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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9)

설교제목/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예배


설교본문/ 느헤미야 8:1-6; 디모데후서 2:1-2

주제문장/ 하나님께서는 목사의 설교를 통해 지금도 주의 회중에게 친히 말씀하신다.

설교개요/ 예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예배의 세번째 파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이다. 예배 인도자나 회중이 ‘성경낭독’(↓)을 하고, 설교할 목사가 ‘조명을 구하는 기도’(↑)를 한 후 ‘설교’(↓)를 한다. 설교가 끝날 때 설교자가 기도로 마무리하기도 하고, 설교를 다 들은 회중은 ‘응답찬송’(↑)을 한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하나님께서는 회중에게 말씀하셨고,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설교를 통해 나 개인을 넘어 주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다. 개인적인 성경읽기와 묵상을 넘어 하나님께서 공적으로 선포해주시는 말씀을 회중에 속해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 느 8 : 1 - 6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 딤후 2 : 1 – 2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예배 중에 제일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설교가 아닙니까? 설교가 예배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이것이 우리 개신교회에 예배의 특징입니다. 현대교회의 경우에는 설교가 많이 짧아지기는 했지만 설교가 예배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 것입니다. 예배는 설교를 중심으로 해서 그 이전 순서와 그 이후 순서로 나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설교가 예배를 이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배의 모든 순서가 설교를 중심으로 짜맞추기도 합니다. 설교 이전의 순서는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고 설교를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설교 이후의 순서는 설교의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한 역할을 합니다. 이런 식의 생각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예배에서 설교가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는 말이 많은 예배입니다. 말로 가득찬 예배입니다. 설교 위주의 예배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 순서가 이미 주보에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서에 대해 재차 언급하며, 이런 저런 설명들로 채우기도 합니다. 이런 말의 홍수 속에서 침묵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말이 많은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는 여백과 침묵을 조금씩 확대해갈 필요가 있습니다. 말로만 가득찬 예배가 하나님의 회중을 변화시키고 충분히 성숙시킬 수 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 역사하지 않으시지만 말씀 사이의 여백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말의 홍수 속에서 정작 그 말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약시대부터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예배 때 설교가 차지하는 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제사가 주도하던 시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중심이 되어 이스라엘의 종교적이고 일상적인 삶 전체가 규율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전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번제를 포함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미 6:6-8). 어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성전 문을 닫아 걸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말 1:10). 제사장과 선지자는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을까요? 우리는 제사장과 선지자 사이의 갈등을 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제사장은 단순히 제사 드리는 일만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율법을 가르쳤다는 사실입니다(레 10:8-10).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은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가 아니라 다같이 율법과 관련을 맺고 있는 직분이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집니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제는 회당이 유대인들의 모든 삶의 중심이 됩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지고, 성전이 재건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조차 각 지역별로 회당이 중심 역할을 합니다. 회당예배는 단순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순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신명기 6장 4절의 그 유명한 쉐마 본문을 다같이 낭독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인 여호와시니’라는 유명한 구절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가정에서 아침 저녁으로 이 문구를 낭독합니다. 그리고는 한 사람이 열 여덟 가지 청원으로 이루어진 긴 기도를 인도하면 온 회중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 후에 우리가 낮예배 강복선언문으로 사용하는 민수기 6장의 아론의 대제사장적 복을 선언합니다. 그 후에 성경낭독과 해설이 있습니다. 성경낭독은 율법서 중에서 한 부분, 선지서 중에서 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이런 순서들 중간 중간에 시편송을 여러 번 불렀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부터의 말씀에 보면 회당예배에서 있었던 성경낭독과 해설이 어떠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나신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평소에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의 손에 선지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이 그 중에 성령이 임하시는 부분을 찾아 읽으시고는 그 말씀의 뜻을 해설하십니다. 이 말씀이 너희들 눈 앞에서 지금 성취되었다고 하십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이 깜짝 놀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자기들 가운데 성취되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방 땅에 전도하러 갔을 때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가서 예배했습니다. 회당장이 바울을 향해 성경을 해설해 달라고 하면 펼쳐준 성경을 읽고는 해설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골격은 회당예배로부터 빚졌습니다. 초대교회는 회당의 말씀중심 예배를 그대로 이어 받았습니다. 성경낭독과 해설이 예배의 핵심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말씀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이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1부 예배는 말씀예전이었고, 2부 예배는 성찬예전이었습니다. 중세가 되면서 말씀예전이 점차로 줄어들고 성찬중심의 예배로 바뀌어갑니다. 4세기가 결정적인 전환기인데 이제 설교는 거의 사라지고 성찬만이 중심이 된 예배, 즉 미사가 확립됩니다. 종교개혁은 이 미사중심의 예배를 말씀중심의 예배로 바꿉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는 예배는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요, 천국의 열쇠이다

