m, R. T. France,336.

그 배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항상 타던 배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 Leon Morris, 205.


24 그리고 와, 큰 지진바다에서 생겼고, 그래서 그 배가 파도들에 의해  덮이고 있었는데, 그 분 자신은 주무시고 있었다.

크리: 누가는 베게를 베고 주무셨다고 함으로써, 그 분이 교만으로부터 자유함을  보여 준다. , Chrysostom, 190

다들이 생긴 것을 마가는 역사적 현재로 사용하지만, 마태는 누가와 함께 aor로 변화 (그래서 마가의 역사적 현재를 오직 예수님에게만 적용하여 현재의 독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현재적으로 읽게 한다: 해신).마가와 누가의 ‘아이랍스  아네무”를 “세이스모스”로 바꿈. , Robert H. Gundry, 154

세이스모스- 보통 지진이 아니라 파도이므로 ‘바다에서’를 첨가. 

24:7  마지막 날의 해산과 같은 것

2754, 예수님의 십자가

28:2 부활 – ‘카이 이두 에게네토, 메가스’가 8:24와 겹침- “그래서 여기서의 지진은 묵시적 재앙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위협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의 위엄의 표시다.  바다에서의 큰 흔들림은 그 분의 부활에서의 예수님의 위엄을 미리 보인다. 그 때 큰 흔들림이 다시 일어나고 거기에 대해 그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장하신다. 마태가 요나 1:4의 용어로 (특히 히브리 본문 참조) 폭풍을 특이하게 묘사하는 것의 유사성은 그가 요나의 경험과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 (12;40)을 결합하는데, 이 목적은 큰 흔들림을 부활한 예수의 권위를 미리 보여 주는 상징으로 확증하기 위해서다. “, Robert H. Gundry, 155.


HS: 단지 표현의 일치  때문에, 바다의 흔들림을 부활의 이미지로만 결부시키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오히려, 마태 복음에 나온 이 모든 흔들림은 구속사적 진전에서 하나님=그리스도께서 구속사를 진전시키는 과정들로 보는 것이 좋겠다. 종말의 묵시적 고난은, 십자가의 흔들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구원으로 이어진다. 이 흔들림의 시작 (8:24)과 끝 (28:2)에서 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모두를 하나의 연결된 흐름으로 보게 한다. 그 그리스도의 장엄과 종말론적 저주의 결합은 “머리 둘 곳 없는 인자”(8:20) – 인자에 대한 첫 언급과 연결된다. 

인자는 마지막 종말의 영광 가운데 오시지만, 그 이전에 지상에서 고난을 당해야 하는 “인자의 역설”그 역설은 이 땅에서  바다 가운데서도 나타난다. 인자자 “머리 둘 것 없는”초라함으로  폭풍에 흔들이는 배에서 자는 것과 동시에, 다른 한편 폭풍을 잠잠케 하는 그  능력의 역설적 종합, 그 바다 경험의 역설은 그리스도의 인자의 사역의 역설을 나타낸다. 

Bornkamm이 말했듯이 폭풍경험은 큰 지진에서 나타난 고난과 큰 잠잠함에서 나타난 평화가 결합되어 있다. 이 역설적 결합은 인자 자신의 역설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역설이다.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그 분의 역설적 사랑. 사람을 위해 신이 죽으시는 역설. 설명할 수 없는 역설을 우리 앞에 나열하고 있다. 제자들과 함께 모든 사람들은 “도대체 이 어떠한 자인가?” 인간의 지식으로 정체불명의 존재로서 하나님은 다가 오신다. 가시적 표현이 큰 지진과 큰 잠잠함이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모든 성도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제자들이 질문하여 배워 갔듯이 우리 시대 제자로 부름받은 성도들도 제자들이 경험한 당혹한 경험 가운데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경험하며 믿음이 성장한다. 

“믿음이 작은 겁쟁이”를 제자로 부르신 그 분의 역설이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다. HS.


24절, 덮다.

마가의 ‘에피발레인, 게미제스타이 , 물결이 부딪쳐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니”(막 4:37)을 덮었다고 바꾼 이유는 ‘힌들림’과 일치시키기 위해, “물결들의 높아짐은 배가  물결들 사이에 들어가서 시야를 가린다.”로 바꿈. 

