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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고전 10:31-33; 고전 6:19-20; 벧전 4:16

황대우 목사(개혁주의 학술원)


16세기 종교개혁은 기독교 교리의 개혁이었습니다. 칼빈에 의하면 ‘교리’는 ‘교회의 영혼’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교리 없는 교회도 죽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잘못된 교리는 교회를 병들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16세기 로마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잘못된 비성경적인 교리, 즉 교리의 타락이었습니다. 

회개를 대신하는 면죄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교황, 믿음이 아닌 행위로 받는 구원 등이 대표적인 로마교회의 교리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교리를 바로 잡기 위해 생명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바른 교리는 생명을 아끼지 않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잘못된 교리를 고쳐야 악습도 고치고 악행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기독교 교리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왜 종교개혁자들은 바른 교리에 목숨을 걸었을까요? 바른 교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사람의 자리에 서게 합니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제시하는 것이 바른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만이 사랑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바른 교리이고, 또한 모든 피조물이 바로 그 구원의 대상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바로 죄로 타락한 인류, 즉 모든 죄인이라고 가르치는 것도 바른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항상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 즉 위로부터 죄인이 사는 이 세상, 즉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요, 그 역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고 종교개혁자들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순서를 바꾸어 놓은 것이 로마교회의 잘못된 교리였던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구원을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은혜교리 대신에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공로교리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교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리에 지상에 사는 인간이 대신 올라앉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가 교황입니다. 교황은 하나님의 전권을 맡은 지상 대리자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순서를 뒤바꾸어 놓은 로마교회의 잘못된 교리는 기독교의 모든 것을 뒤죽박죽 엉망으로 섞어버렸습니다. 로마교회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공로로 받는 것이 구원이라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릴 수 없었습니다. 그 영광의 일부를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들인 성직자들이 받아야 하고, 또한 구원의 공로를 쌓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구원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을 하나님 대신에 사람으로 대체해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엉망으로 뒤바뀐 순서를 성경의 가르침대로 바로 잡고자 했던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제자리 놓기 운동’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등과 같은 구호가 바로 종교개혁이 ‘제자리 놓기 운동’이라는 것을 대변합니다. 이 가운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구호는 모든 다른 구호들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종착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인생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지 가르치는데,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3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첫 번째 길은 누구에게도 거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무슨 일이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구호와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누가 이렇게 삽니까? 누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은 하나님의 자녀 곧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용어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로 이해합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위의 문장에서 라틴어 “글리리아”(gloria)라는 용어는 목적어가 아닌 주어입니다. 즉 “영광을”이 아니라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은 기원문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기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이라 번역하면 그 주체는 우리 인간이 되지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고 번역하면 그 주체는 하나님이 됩니다. 즉 전자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신자 개개인의 자세와 행동에 달려 있고, 후자로 번역하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됩니다. 신자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실 여기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개혁주의를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또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태도가 마치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양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선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그 내용이 대부분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태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 프로그램도 한마디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긍정의 심리학을 근거로 구동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긍정의 심리학을 통해 교회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도를 통한 교회의 부흥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항상 교회의 부흥을 진심으로 갈망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부흥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분명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있고 원해야 하는 교회의 부흥은 진정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 소원의 동기와 목적이 정말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자신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필요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가 연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형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 즉 우리의 부족과 필요를 채우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 부흥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가져야할 마음 자세는 교회 부흥의 동기와 목적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구호에서 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부흥을 갈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란 구호를 단순히 교회 부흥의 대의명분이나 수단으로만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교회 부흥의 유일한 내용과 목적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인간적인 욕심이나 욕망과 같은 불순물이 첨가될 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원리는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부흥의 목적이 아닌 대의명분과 수단으로 전락할 때 우리는 결과제일주의와 결과만능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만 중시하는 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성공주의의 전형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세상적인 “잘 됨”과 “성공”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일까요? 공부를 잘하는 사람,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 돈을 잘 버는 사람 등등 소위 세상에서 인정받는 성공한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인공들일까요? 과정이야 어떠하든 상관없이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착각한다. 성공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성공 지향적인 심리를 포장하고 숨기며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허울 좋은 대의명분과 수단에 불과하며 가장 유의미한 목적은 자신이 원하는 성공일 뿐입니다. 

