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리스도
한성훈 목사(살림교회)
‘오직 그리스도’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가 그리스도 외에 너무 많은 대체물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구호이다. 로마교회는 중세 스콜라 신학을 거치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그 사이에 엉뚱한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만을 드러내야 할 사제들이 중보자의 역할을 자처하였고, 미신적인 성자, 성물 숭배가 만연하였으며, 마리아를 인류의 공동 대속자(co-redemptrix)와 공동 중보자(co-mediatrix)로 추앙하며 기도와 찬양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영적 암흑기에 루터는 말씀을 연구하면서 “오직 성경을 통하여”(Sola Scriptura)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발견하였고, “오직 그리스도만”(Solus Christus)이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구원받는데 그것 역시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Sola Gratia) 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만(Solus Christus)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오늘날 현대 개신교회에서 중세의 타락한 로마교회를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강조하지만 적어도 한국교회가 중세교회를 비판할 자격이 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이 순간에도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5가지 솔라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구석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세교회와 흡사한 모습을 띠고 있으니 개혁자들이 통탄해마지 않을 듯하다. 본 글에서는 5가지 솔라 중에 ‘오직 그리스도’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인데, 종교개혁 당시 ‘오직 그리스도’가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중세시대에 그리스도에게로 나오지 못하게 만든 방해물
(1) 그리스도보다 높아진 교황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역은 로마와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이었다. 그 지역의 교회는 서로 수위권을 주장하였지만, 로마교회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을 계승한다는 명분과 제국의 수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상이 더욱 높았다. 그래서 로마교회의 주교는 다른 주교들과는 구별하여 ‘교황’(Pope)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명예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황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이자 세계 모든 교회의 우두머리로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레오 1세(440-461)는 로마 주교의 우위를 확고히 한 인물이며 첫 번째 교황이라 칭하는 인물이다. 그는 로마 주교가 ‘모든 주교들의 수장’이며, 그에게 ‘충만한 권한들’, ‘모든 양들을 보살필 의무’, ‘보편 교회 전체를 돌볼 의무’가 위임되었다고 주장했다. 레오는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은 대단히 겸손한 태도를 보였으나 공인으로서의 자신은 크게 높이는 이중적 태도로 해마다 자신이 베드로의 권좌에 즉위한 날을 기념했다. 또한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불신앙적인 교만이자 지옥에 이르는 길이라 선언하기도 하였다.
그레고리우스 1세(590-604)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세계연합 총대주교’라 지칭하자 이는 로마 감독의 특권을 해치는 것이라 하여 정죄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종들의 종’이라 자처하며 겸손한 칭호를 사용하였지만 이것은 자신이 모든 감독 위의 감독이라는 가장 큰 자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는 교황을 지상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삼는 세계적인 신정정치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사제들의 개혁을 위해 성경에도 없는 사제들의 결혼을 금하였으며, 기혼 사제들에게 아내를 버리라고 요구하였다. 그의 명령은 사제들의 강한 반발을 가져왔으나 그는 사제의 독신제도를 강행하였고, 그것은 곧 사제들의 은밀한 축첩과 부도덕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세속 군주가 사제를 임명하는 서임권에 대해 반대하여 교황이 서임권을 가져와야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을 통해 주교들을 교황의 충직한 신하로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서임권 투쟁으로 교황이 거둔 승리는 교회의 세속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중세 교황제의 황금기를 구가한 인노켄티우스 3세(1198-1216)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교황 칭호에 더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칭호까지 추가하였다. 그것은 곧 교회를 다스릴 권세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릴 권세도 부여받았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여서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 교리를 확정 공포하였고, 이단을 처벌하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화체설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종교재판소는 이후에 교황권 강화를 위해 많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악용되었다.
