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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하신 하나님(시편113:1-9, 빌2:5-11)

최성림 목사(동래언약교회)

오늘 본문인 시113편부터 118편까지는 하나의 연결된 시편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절기에 부르는 찬송입니다. 그래서 흔히 [애굽의 할렐]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시편113편은 114편과 함께 유대인들이 유월절 식사 전에 불려 졌고, 115-118편은 유월절 만찬 후에 불려 졌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육신하신 우리 주님’은 유월절 전날 밤,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나누시며 이 시편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찬송은 너무나 정확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과연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구속의 역사는 마땅히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스스로 낮아지신 우리 하나님의 이름은 그 택하신 백성들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오늘 시편은 ‘여호와의 종들’이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을 권하면서 시작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1) 그러면 시인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고 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들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기 때문’(4)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역사는 ‘여호와의 이름’을 통하여 증거되어집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경에 나타나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의 의미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은 당신의 구속 역사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인생들이 당신의 이루신 구속의 역사를 항상 기억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 백성이 부르는 당신의 이름을 통하여 그 구속의 역사를 알게 하셨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실 때 당신의 이름을 ‘족장들에게는 전능의 하나님(엘 샤다이)으로 나타내셨지만, 그 이름을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로는 알리지 아니하셨다’(출6:3)고 하셨습니다. 여기 ‘전능의 하나님’이란 이름은 그 숫자가 영성(零星)한 족장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동일하게 출애굽을 앞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친히(스스로)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라는 칭호는 족장들에게 ‘400년 후에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기다리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큰 구원의 소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아말렉족속의 공격을 받았을 때 여호와께서는 들려진 모세의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후 당신을 여호와 닛시로 계시하셨습니다. 광야길을 가는 동안 높이 들린 깃발이 되셔서 그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대적들의 손에서 지키시는 구원의 능력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백성들에게 게시된 하나님의 이름은 그 백성의 구속 역사를 계시하고 게시기에 그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이름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이 찬송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땅의 많은 찬양전도 집회자들이 소위 찬양전도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한다’는 말은 그 이름에 게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찬송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찬송을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깨닫지 못한 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시인은 누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인지를 뚜렷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입니다. 여기서 이 여호와의 종은 1차적으로 레위인들을 말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레위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본을 보이며 온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는 성령님께서 이 선언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지목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고백처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만유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마땅히 그의 지으신 모든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생은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거짓된 찬송이며, 실상은 어불성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여 부르신 자들만이,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여호와의 종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전도와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곧 시인의 선포대로 ‘해뜨는데 부터 해 지는데 까지’ 천하만민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게 되는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구원의 사역이 땅끝까지 전파되어짐을 통하여서, 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나라와 민족들 위에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하늘 위에 높아짐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해뜨는데 부터 해지는데 까지’ 이르는 모든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믿지도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그분의 엄위는 온 땅에 미치지만 그 분을 찬양하는 것은 오직 그의 종, 그의 백성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알며 그 이름을 찬송하는 일은 언약백성의 엄청난 영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선지자와 사도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정하시고 때가 차매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구속을 찬송하며 그의 하신 일을 증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진실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하고 그의 행하신 큰 일을 찬송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된 가장 뚜렷한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 시인은 주의 백성들에게 ‘주의 이름을 찬송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더욱 ‘이제부터 영원까지’ ‘해뜨는데 부터 해지는데 까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오순절 주의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성취되었습니다. 곧 행2장을 보시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을 때 모든 제자들이 방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복음을 듣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행2:5절을 보시면 ‘천하각국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있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천하각국에서 모여온 무리들이 사도들과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다 우리의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듣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속역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일이고, 우리 찬송의 제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세세 무궁토록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름이며, 주의 이 복음은 당신의 영광스러운 나라가 이르기 까지 전파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백성들만이 하나님의 하신 일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받은 주의 백성으로서 그의 이름을 찬송하는데 힘쓰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은 곧 스스로 경건을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나라위에 높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라’는 시인의 권고는 책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시인은 이 권고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송에 무감각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배은망덕하고, 또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지 않고 살아가는지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인의 경고는 바로 지금까지 여호와의 종이라고, 스스로 주의 택한 백성이라 자처하던 유대인들에 던져졌습니다. 곧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족속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 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행하시는 일을 보고도,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지도 못하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실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에게 까지 보여 알게 되어진 하나님 영광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을,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송의 제목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약에 대하여서는 외인이었던 우리는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 말 할 수 없는 벙어리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소경이나.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던 귀머거리를 회복시키어 당신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여호와의 종들이 여호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송하지 않을 때 하나님과 언약공동체 안에도 들어올 수 없었던 문둥병자를 들어, 또 돌을 들어서 라도 당신의 하신 일에 합당한 찬양을 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신 후 그분은 주의 성령을 보내시고,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천하만민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전도의 일을 하게 하셔서 해뜨는 곳부터 해 지는데까지 여호와의 행하신 크신 일을 찬송하게 하셨습니다. 선교를 통하여 지금까지 하나님께 대하여는 원수처럼 행하였고, 그의 언약에 대하여는 외인처럼 살아왔던 우리에게 여호와의 이름이 온 민족보다, 하늘 위에 뛰어난 이름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세상에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일이, 찬송하는 자들이 충만하기까지 우리는 주의 복음을 전파할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큰 일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의 백성이 되어진 자들입니다. 주님은 주의 택함을 받은 자들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시고,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주의 행하신 큰 일, 곧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더욱 그분은 모든 나라와 민족위에 뛰어나신 분이시기에 주의 나라의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주의 종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구원의 역사를 찬송할 때(전할 때) 그 아름다운 구원의 복음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2. 스스로 낮아지신 여호와를 찬송하라

