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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임경근 목사(다우리교회)

1. 들어가며

  “이 영광을 ooo에게 돌립니다!” 운동선수 금메달리스트나 혹은 대학 합격, 어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한 사람이 하는 인사 속에 ‘영광’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 때 영광은 ‘유명’과 ‘영예’라는 의미가 있다. ‘영광’은 쉬운 말로 일종의 ‘칭찬’이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오직 하나님께만 영예와 칭찬이 있다는 뜻이다. 

  ‘오직’(‘sola’ 혹은 ‘soli’는 주격 형태 ‘solus’에서 격에 따라 변화된 형태)이라는 단어는 로마교회의 교리와 전통으로부터 성경의 진리를 되돌려 놓으려고 붙인 핵심 쟁점 교리 다섯 가지에 붙여졌다. ‘오직’이라는 단어는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정황 속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고 이해하면 이 용어를 오해할 가능성이 많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구호들은 ‘무엇(A)’을 진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A)이 아니라) 오직 무엇(B)’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역사적 정황을 이해해야 한다. 종교개혁은 구원이 인간의 대리나 전통과 공로 없이 오직 성경,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와 오직 그리스도로 이루어지니,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강조하지만, 로마교회는 지금까지도 잘못된 교리와 전통과 법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로마교회의 교리와 삶을 개혁한 종교개혁의 역사적 상황에서 붙여진 ‘오직’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종교 개혁가들이 죽음을 각오하며 싸워 파수한 다섯 가지의 ‘오직’(Five Solas)은 오늘날에는 구시대적인 유물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은 오늘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유익하다. 특히 하나님의 권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을 높이는 현대의 분위기는 기독교인들에게 또 다른 도전이다. 현대 IT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나타난 스마트 세상은 ‘오직’ 하나님만을 주장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현대인은 ‘자기애’와 ‘허영심’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생각하는 하나님 없는 현대인의 삶은 덧없을 뿐이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영광을 강조하는 개혁신앙은 적실하다. 자기 자신의 명예와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주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2. 언어적 의미

  종종 ‘솔리 데오 글로리아’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로 해석하고 사용한다. 이 해석에서 주어는 ‘인간’이고 목적어는 ‘영광’이고 대상은 ‘하나님’이다. 성도가 이 구호를 사용하지만, 종종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쉽다. 구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성공과 번영을 위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솔리 데오 글로리아’의 뜻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이다. ‘영광’(gloria)은 목적격이 아니라 주격(norminativus)이며 ‘하나님’(Deo)는 여격(dativus)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혹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그리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영광’(gloria)의 히브리어 뜻은 ‘무게가 많이 나가다’(삼상 4:18) 혹은 은유적 표현으로 ‘부자’(창 31:1) 혹은 ‘높은 지위’(창 45:13), ‘공경함’(말 1:6), ‘빛남’, ‘장엄함’, ‘영광스러움’(학 2:4), 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의미한다. 


3. ‘3가지’인가 ‘5가지’인가?

  본래 유럽 교회는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구호로 ‘세 개의 솔라’(Three Solas)를 말한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솔라 피데’(Sola Fide)와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이다. 본래 종교개혁 시대에 멜랑히톤이 1554년 “우리는 오직 은혜로 의로워지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sola gratia justificamus et sola fide justificamur)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20세기가 되기까지 조직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1916년 루터 학자 테오도르 엥겔더르(Th. Engelder)가 자신의 책 제목에 종교개혁을 세 가지 원리로 사용하면서 일반화 된 듯하다.  

  영미권에서는 여기에 두 가지,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와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를 첨가해 ‘다섯 개의 솔라’(Five Solas)를 즐겨 사용한다. 세 개에서 다섯 개로 늘어난 구호는 첨가된 ‘솔리’(soli)와 ‘솔루스’(solus)가 ‘솔라’(sola)와 음운이 일치하지 않아 어울리기에 불편하다. 더구나 세 개의 ‘솔라’ 시리즈는 모두 부사구 형태이다. ‘솔라 피데’는 ‘오직 믿음으로’(by faith alone), ‘솔라 그라티아’는 ‘오직 은혜로’(by grace alone), ‘솔라 스크립투라’는 ‘오직 성경으로’(by scripture alone)인데, 첨가된 두 가지는 부사구가 아니라, 명사구이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God's Glory Alone)이며 ‘솔루스 크리스투스’는 ‘오직 그리스도’(Christ Alone)이다.  세 가지 솔라에 두 가지가 함께 나타나는 문서는 1965년 메츠(Johann Baptist Metz)의 책 『교회와 세상』이다. 