이처럼 교황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변질되면서 복음의 진리를 가로막는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교황제가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현저하게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그들은 베드로를 끌어들여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자처하였다. 그것도 세월이 지나면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체한 교회의 머리 역할을 하려 들었다.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은 많이 변해왔으나 교황의 수위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리로 남아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주교들의 단체인 주교단은 동시에 그 단장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더불어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목자들이든 신자들이든 모든 이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은 온전히 유지된다. 교황은 자기 임무의 힘으로 곧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온 교회의 목자로서 교회에 대하여 완전한 최고의 보편 권력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4권 6장을 통해 과연 베드로가 그런 수위권을 가진 사람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로마교회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 “시몬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이 두 구절이 베드로 수위권을 가리키는 구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에 어디에서도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 하시면서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하셨지만 이것은 베드로만의 특권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본문을 보면 다른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마 18:18; 요 20:23). 성경 구절을 샅샅이 살펴보면, 베드로는 그저 열두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나머지 사도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칼빈은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께서 대리자를 지명하셨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면서, 그의 다스림 아래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교황의 수위권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6항은 이렇게 답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교회의 다른 머리는 없다. 로마 교황도 어떤 의미에서도 그 머리가 될 수 없다. 그는 다만 적그리스도요, 불법의 사람이요, 멸망의 아들이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이라 일컫는 모든 것에 대적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이다.
루터 또한 교황의 수위권에 대해 마태복음 18장을 해석하면서 베드로에게 주었던 천국열쇠는 당연히 모든 신자들에게 준 것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징 권한은 모든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권한이지 교황의 권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루터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원리를 가지고 교황의 수위권과 사제들의 계급을 부정하였고, 이로 인해 사제와 일반 신자들 사이에 계급적 차이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2) 성인, 성물 숭배
성경에 무지했던 중세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잘 알지 못했다.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그저 지극히 두렵고 거룩한 분일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정의의 칼을 드는 무서운 심판자로 여겼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중개자로 삼아 그리스도께 나아가려 하였다. 한낱 육신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는 점점 하늘의 여왕으로 격상되었고 숭배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마리아의 모친인 안나에게 자신들과 마리아 사이의 중개자가 되어 달라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숭배는 안나 숭배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수많은 성인들을 숭배하였다. 또한 그 성인들이 남긴 유물까지 숭배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은혜와 은덕을 베풀어 준다고 믿었다. 당시 교회는 공식적으로 마리아와 성인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의 대상이라고 가르쳤지만 성경적 지식이 없던 사람들에게 공경과 예배의 구분은 모호하기만 했다.
하나님에 대한 공포는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고행과 금식 등 종교적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다녔던 곳을 고행하면서 순례하면 평생에 범한 모든 죄가 사면된다는 면죄 사상이나 지옥의 공포를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새로운 기도문을 작성하여 암송하는 제도 등이 생겨났다. 또한 불교에서 사용하는 묵주가 로마교회에 소개되면서 사람들이 묵주를 만지면서 그들의 소원을 아뢰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도 남는 공로를 제공하셨지만 당시 로마교회는 인간의 선행도 더해져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충분히 선을 행하지 못하면 천국에 갈 수 없고, 부족한 공로만큼 연옥에서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가 구원을 받을 만큼 충분한지에 대해서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에 로마교회에서는 성자로 인정된 사람들은 구원받고도 남은 공로가 있는데 교황이 이 공로를 나눠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면벌부이고, 이것을 사면 이 땅에 있는 사람이나 이미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이라도 연단의 시간을 대폭 줄여줄 수 있다고 사람들을 꼬드겼다.
칼빈은 무지와 미신으로 성물숭배를 조장하던 로마교회에 반대하였다. 그는 『기독교계가 성물 목록으로부터 유추하는 이익에 대한 경고』 (An Admoniton, Showing the Advantages Whi-ch Christendom Might Derive From an Inventory of Relics) 라는 글을 통해 성물 숭배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비판하였다.