 마가는 “그리고”예수는 주무셨다고 하는데, 마태는 “그러나”로 바꾸어 보다 자연스럽게 한다. 또 마가가 예수님이 베개를 벤 것을 생략. ‘엔, 카투돈’을 ‘에카튜덴’으로 바꾸어서 요나 1:5와 일치시킴.  “이 짝지움은(“그러나, 에카두텐”- 요나 1:5의 LXX 표현임, 해신)  큰 흔들림이 예수의 장엄한 권위의 상징이라는 점에 강조점을 두고, 베개를 생략함으로써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예수님의 진술과 상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Robert H. Gundry, 155.

바다 보다 낮은 네게사레 호수 갑작스런 폭풍. 수면 보다 210m 낮음.

덮였다는 것은 시야가 가려 짐을 의미. , Leon Morris, 205.


25 그리고 그들이 나아 와서 그 분을 일으킨 다음에  말하기를, 

주님, 구원하소서 (a or). 멸망하고 있습니다.”


칼빈: 경건한 기도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므로, 우리는 어떤 점에서 그들이 죄를 지었는지를 알아 보아야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이 그들의 주님의 육체적 임재에 너무 많이 고정되어 있었다. Eqüidem non dubito, in carnali magistri praesentia fuisse nimis defixos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마가에 의하면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 보지 않습니까”고 항의 했고, 누가는 혼돈과 떨림을 묘사한다: “주님, 주님 우리가 멸망하나이다.”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분의 육체적 잠에 의해 눌리지 않았음을 믿어야 했고, 그 분의 신성으로 도피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극단적 위험이 그들을 다급하게 할 때 까지 가만히 있었다 quiescent. , Calvin, 424.그 때야 그들은 부적절한 immodicus 두려움으로 압도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시지 않으면 그들이 안전하기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Calvin, 424-5.  이것이 그 분이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한 이유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그 분의 신적 능력을 확신하고, 고요함 가운데 그런 두려움 없이 그들이 간구한 도움을 소망했다면, 그분이 그들을 도와 달라는 그들의 간구는 믿음의 증거였을 것이다.”, Calvin, 425.

“모든 두려움은 죄악되고 믿음에 배치되는가? 첫째, 그 분은 그들을 단지 두려워 했기 때문이 아니라, 겁장이었기 때문에 책망한다. 마가는 후포, 를 첨하하여, 이 말로서, 그들의 놀람이 과도하게 나갔음을 가리킨다. 이에 더하여 그는 믿음과 두려움을 대조시키고, 이리하여, 그는 부적절한 두려움, 믿음을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사라지게 하는 경향에 대해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여 준다. 모든 두려움이 믿음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을 통해 이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으면 게으르고 육신적인 안정이 우리 위에 숨어 든다. 그리고 이리하여 믿음은 약해지고, 기도할 마음이 게을러 지고 하나님을 기억함이 마침내 꺼져 버린다. 이 외에도 재난들의 장면에 두려워 하면서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굳세기 보다 둔감하다.

따라서 믿음을 일으키는 두려움은, 한계를 넘어가기 전 까지는 그 자체로서는 오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의 과도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평안을 얻어야 하는  acquiescere 믿음의 평안 fidei tranquilitas이 혼란 혹은 약해  짐에 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믿음이 손상받지 않도록 그렇게 자신을 절제하는 일은 전혀 없으므로, 그들의 두려움은 항상 죄와 동반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종류의 두려움이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오직, 양심의 평화 constantiae pacem을 혼란시켜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지 않는 그런 두려움만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Calvin, 425.

마가는 그들이 일으키는 것을 현재형으로 두지만, 마태는 단순과거로 바꾸어서, 예수님의 말은 현재로 함.  마가는 그들이 말하는 것도 역사적 현재로 쓰지만, 마태는 분사로 바꿈, “이것은 스타일의 문제일 수 있지만, 어쩌면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의 말들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Robert H. Gundry, 155.

주님은,  제자들이 마태복음에서 예수를 부르는 표현 (14:28, 16:22, 17䄦, 18:21, 또 그 분을 믿으려는 사람들  8:2,6,8, 9:28등. , Leon Morris, 206.

멸망한다. 마태에 19번 다양한 재난들에 대해 말함. 멸망하고 있습니다는 현재진형의 의미는 그들이 이미 진행. 그들이 고통의 부르짖음, Leon Morris, 206. 

배 전문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나사렛 출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마가는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아보지 않습니까?라 했지만 마태는 “구원하소서”


25절, 구원하소서 멸망하나이다.

이 이야기는 제자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야기는 오히려 예수님의 장엄함으로 전환된다. 19절에 도입한 선생님 대신 주님을 사용 (HS, 이미 21절에 주님이 사용되었는데?).