사실 1-4v의 말씀을 보면 시인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해야 할 이유를 ‘그 분이 하늘 위에 높으시며 모든 민족들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기 때문에 찬양한다’고 밝힌 것 같습니다. 마땅히 모든 만물 위에 높으신 하나님은 높임을 받으시고, 찬송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새로운 반전을 꾀합니다. 곧 정말 비천한 인생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는 종들에게 질문하면서 답합니다. 5-6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그 분은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1)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
실상 우리가 믿는 우리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시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아담 이후 죄악으로 죽은 인생들은 도무지 높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저주 받은 땅에 거하는 자로서 하늘 위에 높으신 하나님은 아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할 때 그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시편기자는 그 여호와께서 도무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찬양할 수 있게 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곧 높은 보좌에 앉으신 그 분이 스스로 자기를 지극히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인생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이 땅에는 많은 이방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신들은 다 나무와 돌로, 금속으로 만들어 인간이 이름을 붙인 신들입니다. 실상 그 우상들은 존재 자체가 죽어있기에 자신을 믿는 자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있다고 보여준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들을 찬송하고 경배합니다. 

그리고 돌로, 나무로 만들어 진 이방신들이지만 그것들이 자기를 낮추는 예는 없습니다. 도리어 자신을 만든 자들을 통하여 자신을 높여 찬송하게 만들고 복종하게 만들고 바치게 만듭니다. 조금이라도 그 신을 낮추면 엄포를 놓고, 사제들을 통하여 가차없이 벌을 내립니다. 도무지 자기를 만들어 신으로 섬기고 있는 인간들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들의 어리석음은 비웃음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우리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물의 주관자이신 여호와는 오히려 자기를 낮추어 당신이 지으신 만물을 굽어 살피시며 타락한 인간이 도무지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없는 그때에 친히 언약을 통하여 그 백성을 만나십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를 하늘의 하나님께서 자기를 우리의 눈높이까지 낮추신 것이라 고백합니다.(웨신7장)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언약체결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입니다. 사실 인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사 우리가 자신을 향하도록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언약체결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피조물이며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을 만나주시고, 또 교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이 하나님의 언약을 듣는 자는 저절로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는 여호와는 찬양을 받으소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위하여 이보다 더 당신을 낮추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성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하나님의 성육신사건이라고 노래합니다. 실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벗으시고 죄인의 몸을 입으신 이 일 보다 더 놀라운 반전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심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성부와 성령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실 때 “왜 내가 가야하느냐고, 왜 하나님인 내가 저 완악하고 천박한 사람의 모습을 가져야 하고, 저들을 위하여 죽어야 하냐?”고 다투시지 않습니다. 또 당신을 우리 죄를 위하여 희생한다고 ‘내가 너희 하나님으로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 큰 일을 했다. 그러니 너희는 나를 높여야 한다’고 허영을 떨거나 위세를 부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시며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참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종의 형체를 입어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여기에 성탄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놀라운 성육신의 사건도 우리 주님의 낮아지심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참 하나님이셨지만 육신을 입으셨을 때 이 땅에서의 영예와 존귀를 억지로 취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둥지가 있지만 그분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헤롯이 궁전에 거하고, 빌라도가 총리의 관저에 거하며 자신의 군대로 위세를 떨었지만, 만왕의 왕이시며 열 두영이 더 되는 천군천사의 대장이신 그분은 도리어 원수와 대적들에게 뺨을 맞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옷벗기움을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죄를 대신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치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때에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셔서 “천사를 보내어 달라고 요청하시거나, 표적을 통하여 대적들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아버지여! 주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오직 종의 형체를 입어 당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본모습입니다. 