십자가의 파편들이 온 지구상에 얼마나 산재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내가 가지고 있는 목록만 해도 족히 책 한 권이 되고도 남는다. 작은 마을이라도 성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 … 만일 조각들을 모두 찾아서 수집한다면 넉넉히 한 배에 실을 수 있을 만큼의 양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 과연 그것들을 지고 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 문제다. 십자가의 파편들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우려고 하는 철면피가 아니라면, 그것을 운반하기 위하여 300명이 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 이러한 가르침은 분명 마귀적인 것이다.
루터 또한 성인, 성상, 성물 같은 다양한 중보의 역할들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성상숭배와 성인숭배, 성물숭배 같은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8장 2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라고 고백한다.
(3) 고해성사
초대교회에서는 자신의 죄를 사제에게 찾아가 사적으로 고백하는 제도가 없었다. 물론 심각한 죄에 대하여는 진지하고 공개적인 참회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참회에는 엄격한 금식과 기도, 성적인 금욕, 공개적인 수치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다가 적절한 시간이 지나면 사제가 고행을 풀어주고 교회로 다시 받아들였다. 이러한 무거운 공적 범죄에 대한 공개적 참회는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 인구가 확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방식이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 가서야 침상에서 공개적인 참회를 하기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6세기경에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사적 고백을 어느 때나 할 수 있도록 하는 고해성사를 전파했다. 고해성사는 어떤 죄도 사적으로 다루어졌고 그 죄가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라면 은밀하게 고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개적인 범죄였다면,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서 공개적인 참회가 필요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밀한 곳에서 사적인 참회를 했다. 마침내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로마교회의 사제에게 죄를 고백함으로 죄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려 하였다. 그들은 성도 개인의 죄를 하나님 앞에 직접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들에게 은밀한 죄까지도 다 고백하도록 했다. 로마 교회에서는 이러한 고해성사의 기원을 예수님에게 두고 있으며,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권세를 받으셨는데(막 2:10) 예수님은 그 사죄권을 베드로에게 위임하셨고, 그 후로 사제들에게로 위임되었다고 본다(마 16:19). 이러한 고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제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중보자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고, 사제들 역시 자신들에게만 사죄권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사제들은 이 제도를 악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한껏 높이면서 교인들의 사생활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로마교회에서는 요한의 세례를 받고자 사람들이 죄를 고백했다는 사실과(마 3:6) “죄를 서로 고백하라”(약 5:16)는 말씀을 고해성사의 근거로 들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요한 앞에 죄를 고백한 것은 요한이 어떤 권위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 받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들며 반박한다. 세례란 죄 사함을 상징하기 때문에 세례 전에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죄를 서로 고백하라”(약 5:16)는 말씀은 상호 간의 고백과 상호 간의 기도를 연관 지어 말하는 것이다. 즉, 상호 간에 죄에 대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상대방의 고백을 들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죄의 고백을 듣는 특권을 사제에게만 부여하는 로마교회의 고해성사 제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는 사적으로 은밀하게 죄를 고백하는 것에 대해 나쁘게 보지 않았다. 어떤 형제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자기 태도를 고치면 그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죄의 고백을 통해 양심에 고통을 가진 이들 위로와 평안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고백이 사제들의 압제와 착취의 수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고해성사 제도를 비판하였다. 고해성사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힘입어 직접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2. 오늘날 그리스도에게로 나오지 못하게 만든 방해물
(1) 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는 각 종교마다 각자의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에 서로 관용적인 태도로 대화하면서 수용하자는 태도를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자들은 특정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을 배척한다.
지난 2012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각 천 명씩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종교에 대한 가치관을 조사한 바가 있는데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기독교인의 63.2%만이 “그렇다”고 응답하였다. 이는 같은 설문조사를 했던 지난 2004년에 “그렇다”는 응답이 77.1%였던 것과 비교해서 무려 13.9%나 하락한 수치다. 이 통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 기독교인의 세 명 중 한 명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또한 "특정 종교 뿐 아니라 여러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항목에 "그렇다"고 응답한 기독교인이 30.2%나 되었다. 이것 또한 2004년 25.4%였던 수치가 약 5% 상승한 것이다.