마가는 “우리를 돌아보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누가도 그대로 두지만, 제자들은 ‘구원하소서”하면서 기적을  요청한다. 14:30에서 베드로도. , Robert H. Gundry, 155,6.

우리가 멸망하고 있습니다 (아폴루미, 요나 1:6 우리가 멸망하지 않ㄷ록) , Robert H. Gundry, 156.

해신: 마 16:15와 구원과 멸망. 영혼을 구원하여 하면 멸망한다. 차라리 멸망한다면 구원한다.


26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겁쟁이들이고  있느냐?  믿음적은 자들아”

그 때 일어나신  다음에  그 폭풍들과 그 바다  꾸짖었다.

그리고  큰 고요함이 생겼다.

크리소스톰: :그러나 그 분은 바다를 꾸짖기 전에 그들을 먼저 꾸짖으셨다. 왜냐하면 내가 말했듯이 훈련 discipline을 위해  이것들이 일어 났으며, 그것들은 그들에게 덮칠 유혹들에 대한 type 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들 후에 다시, 그 분은 종종 그들이 더 슬픈 일들 (프라그마톤: 일들, 혹은 고소들-해신)의 폭풍에 빠지도록 할 것이고 그것들을 오래 동안 견디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진 것을’이라고 하고, 그 후에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고후 1:8,10)라고 했다.  따라서 이를 통해 그들은 파도들이 높이 올라와도 확신해야 하며, 그 분은 모든 것을 유익을 위해 질서지운다/명령한다 order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 분은 먼저 그들을 책망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바로 놀람은 유익한 일이었는데, 기적이 더 크게 보이도록 하고 그들의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Chrysostom, 190.

“따라서 모세도 먼저 뱀을 두려워 하고, 두려워 할 뿐 아니라 많은 환난이 있었고, 그리고 그는 그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출 4:3,4). 이것들도, 먼저 그들이 멸망하는 것 처럼 보이고, 그리고 구원받아서, 먼저 위험을 고백한 다음에 그들이 기적의 위대함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 본은 잠잔다. 왜냐하면 그것이 일어났을 때 그 분이 깨어 있었으면, 그들은 두려워 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들은 그 분을 창지 않았거나 그들은 그 분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많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은 그들의 무서워함의 기회를 주고, 그들이 일어났던 것이 더 분명하게 인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 부은 주무신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은 다른 사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과는 같은 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유익을 얻는 것을 보았지만,  그들이 유익을 줄기지 않을 대는 그들은 드러누워 있었다. 왜냐하면,그들 중 누구도 마비되었거나 그런 병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보는 것에 의에 그 분의 유익들을 즐기는 것이 적절했다. 그 분이 폭풍을 허락한 것은 그들의 구원에 의해 그들이 그 유익을 더 명료하게 인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 분은 이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았다. 그들이 믿음이 적은 것에 대해 정죄받지 않도고 하기 위해서다. 그 분은 그들을 따로 떼어 두고,  그들을 교정하고, 물의 폭풍보다도 먼저 그들의 영혼의 폭풍들을 끝내신다. – 그들을 책망하고,말하시면서,

( HS-크리소스톰은 주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고려하는 것을 계속 찾고 있다.)


 “왜 두려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Chrysostom,190.

이를 통해 사람의 두려움은 유혹들이 오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약함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만약, 그 분께 나아와 그 분을 깨우는 것이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거나, 적은 믿음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바로 그것은 그들이 그 분에 대한 바른 견해가 부족하다는 구체적 표시였다. 즉, 그 분이 깨어 있을 때 그 분의 책망할 능력을 그들은 알았지만, 그 분은 자고 있을 때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Chrysostom, 190 (!!!!HS- 칼빈도 이를 수용. 그 분의 잠 잘 때의 육체적 임재 가운데서도 신성의 능력이 있음을 알지 못했음을 지적)

이후에 더 많은 기적을 행한 후에도, 그들의 생각들은 impressions은 여전히 불완전. 마 15:16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제자들의 믿음이 그러하니 다른 사람들이  높은 그 분에 대한 높은 생각을 가지지 않은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이 어떠한 사람이길래”, Chrysostom, 19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말은 역사적 현재, 그래서 그들을 통해 교회에 말하신다. 그러나 마가는 단순과거로 돌아간다.

마가는 예수님이 폭풍에게 말하고 그 효과가 나타난 것을 먼저 언급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게 한다. “그러나,  폭풍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마태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다.”그는 ‘꾸짖었다’를 단순과거로 한다 (묵, 누가도 마찬가지. 시 105:9  LXX) “(마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말이 먼저 나오고 또 역사적 현재을 취함으로써 강조된다.”, Robert H. Gundry, 156.