진실로 성육신에 새겨진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 공의와 진실을 아는 자라면 스스로 자신을 낮추사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온 마음을 드려서 찬송할지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진실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의 온 삶을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높은 보좌에 앉으셨으나 죄인들을 위하여 지극히 자신을 낮추사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송하고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선교요, 전도라 할 것입니다.  

2) 천지를 살피시는 하나님
이제 시인은 인생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찬송합니다. 6b에 “(여호와는) 천지를 살피신다”는 말씀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로서 스스로 낮아지셔서 세상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억나게 합니다. 

여러분! 천지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비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십니다. 

그런데 왜 언약공동체 안에서 어떤 이들은 가난하게 되고 어떤 이들은 궁핍하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오늘 이 시편의 8-9v이 엘리대제사장 시대의 사무엘의 어미 ‘한나의 노래’(삼상2:8b)와 일치한다면 이들이 가난하고 궁핍하게 된 이유는 당대 교회의 직분자들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곧 삼상 1-4장에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궁핍한) 이유는 대제사장 엘리와 엘리의 아들들의 범죄때문임을 성령님께서 간접적으로 연결시켜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엘리대제사장을 못할 때에 그가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웠다는 사실과 그가 비둔하였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서 이스라엘 안에 왜 말씀이 궁핍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 백성들이 가난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실상 성경에서 어떤 사람의 신체를 묘사할 때 그것은 단순히 외모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엘리처럼 ‘눈이 어둡다’는 말은 단순히 나이가 많아 노안이 왔다거나 시력이 나빴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보는 일’에 눈이 어둡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엘리제사장이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일에 눈이 어두웠기에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의 심각한 부족을 경험했고, 제사장 나라로서 지위에서 멀어지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또 ‘엘리의 비둔함’은 그가 어떻게 비둔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곧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억지로 빼앗아 취할 때, 엘리 역시 그 아들들과 함께 이 죄악에 동참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약 안에 어찌 가난한 자가 있고, 궁핍한 자가 있을까마는 언약 안에 하나님의 언약에 불순종하는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가난함을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난하게 되고, 궁핍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난한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궁핍한 자들의 간구에 응답하셔서 불의한 자들을 폐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을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워’ 방백들과 함께 영광의 위를 차치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일은 당연하게 일어나는 변화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히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를 낮추사 천지를 돌아보신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의 기도와 궁핍한 자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일을 행하십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새의 집에 말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비천한 목동이었습니다. 그의 아비나 그의 형들도 그를 천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진토에서 일으키셔서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워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일하게 하셨습니다. 삼상22:1-2을 보시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사울왕을 인하여 가난하게 되고, 비천하게 된 자들이 다윗에게 모여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거름더미에서 다윗을 드셔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가난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비천한 우리를 위하여 친히 죄인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그 분은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기에 날 때부터 조롱을 당하실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부은 나실 때 사관에 뉠 곳이 없어서 구유에 뉘이셨습니다. 그 부모는 가난하여 정결의식을 행할 때 비둘기 두 마리를 겨우 드릴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생애 기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존귀함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었지만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나사렛이단의 괴수로 정죄되어 공격을 당하셨습니다. 그의 모친과 형제들조차도 그분을 신뢰하지 않았고, 심지어 친척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은 어떻습니까? 온갖 조롱과 침뺕음을 당하고 채찍에 맞으며, 사람들에게 버림 바되는 것은 고사하고, 그의 제자들에게 마져 버림을 당하셨고,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의 죄를 지고 죄악의 구렁텅이에 들어가셨을 때 아버지 하나님 마져 그분을 버리시고 떠나가셨더랬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엘리 나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보십시오. 나사렛이라는 먼지더미에서 나신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높이셨습니다. 그 분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때에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지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고, 하늘보좌 우편에 앉히셔서 모든 무릎들로 주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부요한 것같으나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사탄과 세상의 교훈에 지배를 당하며 사망의 사슬가운데 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와 합하여 주의 신부가 되고, 몸의 지체가 된 우리로 이제 주와 함께 왕같은 제사장으로,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선지자적 직분을 감당하도록 불러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을 인하여 우리가 부요케 된 은혜의 역사”요, 우리가 전할 복음이며 선교의 주제입니다. 

