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시 104:1-9, 19-24
이신열 교수(고신대학교)
창세기 1장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6일이라는 기간 동안에 천하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기존에 존재하는 물질들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무로부터 (ex nihilo)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이는 또한 자신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셨음을 성경의 증거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으신 자연은 창조의 처음 순간부터 하나님의 섭리 아래 보존되고 통치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관한 대표적 성경 본문에 해당됩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이 피조세계에 작용하고 있는가를 일상의 언어로 묘사하면서 이에 나타난 그분의 관심과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한 대표적인 시편에 해당됩니다. 본문 5절 말씀에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그리고 9절 말씀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라는 구절에서 섭리의 가르침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칼빈은 섭리가 진정한 신학이며 이것만이 하나님에 관한 유일하고 올바른 가르침이라고 적절하게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놀라운 능력으로 자연 세계를 오늘도 친히 보존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고백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자연을 보존하시는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서 더욱 구체적으로 함께 묵상하되 특히 종교개혁자 칼빈의 이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지혜, 그리고 선하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놀라운 능력으로 이 세상을 보존하시므로 세상은 무로 전락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자연의 위협에서 보호받게 됩니다.
시 104:29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 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만약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이며 부단한 섭리적 활동이 없다면, 자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또는 전례없는 무질서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철수하신다면, 만물은 순식간에 무로 전락해 버릴 것이라고 밝혔던 것입니다. 창조가 완성되었던 첫 순간부터 피조세계로서의 자연은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은 한 순간도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다면 자연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곳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는 창 1:6-7을 주해하면서 이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공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안전한 곳에 놓여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우리를 두 무덤 속에 놓으셨다. ... 왜냐하면 (헬라) 철학자들에 의해서 생명의 원리 중 하나로 간주되는 물이라는 요소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제재를 받지 않는 한, 위와 아래로부터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특이하게도 이 구절에 언급된 하나님께서 만드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두 ‘무덤’에 비유했습니다. 이는 궁창 위의 물이 언제든지 아래로 떨어져서, 즉 비가 엄청나게 하늘 위에서 내려서 우리에게 덮치게 된다면 우리 생명을 위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궁창 아래의 물의 대표적인 형태에 해당하는 바닷물도 언제든지 우리를 덮치는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물들을 제어하시고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7:11에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라는 표현은 창세기 1:6에 기록된 궁창으로 인해 둘로 나뉘게 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허물어져서 마침내 그 물들이 땅 위에 흘러넘치게 되었던 것을 가리킨다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공한 바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이적 중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바다의 힘을 제어하여 그 장벽이 인간의 거주지로 허락된 부분에 해당하는 지구를 뒤덮지 않도록 만드셨던 것을 가리킨다. 모세는 첫째 장에서 어떤 물들은 하늘에 매달려 있었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다윗은 이들이 상자 속에 갇혀 있었다고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지구에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에 극장을 만드셨고, 그의 비밀스런 능력에 의해서 땅 아래 물들이 터져 나와서 우리를 뒤덮지 못하도록 하셨다. 또한 천상의 물들도 이런 목적으로 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지구를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셨을 때, 그 장벽들이 터져 버렸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 8장, 막 4장, 그리고 눅 8장에 기록된 가이사랴 호수에서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잔잔하라고 명령하셨던 사건에서도 발견됩니다. 바다의 거센 물결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탔던 배를 위협했지만 예수님의 놀랍고 신비한 능력으로, 그리고 이를 나타내는 말씀 한 마디로 잠잠하게 되었고 안전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안전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달려 있음을 믿는 것이 모든 신앙의 출발점에 해당됩니다. 시 121:3에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면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발견되며 우리는 이로 인해 이 세상에서 그가 우리를 지키시므로 안심하고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비하고 놀라운 섭리로 항상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굳게 붙들어야 할 뿐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더욱 감사하고 그의 성호에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자연에 놀라운 질서와 아름다움을 부여하시며 이를 통해 자신의 선하심을 증명하십니다.