믿음이 없는 자

14:31, 16:8 17:20에 같은 단어와 동종어원어 참조. 

 마가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는 남겨 두지만,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생략한다. 그것은 제자들이 아직 믿음이 없는 것은 그 (마태)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offend .  그는 그의 복음서의 독자들이 믿음이 없이도 제자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그는 6:30에 기록되었고 눅 12:28에 병행으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용어를 빌려온다.  즉 ‘올리고 피스토이, 믿음이 적은 자들’ 그리고 이 말을 제자들에 대한 첫 질문에 대한 호격 address으로서 붙인다…. 제자들이 아직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이 적은 믿음 밖에 없다는 책망으로 그 의미를 축소시키면서 마태는 제자들을 세탁하지는 않는다 (그 만이 이후의 본무들에서 그 용어를 책망의 의미로 첨가할 것이다!). 여기서 그 질문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안식하는 일에 실패한 것에 대한 책망의 뜻을 가진다.”, Robert H. Gundry, 156.


26절, 폭풍과 바다를 꾸짖었다.

칼빈: 호수가 어떤 의식이 있어서 꾸짖은 것은 아니다. 그 분의 음성의 능력이 말없는 물질에도 미친다는 것을 부여 주기 위해서다. 감각 sensus가 없는 바다와 물결들 뿐 아니라, 완고한 악인들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전쟁의 혼란들을 가라앉히기를 기뻐하실 때, 그 분이 항상 사람의 난폭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그들을 복종하게 다듬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분노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그 분은 무기들을 그들의 손들로부터 떨어뜨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 선언이 성취된다.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시 46:10)

마가의 ‘카이’를 ‘그 때’로 바꾸어서, 예수님이 폭풍에 책망한 것 보다 제자들에게 한 말에 더 우선순위를 둔다. 바람을 ‘바람들”로 바꾼 것은 어쩌면 7:25, 27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 Robert H. Gundry, 156.

큰 고요가 왔다:  요나 1:16.바다가 잔잔하게 된 후 선원들이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 하게 됨- 욘 1:16

마 6:30 고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고려하지 않기에 오는 겁쟁이. “그런 상황에서 겁쟁이됨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돌봄, 즉 이 신앙의 본질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이 실제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확실히 경험있는 갈릴리 어부들은 자신들이 심각한 위험헤 있을 때를 알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분이 창조하신 자연이 힘들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폭풍이 그 분의 권위를 인식하기를 기대하면서 폭풍을 확신있게 ‘꾸짖으심’과 그 결과 즉각적으로 고요하게게 된 것은 그 분은 창조자의 힘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바다를 꾸짖은 예: 시 18:15, 104:7, 106:9, 사 50:2, 나훔 1:4) , R. T. France, 337.

“예수님이 뜻하는 바는, 폭퐁이 의심할 여지 없이 큰 것이지만, 그들은 더 신뢰하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Leon Morris, 206. “믿음은 두려움을 쫓아내거나, 두려움이 믿음을 쫓아낸다.”(Carson) , Leon Morris, 206.

예수님이 꾸짖으신 것은 어쩌면, 예수님은 그 분의 제자를 위험에 빠뜨린 폭풍 가운데서 하나의 악한 세력을 보았을 수 있다. “그 분은 그 세력에 대한 주권적인 분으로서 다룬다.” 갑작스런 잔잔함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폭풍을 고요로 바꾸었다. , Leon Morris, 206.


26절 겁쟁이.

이곳과 막 4:40, 계 21:8에만 나옴. Carr는 겁쟁이라는 말과 믿음없음 두 단어가 연결되어, 불 못에 던져지는 사람들의 첫 번째 두 성격으로 지적한다. , Leon Morris, 206. 각주, 66.67.

26절, 지진을 일으키고 잠잠하게 하는 것은 행 4장, 16장, 계시록에서 계속된다. 

시 18편에서 폭풍을 사용하시고, 바다의 기초를 드러내시는 분임을 말했다. 

그 시편의 찬양의 대상이 그리스도요, 그 시편을 다윗 안에 노래한 그 분이 바로 인자다.


26절, 겁쟁이 되지 마라.