앞으로도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열어두는 종교다원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인 신앙은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500년 전 개혁자들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두고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이 시대는 진리에 관심이 없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선과 악, 윤리 등에 있어서 절대 기준을 부정하는 세대이다.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절대 진리는 인기가 없고, 절대 진리를 주장하다 보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무례하다고 여긴다. 과거에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비신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환영받는 가치는 ‘존중’과 포용’이다. 나와 견해가 맞지 않아도 존중해 주고, 더 나아가 대범하게 포용해야 지성인이라 여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밝힌 바가 있다. WCC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만으로 구원 받는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성당과 교회에서는 4월 초파일에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직접 절에 찾아가기도 한다. 언론에서는 이런 모습을 종교 간에 평화를 추구하는 아름다운 일인 것처럼 칭찬 기사를 쏟아낸다. 이와 같이 사회적 분위기는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우리의 보수 신앙이 현대 사회의 흐름에 맞지 않는 것임을 암시하면서 보수 기독교의 교리 체계를 버리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현상 속에서 여성 안수 문제나 동성애 같은 이슈에 있어서 보수적인 교회의 입장은 더욱 사회와 동떨어진 전근대적인 집단이라는 낙인을 받고 있다. 동성애가 합법화 된 미국에서는 동성애를 비판하다가 역차별을 받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21세기의 C. S. 루이스’라 불릴 만큼 기독교 변증가로 주목받고 있는 팀 켈러 목사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수여하는 ‘카이퍼 상’을 받기로 예정되었으나 여성 목사 안수와 동성애를 부정한다는 이유로 프린스턴신학교 동문들이 크게 반발하여 수상이 취소된 바 있다.
이렇게 우리의 교리 체계가 강력하게 도전받는 시대를 맞이하여 ‘오직 그리스도로만 구원 받는다’는 주장은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전수해준 바른 복음을 그대로 지켜 나가야 한다. 어느 시대든지 복음을 지키기 위한 희생과 대가를 치르지 않은 적은 없었다. 초대 교회만 해도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유일신 사상 때문에 집요하게 핍박받았지만 교회는 거기에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확장되어갔다. 세상이 우리 신앙을 포기하라고 종용해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믿음이 요구된다. 또한 종교다원주의가 대세를 이루어도 절대 진리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앞서 언급했던 팀 켈러는 그의 책을 통해서 “매번 복음을 설교하라. 복음을 설교하는 건,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현대 문화의 중심지인 뉴욕 한복판에서 선명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5천 여 명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를 세웠다. 우리 스스로가 절대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 그것에 반응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다.
(2) 그리스도 없는 복음
1980년대 말 ‘두란노 경배와 찬양’이 들어오면서 교회의 찬양 문화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전에 찬양이라는 것은 예배 시간에 피아노 선율에 맞춰 찬송가 부르는 것이나 청년부 모임에서 미국 곡을 번역한 고전적인 복음송을 부르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두란노 경배와 찬양’이 소개되면서 교회마다 현란한 악기가 도입된 찬양팀이 조직되었고 예배 때 찬양이 과거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찬양 집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설교를 통한 메시지보다 찬양에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청년들이 부르는 수많은 CCM 속에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과정이 실종되어 있다. 찬양팀의 웅장한 사운드에 맞춰 부르는 노래와 율동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하는데, 음악이 주는 흥분에 빠져서 가짜 회심과 가짜 은혜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
더 큰 문제는 찬양에 몰입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설교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찬양 시간에 뛰고 구르고 목청껏 부르다가 설교 시간이 되면 힘이 빠져서 졸기가 십상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니 믿음이 생기기 어렵다.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무엇을 하셨는지 잘 모른 채 찬양팀의 리듬에 취해서 찬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찬양 문화는 영적인 빈곤함을 가속화 시키고 있다.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긍정적인 삶의 태도와 세상에서 복 받고 성공하는 비결은 많이 강조되고 있는 반면에 죄, 지옥, 심판, 혹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설교를 거의 없으며 은혜, 구속, 속죄, 화해, 칭의 같은 영광의 주님과 십자가를 핵심으로 한 교리에 대해서는 더욱 전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귀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설교를 하려니까 죄와 형벌을 감추게 되고 윤리적 도덕적 설교에 그치는 것이다.