    요즘같이 다양한 매체의 영향을 받고 있는 시대에 설교가 효력이 있을지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설교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너무나 전근대적이고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설교는 항상 효과가 있습니다. 설교는 복음의 선포인데 항상 효과를 불러 일으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것을 설교가 가진 ‘체질효과’라고 불렀습니다. ‘체’라는 것을 아십니까? 시골에 있을 때 체질하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요. 체질을 하면 알곡은 안으로 모이고, 쭉정이나 겨는 날려 나갑니다. 이것처럼 설교는 체질을 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숨은 생각까지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숨은 것이 다 드러내고, 감추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눅 8:18).
    우리는 말씀이 칼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은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는 말씀 말입니다(히 4:12). 개혁가들은 말씀을 실제로 양날 가진 칼에 비유했습니다. 한쪽 칼날은 치유하는 칼날이 되고, 다른 쪽 칼날은 죽이는 칼날이 된다고 말입니다. 설교는 사망도 불러 일으키고, 생명도 불러 일으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말씀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시고는 복 있다고 하시면서 그에게 천국열쇠를 맡기십니다. 그 천국열쇠로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십니다. 그 천국열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목사의 설교가 바로 천국열쇠입니다. 설교를 통해 천국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받지 않을 때 천국이 즉시로 닫힙니다. 설교가 천국을 열고 닫는 열쇠입니다. 설교는 복음선포요,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천국을 열고 닫는데, 권징은 순서가 정반대입니다. 권징은 천국을 닫고 엽니다. 이렇게 설교와 권징이 천국의 열쇠를 실제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83문에서 이것을 다룹니다. ‘천국의 열쇠는 무엇입니까?’라고 묻고는 ‘거룩한 복음의 설교와 교회의 권징인데, 이 두 가지를 통하여 믿는 자에게는 천국이 열리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닫힙니다’라고 답합니다.   
    설교는 강의나 강연과 같이 사람을 설득하는 웅변술이 아닙니다. 설교는 사람의 감정을 교묘하게 조작하는 상담술이나 도덕적인 강화가 아닙니다. 더더욱 정치슬로건이 아닙니다. 선거의 계절이 돌아오면 강단에서 정치와 선거 이야기가 흘러 나올 수 있습니다. 설교가 정치슬로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설교는 성경주해나, 성경공부의 차원도 넘어섭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나라의 사신이 되어 하나님의 모든 뜻을 남김없이 선포합니다(행 20:27). 설교는 인간이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보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한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너무 순진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인간의 설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제발 설교 좀 하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설교가 인간의 잔소리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 보아준다고 하더라도 실수나 오류가 많은 목사의 설교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설교가 성경말씀의 바른 해명이 아니라 목사 자신의 경험담이나 사사로운 의견개진 정도로 격하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주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설교시간이 너무나 고역이라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머리를 쥐어짤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 장로의 직분을 허락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로는 목사의 설교를 감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설교라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설교하기 위해 같이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에 대한 책임을 목사와 장로가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설교는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문제이기에 당회는 목사의 설교를 잘 감독해야 합니다.

설교는 성경낭독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설교 직전에 성경낭독을 합니다. 우리는 설교할 본문만 낭독하는데 교회사를 살펴보면 성경낭독은 성경 전체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예배할 때는 율법과 선지서 두 부분을 낭독했습니다. 이후에 신약교회에서는 구약의 말씀 뿐만 아니라 신약 복음서의 말씀, 그리고 서신서의 말씀 등을 낭독했습니다. 교회절기에 맞추어서 정해진 성경본문을 읽어가기도 했습니다. 특정한 성경본문을 정해서 연속적으로 읽어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연속적인 성경낭독(Lectio Continua)은 요즘의 연속강해설교와 같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설교를 위한 성경낭독만이 아니라 예배 전에도 성경을 낭독했습니다. 성경을 낭독하면서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성경낭독이 있었습니다.
    설교 직전의 성경낭독은 설교할 본문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의 낭독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성경낭독은 설교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성경낭독은 설교와 상호보완적입니다. 성경낭독과 설교가 하나의 세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개혁한 교회의 예배는 설교 하나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예배의 객관적인 성격보다는 주관적인 성격이 더 강화될 수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기에 너무나 객관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만큼 주관적인 것도 많지 않습니다. 목사가 성경본문을 연속적으로 계속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한 본문을 읽고는 그것을 가지고 해설하고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목사 개인의 취향과 자질에 의해 좌우되기 쉬운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에서 목사는 엄청난 자유를 누립니다. 하지만 성경낭독이 있습니다. 성경본문을 읽고 나면 설교는 그 성경본문에 의해 할 말이 정해집니다. 목사의 자유가 제한됩니다. 성경낭독 때문에 설교에서 목사의 자유가 제한됩니다. 설교에서 목사의 자유가 무제한적일 수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인들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적용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회중은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들 상황에 적합한 적용을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회중은 설교가 적용으로 마쳐지기를 요구합니다. 적용이 없는 설교는 뭔가 모자라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본문선택과 성경낭독이 가장 큰 적용입니다. 성경본문선택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적용은 설교 끝부분에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본문이 선택될 때 이미 큰 틀의 적용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경낭독과 설교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적용입니다. 유럽의 개혁교회는 주일오후에 매 주일마다 정해진 교리문답설교를 하므로 주일오전에 한 목사의 자유로운 성경본문선택을 보완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회중 전체의 것이다