24절, 지진 ,세이스모스

24절, κυμάτων  파도Matthew 16:25  ὃς γὰρ ἐὰν θέλῃ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σῶσαι ἀπολέσει αὐτήν·ὃς δ᾽ἂν ἀπολέσῃ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ἕνεκεν ἐμοῦεὑρήσει αὐτήν.

계 21:8 겁쟁이들, 믿지않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18절에서 가버나움을 떠나기를 준비, 23절에서 배를 타고 가서 28절에 도착,  9:1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배타고 돌아온다. 


27 그런데 그 사람들이 ἄνθρωποι  기이히 여겼고 말하기를, 

“그 분 자신이 어떠한 분이기에,  그 폭풍들과 그 바다까지도 그 분께 복종하고 있는가?”

사람들:  하나님과 사람의 대조

크리소스톰: 제자들의 믿음이 약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대해 낮게 생각한 것이 이상하지 않음.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을 chode 하지 않고, 그 분의 표적들에 의해 그들의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치기 위해 기다렸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그들은 그 분을 사람으로 생각하는가? 먼저 그 분의 외모로부터, 그리고 그 분의 주주시과 그분이 배를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그래서 이 때문에 그들은 혼란에  빠져서 말한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왜냐하면, 주무심과 외모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데 바다와 고요함은 그 분이 하나님임을 보여 준다.” 모세는 종으로서,  했지만 그 분은 주인으로 했기에, 막대기, 손 내밈, 기도함이 필요 없었다. “그 분의 하녀를 명령하는 주인에 적절한 방식으로, 혹은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하는 것으로, 말씀과 명령만으로 그것을 고요하게 하고 가라앉혔다.”, Chrysostom, 190. 그리고 파도는 금방 끝났고, 혼란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 Chrysostom, 190,1.

“왜냐하면 큰 고요함이 생겼다’고 복음서기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의 위대한 것으로 말해진 것, 이것을 그 분이 다시 그 분의 사역들에 의해 보여 주었다. 그 분에 대해 말해진 것이 무엇인가? 말하기를, ‘물결이 그쳤도다”(번역자는 시 107:25를 지적하지만,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임.  107譱는 ‘광풍을 평정히 하시 물결도 잔잔케 하시도다 (에지게산 타  키마타- 키마타는 마 25:24의 파도와 일치-HS).  마찬가리로 여기서 그 분이 말하셨고, ‘큰 고요함이 있었다.’이 때문에 대부분의 무리가 그 분에 대해 이기히 여겼다. 모세가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그것을 하셨는데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Chrysostom, 191.

칼빈; 그렇게 질문한 것은 사도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본다. 그런 기적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그들이 그 분을 믿도록 준비했다는 의미 , Calvin, 426.

마태복음,  6:1-8, 6:9-11, 9:8 (이 점에서 아주 독특), 10:32-33, 16:23, 19:26, 21:5-26.

제자들의 두려움은 경이 (타우마조)으로 변한다 (놀라움의 삽입, 15:31, 21:20 참조).

제자들이 “말하기를”– 분사 (누가도), 마태의 서술 동사를 이렇게 바꿈.

“서로 말했다”(마가, 누가)를 생략한 것은 “어쩌면 원래 제자 보다는 더 광범위한  청중을 염두에 둔 것”, Robert H. Gundry, 156.

누구 (티스, 마가, 누가)를 ‘포타모스’로 바꾸었다. 마태만 ‘기이히 여겼다’는 관점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장엄함에 대한 다른 강조들을 고려할 때, 포타모스는 단순이 ‘어떤 사람인가?”보다 “올마나 놀라운가?”로  받아들여야 한다.  바라믇ㄹ과 바다가 복종하는 것은 예수님의 경이를 일으키는 권위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사람들의 반응과 사람 이상인 예수님의 차이를 보여준다. , R. T. France, 337.

Luz: 이 안트로포이는 그 이야기 안에는 전혀 있지 않으며, ‘복음이 이야기에서 말하자면 나와서 그의 교회과 복음을 전하는 대상인 사람들이 마치 그들이 예수님의 기적들에 반응하고 있듯이 말하게 만든다.”고 말한다그러나, , R. T. France는 “이 복음서에서 이런 문학적 기법은 전례가 없으며, 오히려, 제자들이 그 이야기에서 자연적으로 언급되고,  한 문맥은 그들을 안트로포이로 정확히 성격지우는 신학적 이유를 제시하고, 그런 놀라운 제안을 할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 , R. T. France, 337. 각주 25에서 재인용.