마이클 호튼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탄이 필라델피아를 장악한다면, 술집은 모두 문을 닫을 것이고, 도색물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깨끗해진 거리는 서로 웃음을 머금은 보행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저주 악담도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은 “예, 선생님” 혹은 “예, 부인”하고 공손하게 말할 것이며,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만 전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얼마든지 다른 것은 허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한때 ‘열린예배’라는 이름으로 비신자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모은 적이 있다. 전통적인 교회 초청 전도 방식을 바꾸어서 비신자들이 거부감 없이 교회에 드나들 수 있도록 음악과 연극 등 여러 문화적 장치들을 도입한 프로그램이다. 그 가운데 설교는 비중도 낮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전하지 않는다. 단지 위로와 평안, 인생의 성공에 대한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 처음부터 원색적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교회에 적응하기 전에 죄를 말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것을 꺼려한다. 처음부터 먹기 힘든 거친 음식을 먹이는 것은 사람들의 반감만 초래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군중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메시지를 전하였을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 만일에 예수님이 수많은 군중들을 붙잡고 싶으셨다면 듣기 거북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귀를 간질이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선명한 천국 복음을 전하셨을 따름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는 전도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복음의 근본을 훼손하면서 사람들을 교회에 붙잡아두고자 하는 생각은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였다(고전 1:23-24). 사도 바울은 그렇게 거리끼고 미련한 복음을 가지고 로마 제국을 변화시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감추고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려 노력했던 미국교회가 이전보다 더욱 성장했다거나 부흥했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갈수록 퇴보하고 있다는 암울한 소식만 들려올 따름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선명한 복음만이 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3) 목사 중심주의
종교개혁은 구약의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만인(전 신자)제사장설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제사장이므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신분적 차이를 부정하였다. 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누구나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물론 이 말은 ‘모두가 평등하니 목사도 필요 없고, 목사만 설교하는 것도 부당하다’는 식으로 잘못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신자를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개혁자들은 성경에 근거한 직분을 아주 중요하게 보고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회복시켰다. 목사는 가르치고 다스리는 직분이다. 그럼에도 개혁자들은 목사만이 제일 중요한 직분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다시 중세 로마교회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교황 밑에 추기경과 주교 그리고 신부로 위계서열화 되어 있는 로마교회처럼 목사를 정점으로 장로와 집사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교황제도를 부정했던 종교개혁의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각 교회마다 작은 교황이 자리 잡고 있는 형국이다. 자신이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을 강조하면서 목사들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고 신자들은 그저 묵묵히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목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기는 신자들이 많다. 그 결과 신자들 사이에서는 ‘내가 기도하는 것보다 목사님의 안수 기도가 더 효험 있다’는 식의 생각이 암암리에 자리 잡았고, 목사의 각종 비리나 추문에도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은 담임목사 한 사람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담임목사에 대해 절대의존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담임목사가 은퇴하거나 사임하면 교회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그와 비슷한 리더십의 목사를 선호하게 되고 담임목사의 아들이나 사위를 세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기존의 담임목사가 떠난다고 해서 흔들리는 교회라면 토대가 굉장히 취약한 교회임이 틀림없다. 결국 한 목사에 종속된 교회를 만들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과연 목사 한 사람 때문에 흔들리는 교회라면 그것은 목사의 교회인가, 그리스도의 교회인가? 거기에서 섬기는 교인들은 목사의 제자들인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인가?
소위 ‘스타 목사’들이 출현하면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한쪽으로 밀려나고 있다. 혹시나 후대 사람들이 자신을 추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라도 할까봐 염려했던 칼빈은 자기 무덤조차도 알리지 않았는데,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이렇게 예배를 타락시키며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목사도 문제지만 그런 목사를 추종하는 교인들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님께서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가지만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달아난다고 하였다(요 10:3-4).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참된 말씀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력을 가지고 교회를 선택할 것이다.