    성경낭독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낭독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 없이 성경낭독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신학교에서는 성경낭독과목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을 어떻게 낭독해야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릴 수 있겠는가를 가르치는 과목입니다. 그 과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연극배우가 하듯이 낭독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발성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문맥을 잘 알고 그 본문을 읽는다면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성경낭독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이 충분히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도전인지 모르겠습니다.
    성경낭독이 이렇게 중요하다면 누가 성경을 낭독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설교할 목사만큼 그 성경본문을 잘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설교할 목사가 그 성경본문을 낭독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웨스트민스터회의에서 작성한 예배지침에는 성경낭독이 목사의 중요한 역할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
교회 안에서 말씀을 읽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여 있는 것을 승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공중 예배의 일부분이며,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세우기 위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방편이요 목사와 교사들이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사 후보생도(강도사, 전도사) 노회가 허락하는 한 경우에 따라서는 회중에서 말씀을 읽는 것과 설교하는 은사를 같이 행사해도 된다. 신구약 성경 전부를 자국어로 회중 앞에서 읽되 본문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읽어 모든 사람이 듣고 이해하게 해야 한다.”
    요즘에는 많은 교회들에서 설교자와 회중이 성경을 합독하든지 교독합니다. 요즘에는 교인들이 성경낭독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왜 설교자가 아닌 교인들이 성경낭독을 할까요? 교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성경을 낭독한다고 할 때 더 깊은 의미를 담아야 합니다. 설교할 목사보다 그 성경본문을 잘 아는 교인들이 없겠지만 그 성경본문은 목사에게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 성경말씀은 모든 회중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가 아닌 직분자들이나 교인들이 등단해서 성경을 낭독할 수 있습니다. 단, 잘 준비하여 낭독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온 회중은 ‘잘 낭독하는지 보자’라고 구경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온 회중을 위해 우리가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같이 읽었던 느헤미야 8장 말씀에 보면 학사 에스라가 온 회중을 불러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특별하게 만든 나무 강단에 서서 율법 두루마리를 펼칩니다. 이 때 온 회중이 일제히 일어섭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니 모든 회중이 손을 높이 들고는 ‘아멘, 아멘’하면서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댑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극진한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이 유대인의 회당에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낭독하기 전에 율법 두루마리를 회중 사이로 들고 다닙니다. 이때 온 회중이 일어서서 그 율법을 바라봅니다. 동방교회에서도 이런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기 전에 성스러운 향으로 교회를 정화합니다. 향이 예배실을 가득 채울 때 사제는 성경책을 높이 들고는 회중 사이를 행진합니다. 우리도 성경을 낭독할 때 온 회중이 일제히 기립하면 어떨까요? 설교시간 내내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성경낭독할 때만큼이라도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고려해볼 만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공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성경낭독이 너무나 중요하지만 설교는 성경낭독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성경낭독을 되도록이면 많이 하고 설교시간은 줄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설교는 목사의 해설이지만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낭독과 설교를 나누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는 것은 맥락을 잘못 짚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적인 뜻을 전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해설인 설교가 없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엄청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없이는 교회가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말씀의 바른 해설이 없이는 교회가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자신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지식이 풍부하거나 전달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낭독후 설교하기 전에 ‘조명을 구하는 기도’를 하곤 합니다. 성경을 기록하게 감동을 주신 성령께서 그 성경을 잘 선포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결국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문자가 살아역사하는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될 수 있습니다. 조명을 구하는 기도가 습관적인 것이 되지 않아야 하겠고, 그래서 그 순서가 없더라도 설교자뿐만 아니라 온 회중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깨우쳐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신자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지만 예배 때는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 성경말씀을 공적으로 해설하게 하십니다. 그 설교야말로 하나님의 회중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개인적인 성경묵상으로 공적인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보니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해 당부합니다.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들려준 것이 있습니다.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그 충성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겠습니까? 성경공부나 제자훈련, 더 나아가 전도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일차적으로 설교를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설교도 설교지만 제자훈련이 더 중요하고, 전도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전도가 죄인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이 순전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오염됨이 없이 순전하게 유지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설교는 목사의 일방적인 독백이 아닙니다. 