3) 잉태치 못한 여자로 어미가 되게 하신 하나님. 
고대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혼인했을지라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여인들은 가정과 사회에서도 버림받은 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시인은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께서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신다’고 찬송합니다. 세상에서 조롱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던 여인을 주께서 친히 존귀히 여기사 이들로 그 자녀들과 함께 집에 거하게 하신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실상 이 찬송은 많은 믿음의 여인들이 불렀던 찬송입니다. 곧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90살이 되었어야 아들을 낳았고, 리브가는 결혼하고 20년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 시편의 시인이 8-9v을 인용한 한나의 시(詩)도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한나는 혼인을 한지 오래 되었고,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지만 아이가 없어서 탄식하고, 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한나를 위로할 뿐 아니라 사무엘을 여호와의 집 봉사자로 서원하였을 때 그녀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게 하셔서 “하나님의 집에서 자녀의 즐거운 어미로 살아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류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엄청난 역사를 행하십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보통생식법을 통하여 자녀를 낳게 하시고, 집을 세워가게 하십니다. 성경 역사에서 우리는 가끔씩 석녀(石女), 곧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을 만나지만 이들은 모두 혼인을 통하여 남자를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보통생식법의 질서아래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하신 아들을 남자를 알지 못하는 한 여인의 태에 성령으로 잉태케 하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집을 세우게 하셨습니다.(소교리21-22문답) 그분은 죄인의 몸을 입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를 정하신 것입니다. 실상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창조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입니다. 그런 관계로 우리 주님은 보통생식법으로 태어난 다른 모든 아이들보다 더 많은 조롱과 비웃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실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이를 도무지 낳을 수 없는 여인의 몸을 통하여 나심은 그분의 낮아지심이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바임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남자를 알지 못하여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은 자신이 몸으로 받을 정숙하지 못한 여인이라는 조롱과 수치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태중의 아이를 향하여 ‘하나님 내 구주’라고 불렀고(눅2:46), 아이의 즐거운 어미가 되어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우리 주님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받는 자’로 양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자라 십자가 위에 달리실 때 그녀는 자신의 육신의 아들이 당하는 고통을 인해 마음에 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육신으로는 자신의 태로 태어나 자신의 아이를 성령으로 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음으로,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세우실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언약의 자녀들을 즐거워하는 어미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로 함께 주의 집을 지어가도록 부르셨습니다. 실상 우리는 언약의 집을 세우는 일에는 불임녀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의 집에 거하며 주의 신부로 살아갑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주의 집을 가꾸며 아름답게 세워가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그분이 그 말씀으로 이루신 일이고, 누리며 살아가는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이 잉태치 못하는 여인으로 어미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죄의 문제는 아직도 해결할 방도를 알지 못하여 지옥불로 떨어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싱.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하나님의 지혜는 놀랍고도 절묘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성탄의 계절에 하늘 높은 곳에 게신 우리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지시기위하여 성육신하신 이 놀라운 진리를 찬송합시다. 근본 하나님의 보체시나 종의 형체로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노래합시다. 잉태치 못하는 여인의 태를 통하여 성육신하셔서 우리로 주의 집에 거하게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이름의 능력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이 선교요, 복음전도입니다. 
이제 우리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신부된 자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그의 주시는 생명의 복음을 선전하며 그의 행하신 큰 일을 노래하면서 살아감으로서 성탄의 큰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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