   물론 지금 와서 3개가 맞느냐, 5개가 맞느냐,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지금은 다섯 가지(Five) 솔라에(Solae, 솔루스의 여성 복수형태)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 첨부된 두 가지 개념도 종교개혁의 특징을 잘 보충해서 표현한다.  
   
  2017년 종교개혁500주년 기념으로 미국 서던 뱁티스트 신학교 강사인 메튜 바렛(M. Barrett)은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다섯 가지 주제를 가지고 다섯 권의 책을 출판하도록 기획했다. 과거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새김질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이 오늘에도 여전히 적실한 주제임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2015년부터 출판되기 시작한 책들은 2017년까지 다섯 권으로 차례로 출판되었다. Th. R. Schreiner, Faith Alone -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Zondervan 2015), M. M. Barrett, God's Word Alone-The Authority of Scripture(Zondervan 2016), D. M. VanDrunen, God's Glory Alone - The Majestic Heart of Christian Faith and Life(Zondervan 2016), S. J. Wellum, Christ Alone - The Uniqueness of Jesus as Savior(Zondervan 2017), C. R. Trueman, Grace Alone - Salvation as a Gift of God(Zondervan 2017). 부흥과개혁사는 2017년 9월 현재까지 『오직 믿음』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번역 출판했다. 
 
  ‘솔라 스크립투라’, ‘솔라 피데’, ‘솔라 그라티아’, ‘솔루스 크리스투스’, 이렇게 네 가지 주제는 권위와 구원에 대한 로마교회와 종교개혁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하지만, ‘솔리 데오 글로리아’는 이 네 가지를 통합하고 엮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즉, 앞선 네 가지 주제는 ‘솔리 데오 글로리아’로 모아진다.  


4. ‘솔리 데오 글로리아!’

  ‘솔리 데오 글로리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쓰임새를 살펴보자. 그 다음은 ‘솔리 데오 글로리아’가 종교개혁의 구호가 맞는지 기원을 살펴본다. 이어서 성경을 잘 정리한 요리문답,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역으로 추적해보자. 마지막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자.

1) ‘솔리 데오 글로리아’의 쓰임새 

  다시 한 번 더 언급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보통 ‘솔리 데오 글로리아’를 ‘글로리아’, 즉 ‘영광’을 목적격으로 해석하여 마치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의 행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성경에도 명시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이 많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하지만,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솔리 데오 글로리아’의 ‘영광’은 목적격(gloriam)이 아니라, 주격(gloria)이다. 만약 인간을 주어로 사용한다면 ‘영광’은 자연스럽게 목적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구호의 일차적인 관심은 주어인 ‘영광’ 자체이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뜻이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고 하나님에게서 끝난다. 영광의 기원과 목적이 곧 하나님 당신 자신이라는 뜻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who I am)라는 하나님의 이름(출 3:!4)과도 관련이 있다.

  데이비드 반드루넨은 잉글랜드 정통주의 신학자 에드워드 리(Edward Leigh, 1602-1671)와 미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그리고 네덜란드의 대표적 개혁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견해를 자신의 책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소개한다. 

“먼저 오직 하나님만이 온전히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본성의 내적 속성으로서의 영광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일에서 영광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설명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 하늘들에서 빛나게 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현세의 삶 속에서 우리의 순종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한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몸과 영혼을 완전하게 해서 새 창조 세계의 영광을 자기와 더불어 누리게 하는 것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영광은 하나님에게 내재하고 피조세계에 발산되고 특히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삶 속에서 순종과 예배를 통해 나타난다.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영광을 누리신다. 