이 성공은 반드시 부귀영화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성공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성공할 수만 있다면 온갖 거짓과 속임수, 위선, 악평과 비방도 유익한 수단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성공 지향적인 결과제일주의자에게 정직과 성실이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의 자기변명에 불과하도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만일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이런 성공제일주의와 결과만능주의를 쫓아 왔다면 분명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요함은 바르고 정직한 것, 성실한 것, 공의로운 것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잘 되는 것,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만 하면 되고 결과만 좋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인간 욕심의 바벨탑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러한 성공을 원하시고 인정하실까요? 

성공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성공 자체가 죄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성공하는 그리스도인보다는 오히려 겸손히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대로 자신의 뜻을 이룰 때 그것을 성공이라 인정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 위에 세워진 성경적인 성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공은 정직과 성실과 겸손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올바른 성공은 일의 내용과 과정이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정직과 성실과 겸손으로 채워졌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느냐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참된 성공은 인위적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상이요 선물입니다. 그 보상과 선물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것으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주어질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감사의 마음과 겸손의 자세가 없으면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성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는 감사와 겸손의 자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더욱 감사하고 더욱 겸손하기 위해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훈련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받아야 합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낮아지려 하고 하나님만 높이려 하는 자세, 바로 이 자세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사상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손에 달린 것도, 우리의 행동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영광의 주체이시며 동시에 그 영광의 대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받아야 할 영광을 스스로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심지어 사탄의 악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은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운명의 신은 결코 우리 인간을 인격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받으시되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가운데 특히 인간을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통로이며 수단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통로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의식을 가진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에게 자신의 모든 좋은 것을 나누어주십니다. 자신의 백성인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고 우리를 통해 영광 받기를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그 길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할까지 스스로 정하고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때를 쓸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는 주연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주연이 아니라면 당장 당신의 영광의 극장에서 내려가겠습니다’라는 식의 태도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마도 하나님을 무슨 주문이든 들어주는 알라딘 마술램프의 거인 지니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주문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가 먼저 기도하는 바른 방법을 잘 배우고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치한 기도이든, 성숙한 기도이든 모두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계속해서 유치한 기도에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주연이고 하나님께서는 조연이라고 합시다.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거인처럼 조연인 하나님께서는 주연인 우리의 요구와 지시에 따라 자신의 막강한 능력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해내느냐 하는 것은 오직 조연을 주무르는 주연의 능수능란한 솜씨에 달려 있게 됩니다. 주연은 자신의 든든한 부하장수인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고 요구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일을 추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대단한 일을 시작하고 하나님께 그 일을 완수하도록 명령하는 일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만일 원하는 것을 이루는 성공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라는 말이 난무하겠지만 결국 그 영광과 은혜는 ‘인간 높이기’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간 높이기’는 겸손과 정반대의 현상입니다. ‘인간 높이기’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몇 몇 특정 인물이 나누어 갖거나 한 사람이 통째로 빼앗아버리게 될 것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인간 높이기’는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대신 앉는 것이므로 분명 비성경적이고 불신앙적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구호는 하나님 중심 사상을 대변하기 때문에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모든 형태의 인간주체사상을 거부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기를 원합니다.”라는 하나님 주권사상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기 때문에 그분 외에는 누구도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의 주체와 객체가 되신다는 사실이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에게 ‘그분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므로 나는 할 일이 없어!’라는 삶의 자세를 가르치는 구호가 아닙니다. 하나님 주권사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수동적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내가 그 빛과 소금의 주체가 아니라 인격적인 통로, 의식 있는 도구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영광의 한 터럭도 탈취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받으시지만 ‘우리를 통해’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그 영광의 통로이며 동시에 동참자입니다. 우리가 그 영광의 능동적인 도구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모양으로 사용하시든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어떤 고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하나라도 더 가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라도 더 나누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는 일에 목숨을 거는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낮추는 일에 목숨을 겁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처럼!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나그네처럼 사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자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던 바울 사도와 같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작은 그리스도”(a little christ in this world)로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적 사랑을 만 천하에 보여줄 수 있는 성령의 사람, 능력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이야말로 누구에게도 거치는 돌이 되지 않는 삶,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닐까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성경이 요구하는 두 가지 삶의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네바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르치는 것처럼,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기를!”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삶,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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