(4) 율법주의 만연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바르게 살라고 강조하는 도덕적, 윤리적 설교가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런 설교를 수없이 해왔으나 교회의 윤리적 수준은 퇴보를 거듭하여 세상으로부터도 질타를 받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윤리에 치중하는 설교가 빈번해지면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경건의 노력과 도덕적 열심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는 율법주의의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전하는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 ‘이것 하라’, ‘저것 하지 말라’ 하는 율법주의적 설교가 횡행하면 교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는 모습을 보인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 은혜임을 망각하고 자기 행위로 은혜를 따내려고 한다. 그래서 새벽기도나 큐티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지다가 빼 먹기라도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반감될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도 거기에 비례해서 나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고착화 되다보면 나름대로 경건하게 살 때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는 확신이 들지만 신앙에 소홀할 때가 되면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따내려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지만 이내 지쳐서 나가떨어진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대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을 벗어나려면 우선적으로 강단에서 그리스도를 강조해야만 한다. 설교를 통해 교인들의 미시적인 삶의 행태를 바꾸라고 요구하거나 주를 위해 무엇을 하라고 하기 전에 우리는 어떤 의로운 일도 행할 수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구원 얻기 위해서 자신이 뭔가 기여하려는 행태를 보인다. 설교자는 그런 위험성을 가르치고 구원에 있어서 오로지 그리스도만 바라보도록 해야 하며, 청중들은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로 거룩하게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한다. 설교뿐만 아니라 성례를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성령을 통해 내려주시는 은혜를 맛볼 수 있다. 성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말씀과 성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을 드러내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결 론
앞서 마이클 호튼이 예를 들었던 것처럼 교회는 넘쳐나고 각종 설교와 신앙 집회도 널려있어서 복음의 부흥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속에 그리스도는 실종되고 굳이 교회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보고 들을 수 있는 인본주의적인 잡동사니들만 채우고 있는 형국이다. 교황제도를 반대하며 나왔던 개신교회 안에 어느 샌가 작은 교황들이 자리 잡고 있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목사의 제자들을 키워내고 있다.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시작했다가 자기 노력으로 은혜를 채우려는 가슴 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교회 밖의 상황은 어떤가? 포용과 존중이라는 다원주의적 가치가 교회 안에도 밀물처럼 들이닥쳐서 ‘오직 그리스도’라는 교회 본래의 가치는 편협하고 낡은 주장처럼 여겨진다. 이미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구원의 길은 다양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IS(Islam State) 같은 과격분자들이 세상을 어지럽힐수록 종교다원주의는 더욱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고, 우리처럼 ‘진리의 길은 오직 하나’라고 주장하면 할수록 평화를 해치는 종교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선명한 복음을 가리는 각종 장애물들을 다 치워내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교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통해 이미 내 모든 것을 용납하셨음에도 내가 잘못하거나 뭔가 기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 모습 때문에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죄책감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자기 열심으로 자기 의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여기에 대해 목회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교인들이 율법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또한 목회자들은 자신이 교황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것처럼 행세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라고 비판하셨는데, 자칫 목회자들도 똑같은 잘못을 범할 수가 있다. 오직 우리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대외적으로는 아무리 종교다원주의가 대세를 이룬다고 해도 진리는 하나 밖에 없음을 천명하면서 복음의 선명성을 드러내어야 한다. 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종교가 쇠퇴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하이테크 시대에 사람들은 하이터치를 더욱 갈망한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21세기에도 사람들은 영적인 갈급함을 느낀다. 그런 상황 속에서 모든 종교가 결국은 다 똑같으며 구원의 길은 다양하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신다운 신, 참다운 구원의 길을 찾게 된다. 이 때에 선명한 복음은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설 것이다. 단지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구원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타협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인류의 해답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