2) ‘솔리 데오 글로리아’와 신앙고백, 그리고 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개혁신앙을 잘 요약 정리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도 마찬가지이다. 위에 있는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의 첫 질문을 보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특이하게도 ‘영광’을 다루는 요리문답의 주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렇다면 웨스트민스터의 요리문답들은 인간 중심으로 영광을 이해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질문의 의도는 하나님께 중심을 둔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이기에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고 마음이 어두워졌다(롬 1:21).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다(롬 1:22). 인간을 통해 밝게 빛날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이다. 그 영광은 하나님 자신이고 그분으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요리문답의 질문은 어떤 의도일까? 요리문답을 살피기 전에 먼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살펴보자.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2장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대해 잘 설명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함과 행복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홀로 자기 안에서 온전히 만족하신다. 그분은 자신이 지은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영광을 구하지도 않으시며, 오직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 그들에게 영광을 나타내실 뿐이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영광은 성경을 통해 자기를 계시함으로(WC 1.5-6) 나타난다. 또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모든 일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통해 자신을 영화롭게 한다(WC 2.1). 하나님은 자신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통해서 영광을 드러낸다(WC 2.3). 하나님은 창조사역(WC 4.1)과 섭리(WC 5.1), 그리고 인류의 타락(WC 5.4)을 통해서 영광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영광의 상태로 만드시고 최종적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도록 하신다(WC 9.6; 16.5; 18:1; 26:1). 그러므로 영광의 주어는 하나님이 먼저시고 사람이 그 다음이다. 하나님 당신이 먼저 영광의 본채이시고 그 영광을 사람에게 회복시켜 주시고, 나중에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요한은 그 광경을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

  신앙고백서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요리문답에서는 어디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까? 요리문답 중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문답(WLC 7; WSC 4)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서술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하나님의 영광 자체에 관심을 둔다면, 요리문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인간의 책임에 대해 많이 다룬다. 특별히 예배와 관련해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부분이 많이 나타난다(WSC 46; WLC 104, 112, 159, 184, 190). 

  요약하면, 먼저 영광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일에 자신을 영화롭게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인간 속에서 그리고 인간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바로 영광을 나타내시는 방법과 통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속에서 그리고 인간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일에 ‘솔리 데오 글로리아’로 화답할 수밖에 없다.

3) 구약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에게는 스스로 영광이 자기 안에 온전하다. 타락한 인간은 그 영광 앞에 설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영광을 나타내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출 16:10) 그 후 모세가 시내 산에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출 19:16)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백성은 모두 떤다. 이 후 시내 산을 떠날 때 즈음 모세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한다(출 33:18). 하나님이 영광을 보여주지만, 모세가 본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반석 틈에서 등만 겨우 볼 뿐이다(출 33:20-23).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 영광은 복의 증표임과 동시에 심판의 경고였다. 모세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제사를 드렸기에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레 10:1-2)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구름과 불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마냥 복일 수 없었고 심판이었으니 인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이 완성될 때 절정에 이른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4-35) 

  광야 유랑생활 40년 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좀 달라졌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사라지고 성막 안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동한다. 이 영광 또한 인간의 죄로 인해 한계가 있다. 엘리 제사장과 그의 폐륜 자녀들로 인해 “이가봇”(영광이 없음)이라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삼상 4:21-22). 

  솔로몬 시대에 언약궤가 성전으로 옮겨질 때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재현된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대하 5:13-14) 이제 옮겨 다니던 회막은 안정적인 성전으로 정착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외형적으로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이 보장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이어지는 불순종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한 복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이스라엘은 결국 자신의 죄로 인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다. 하나님의 영광의 좌소인 성전은 파괴되고 언약궤는 사라지고 그 백성은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암담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수많은 선지자들(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환상과 비전과 묵시들을 통해 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 받을 때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지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것)에 가득한 환상을 본다(사 6:1-4).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반응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죄인에게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 있다. 에스겔도 선지자로 부름 받을 때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겔 1:28)을 본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르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겔 10:4). 에스겔이 본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는 미래의 성전(겔 43:4; 겔 40-48장)이다. 