혼자 소리를 냅다 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대화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는 설교한 성경본문을 미리 알리는 것이 좋겠고, 설교문을 준비했더라도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는 설교준비를 금요일에까지 끝내놓고 토요일에는 두문불출하면서 하루 종일 설교문 전체를 달달 외운다고 합니다. 강단에 올라갈 때는 한 장짜리 요약문만 가지고 올라가서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설교를 하고 나면 몸무게가 2-3kg이나 빠진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그런 수준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어설픈 목사입니다. 아직까지 설교문에 전적으로 매여 있으니까요. 설교문에 매이는 딱 한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가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횡설수설하지 않고, 설교가 무한정 길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시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설교는 몇 분 정도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무리 길어도 30분에서 40분 사이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전에 유럽에서는 설교가 너무 길었습니다. 1시간도 좋고 2시간까지도 갔다고 합니다. 교인들은 설교 시간에 대놓고 졸았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길어지지 않도록 강단 바로 옆에 시계를 갔다 두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시간이 길어지면 슬쩍 시계를 돌려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청에서 개입했습니다. 예배시간을 아예 고정시켜 놓고 길어지면 벌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목사는 설교시간이 길어지면 나머지 예배순서를 생략하고 예배를 허지부지 끝내 버립니다. 요즘은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䃵분설교’라는 말마저 등장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한 후에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그 설교를 읽어보면 딱 5분이 걸립니다. 그래서 5분 설교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성경기록이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재현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만큼 문자에 집착하는 것도 드물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는 듣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천주교회의 예배는 보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고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우리는 듣습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보는 것에 좌우되면 안됩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중요하지만 설교를 듣는 회중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교학에서는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지만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더 많이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설교자 자신도 듣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도 설교하면서 동시에 그 말씀을 듣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만큼 놀라운 일이 없습니다. 설교에 대한 반응도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회중이 어떻게 반응하면 좋겠습니까? 회중이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목사가 기도로 마무리하곤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기도가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미 길게 설교를 했는데 또 다시 설교를 요약하는 기도가 뭐 때문에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설교 후에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좋은 전통이 아닙니까? 그런데 설교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무엇보다 찬송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설교 중에도 얼마든지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지만, 설교가 마쳤을 때 크게 아멘으로 화답하며 찬송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설교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이기에 많은 물소리와 같은 아멘의 화답은 온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는 복음의 공적인 선포이기에 설교시간에 천국이 열리고, 그 말씀을 받지 않을 때 천국이 닫힙니다.’설교가 천국을 열고 닫습니다. 설교가 하나님 나라를 열고 닫으니 하나님의 회중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힘있게 들어갑니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인간의 잔소리로 생각하면 천국은 곧장 닫혀 버립니다. 설교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우리는 요동치는 온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잠잠할지어다.”여러분의 심령을 향해서도 외치십시오. ‘내 영혼아, 왜 불안해 하는가? 너는 오직 말씀하신 하나님을 바라라.’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그 말씀대로 친히 행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낭독과 설교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계속해서 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말씀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말씀의 영으로 자기 백성 가운데 역사하시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말씀 자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독생자를 통해 저희들에게 최종적으로 말씀하셨으니 그리스도 외에 구원이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설교가 지속적으로 복음의 선포가 되어서 천국을 열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에 말씀이 순전하게 보존되어 지금 저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담대히 들어가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역사가 저희 자녀들과 마지막 세대까지 이어지도록 도와 주옵소서. 목사의 설교를 복 주시옵소서. 신학교와 신학교수들에게 복 주시옵소서. 신실한 말씀의 사역자들이 배출되어 교회가 힘있게 서게 하시고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게 하옵소서. 저희가 세상 모든 소리들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구원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평안가운데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묵상하고 나누기

1. 구약시대 선지자와 제사장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을까요?

2. 회당예배가 교회의 예배에 끼친 영향이 어떠합니까? 

3. 개혁은 중세교회의 미사중심의 예배를 어떻게 개혁했습니까?

4. 설교는 복음 그리고 천국열쇠와 어떤 관련성 속에 있습니까?

5. 성경읽기의 다양한 차원, 그리고 설교와의 관련성을 말해 봅시다.

6. 설교가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면 어떻게 발전시켜가야 하겠습니까?

7. 말씀에 대한 반응과 화답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 보세요.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설교는 성경해설이니 길면 길수록 좋다, 맞습니까?

2. 설교는 목사의 독백이 아니라 회중과의 대화이다, 맞습니까?

3. 설교시간에 (   )이 열리고, 그 말씀을 받지 않을 때 천국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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