이 어떠한 분이길래 하는 그들의 수사적 질문은, 앞서 나온, 바람들과 물을 통제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특별하고 유익한 권한으로 만드는, 앞서 인용된 구약 본문들의 빛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시점에서는 그 질문을 던진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때가 되면 그것은 제자들 자신들에 의해 대답될 것이다 (14:33, 16:16), 그러나 이미 다음 단락에서 전혀 다른 소스로부터 그 대답이 제공될 것이다 (8:29). , R. T. France, 337.

“예수님의 신적인 성격에 대한 foil”(대조) Gundry, 156.

“사람들은 바람들과 바다가 복종하는 그분 앞에 서 있다. 마태는 확실히 예수님의 엄위에 그 분을 따르는 자들의 무능함을 대조한다.”, Leon Morris, 207.

HS: Luz의 제안은 너무 건방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옳다고 본다.마가는 제자들을 “사람들”이라는 일반적 용어로 표현함으로써 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질문을 던지기 원한다. 오늘날 독자인 우리들이 제자들의 학습과정을 따라가며 그리스도를 알기 원한다. 육체적 부재와 영적 임재 가운데서.



Bibliography 

France, R. T.,The Gospel of  Matthew.  Grand Rapids: Eerdmans, 2007

Morris, Leon,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Grand Rapids: Eerdmans, 1992

Gundry, Robert. Matthew, Grand Rapids: Eerdmans, 1974.

Calvin, Joh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v.1, in Calvin’s Commentary  6. Grand Rapids: Baker, 2008.  https://ccel.org/ccel/calvin/calcom31/calcom31.i.html

Chrysostom. Homilies on St. Matthew, in The Nicean and Post-Nicean Fathers First Series v. 10. Grand Rapids: Eerdmans, 1998;  https://www.ccel.org/ccel/schaff/npnf110.html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1년 전체 설교문) 1 file kosin 2021.04.27 4265
공지 십계명을 통해 본 합당한 예배(1년 전체설교문) 1 file kosin 2021.01.04 3891
공지 제70회 총회(2021년) 공동기도문과 실천사항 file kosin 2021.01.04 3070
공지 2021년 총회 주제 모범설교문(공지) kosin 2020.12.22 4099
32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6(성령충만한 스데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다 행 7장 54-60절) 삼위일체주일(5.30), 이단경계주일(6.6) file kosin 2021.06.01 2110
31 예배전쟁 6(벧엘과 단에서 왕상12장) file kosin 2021.05.21 2070
30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5(성령님이 오셔서 말씀으로 교회를 세우심-성령강림절 행 2장 1-13, 41-47절) file kosin 2021.05.18 2019
»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서의 예배4(두려워 하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과 경배 마 8장 18-27절) file kosin 2021.04.27 2162
28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4(땅으로 내려온 하늘, 하늘에 앉은 우리 히 8장5절 엡 1장10절) file kosin 2021.04.27 1860
27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12(동행을 약속해주시는 예배마침 민6:22-27 계22:18-21) file kosin 2021.04.20 1508
26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11(하나님의 자비에 동참하는예배 대상29:14-17 고후9:10-15) file kosin 2021.04.20 1598
25 예배전쟁 5(여호와여 어디계십니까 삼상 4장) file kosin 2021.04.20 1819
24 예배전쟁 4(예배와 정복전쟁 수 6장) file kosin 2021.03.19 1551
23 모여서 드리는 예배 삶으로 예배 3(나귀를 타시고 찬송을 받으신 그리스도 막 11장 1-11절) file kosin 2021.03.17 1476
22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10(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예배, 창17:9-14 행2:43-47) file kosin 2021.03.05 1486
21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9(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예배, 느8:1-6 딤후2:1-2) file kosin 2021.03.05 1579
20 예배전쟁 3(하나님의 군대가 금송아지를 섬기다 출32장) file kosin 2021.02.25 2012
19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3(옮겨다니는 하나님의 집, 민 10장 11-13, 28, 33-36절) file kosin 2021.02.18 1768
18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8(감사가 향연처럼 올라가는 예배, 사56:6-8 딤전2:1-2) file kosin 2021.02.08 1699
17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7(새 노래가 흘러 넘치는 예배, 출15:1-5, 고전14:26) file kosin 2021.02.08 1739
16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6(고백과 율법이 살아있는 예배, 신 4:10-14, 롬 10:10-15) file kosin 2021.01.26 1496
15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2(성막 건축 명령과 합당한 예배, 출 25:8-9) file kosin 2021.01.25 1522
14 예배전쟁 2(니므롯의 반역, 창 11장) file kosin 2021.01.21 1556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