칼빈은 자연 세계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질서와 아름다움이 가득 차 있다고 늘 감탄하고 황홀해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주저인 <기독교 강요>에서는 하늘의 별들의 움직임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로 주어진 질서와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저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이토록 아름답게 위치시키시고, 정리 정돈하시고, 만들어 놓으시고, 그 중에 어떤 별들은 그 위치에 고정시켜 두셔서 움직이지 않도록 해 놓으셨고, 또 다른 별들은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셨지만, 그 지정된 경로를 따라 이리 저리 방황하지 않도록 하셨고, 낮과 밤, 달과 해와 계절들의 모든 움직임들을 지정하시되 일정하게 하셨으며, 항상 보는 바와 같이 낮의 길이가 균등하게 차이가 나도록 하셔서 혼란이 없도록 만드신 창조주의 위대하심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광대한 덩어리를 유지하시고 천체들의 신속한 운행을 지도하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는 또 다른 예가 될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실례만으로도 세상의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파악하게 될 것이다.
자연은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한 능력을 항상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조금이나마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연을 지칭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칼빈은 자연에 우리가 다 깨닫지 못하는 질서가 존재함을 느끼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에 주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세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시고, 이에 제재를 가하시고, 질서를 부여하시며, 다스리신다는 신뢰에 근거하여 칼빈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감상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자연을 통해서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은 전적으로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지구가 항상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의해서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기쁨과 즐거움이었습니다. 자연의 안정성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행하신 사역을 통해서 느끼는 기쁨에 기초해서 주어진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를 하나님의 ‘화려한 대저택’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은 그의 지혜에서 비롯된 질서 속에 운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경이로운 질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달의 인력 작용이라는 자연의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밤과 낮, 그리고 계절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19-23절은 이 사실을 평이한 언어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속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질서 속에 놓여 있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의 자연의 질서 전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부성애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자연의 질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며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 질서는 우리 삶에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 질서는 하나님을 통해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연에서 많은 무질서를 발견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타락과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와 피조세계를 향한 그의 사랑을 부정하는 태도가 인간을 지배하는 한 인간의 무질서를 경험하고 혼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질서를 깨닫지 못한 채 이를 무시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섭리를 지속적으로 행하셔서 우리에게 자신이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분명한 이유에 해당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부여된 자연의 질서는 우리로 하여금 과학을 추구할 목적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되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지으셨습니다. 자연에는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질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과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종교개혁자이었습니다. 그는 중세의 다양한 자연 철학 가운데 특히 천문학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천문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길이 열려 진다고 믿었습니다. 하늘의 별들의 운행과 질서를 탐구하는 천문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 광대하심과 그의 전능하심, 지혜, 그리고 선하심이 드러난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신학의 시작은 천문학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렘 10:1-2에 대해서 주해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천문학은 정당하게 신학의 알파벳으로 불리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올바른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하나님 지혜의 현현과 그의 능력과 선하심에 의해 감탄으로 붙들리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과학은 자연의 질서와 이에 숨겨진 신비를 탐구하여 인간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이끄는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과학의 임무이며 과학의 연구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깨닫도록 만들어주는데서 그 가치가 발견된다고 밝혔습니다.
과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 학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인 자연 세계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 그리고 그가 행하시는 일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소용을 위해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조금씩 깨달아가게 됩니다. 과학은 하나님의 섭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학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여기에 자신의 질서를 부여하셨으므로 이를 관찰하게 될 때, 피조세계의 과학적 원리가 파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서와 원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섭리를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섭리에 대한 신앙을 떠나고 이를 외면하는 과학은 자만감과 성취욕으로 부풀어 올라서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올려놓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과학의 부정적 차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는 수단임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 과학의 참된 목적이 발견됩니다.
과학의 참된 목적은 결코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외시하지 않습니다. 17세기 영국의 화학자 로버트 보일 (Robert Boyle)이 주장한 바와 같이 과학자들의 모든 연구는 하나님을 향한 철학적 경배 행위이어야 합니다. 과학자들은 자연을 탐구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초월적 능력과 신비를 발견하고 그 분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그를 높여 드리고 찬양하는 자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여기에 참된 과학자,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믿는 과학자의 모습이 발견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의 주인되심을 함께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과학과 모든 학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활용하여 자신의 일에 몰두하되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 되신다고 고백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칼빈은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i Deo gloria) 돌려 드리는 삶이 되어야 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아무런 예외없이 그분께 온전히 드려지게 될 때, 비로소 그의 주권이 온 땅에 널리 인정되고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놀라운 능력으로 이 세상을 보존하시므로 세상은 무로 전락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자연의 위협에서 보호받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자연에 놀라운 질서와 아름다움을 부여하시며 이를 통해 자신의 선하심을 증명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부여된 자연의 질서는 우리로 하여금 과학을 추구할 목적을 제공합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그의 피조세계인 자연에 대한 이해가 더욱 증진될 뿐 아니라 천지만물의 주재이신 우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저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