  이사야와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예언하지만, 그 하나님의 영광은 에스라-느헤미야에 나타난 성전재건과 성벽재건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약속이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느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3)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 나라들로 확장될 것이다.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사 62:2)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사 66:19) 그 하나님의 영광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하지 않고 이방 모든 백성을 향한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들어보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슥 2:5) 학개 선지자를 통한 약속을 보라. “조금 있으면.....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 2:7-9)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복이었지만, 그들의 죄로 인해 그 영광은 그들에게 심판으로 결론난다. 구약의 역사는 인간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 복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만민에게 비추실 것인가? 구약 성경은 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예언하고 있는가? 그것은 다윗 왕 가문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하나님이 다윗과 언약을 세울 때 이렇게 말한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이사야 선지자도 다윗의 가문에서 구원자가 올 것임을 예언한다.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사 4: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이렇게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과 구름 기둥으로 나타났다면, 신약 시대에는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메시아로 인해 나타날 것임을 예언한다. 

4) 신약과 하나님의 영광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과 성전에 임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 성전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19-22) 이름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인 것과 관련이 있다. 더구나 요한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성육신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거하시매’는 ‘장막을 치매’(계 7:15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로 번역할 수 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문 구약의 장막과 성전이다.  

  그리스도의 성전 되심은 성령 하나님이 그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더 분명해 진다. 그 점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바였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1-2)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 예수님은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고(눅 1:35),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마 3:!6; 막 1:10; 눅 3:22),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고(막 1:12), 성령을 힘입어 귀신들 쫓아낸다(마 12:28). 

  누가는 변화 산에서 보인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눅 9:28-36)을 잘 보여준다. 예수님의 얼굴이 변화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다(29절, 참고 출 34:29-35). 누가는 “예수의 영광”을 설명한다. 구약에 나타난 영광의 상징인 구름이 등장한다.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34절)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무서워한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라는 소리도 들린다(35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의 고난과 별세 이후 부활을 통해 하늘 영광을 받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롬 8:3), 고난당하시고(사 52:14), 십자가에 죽으심(고전 2:8)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에 나타난다. 동물의 마굿간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천사의 노래 속에 “하나님께 영광이요”(눅 2:13-14)가 울려 퍼진다. 비천함과 영광이 공존한다. 역설이다.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러 떠난 것을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요 13:31)라고 표현한다. 곧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라고 한다(요 17:5-6). 인간의 눈에는 전혀 영광스럽지 않은 사건을 영광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생명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도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24) 성자의 고난과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성육신 -> 고난 -> 십자가 -> 부활 -> 승천 -> 하늘 우편에 좌정)의 과정이기에 영광스러운 것이다. 성령은 성자에게 권능을 주어 영광스러운 사역들을 하게하고, 성자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성부를 영화롭게 하며, 성부는 자신의 순종하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본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는 “영광 가운데서”(딤전 3:16) 하늘로 승천하시고 하늘 우편에 앉으시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과 존귀로 관”(히 2:9)을 쓰셨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하늘에 나타난 예수의 영광을 본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5-56) 이 광경은 이사야가 본 환상과 비슷하다(사 6장).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다(막 14:62). 이 모습은 시편 110편 1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늘 영광을 받으셨음을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도다.”(히 1:3) 베드로와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벧전 1:21)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 기록한 하늘의 모습을 보면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본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하늘 도성에는 성전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계 21:22)이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

  그리스도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얻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에도 함께 할 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얻은 영광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 받을 것이다(살후 2:14; 딤후 2:11).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물론 이 땅에서도 성도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고 누리고 있지만 말이다(고후 3:7-18).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영광은 하나님께만 존재한다. 하나님이 영광의 근원이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그 영광을 나눌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영광을 다시 비추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솔리 데오 글로리아’의 두 번째 측면을 배우게 된다. 영광은 하나님께 있는데, 그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주어지고, 그리스도(Christ)는 얻은 영광을 그리스도인(Christian)에게 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人)은 이 영광을 어떤 식으로 누리며 사용하게 될 것인가?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으로 창조되었다. 바울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고전 11:7)라고 말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1-5) 인간은 하나님의 법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어야 했지만, 인간은 타락하여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여 그 영광을 가로채려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다시 영광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골 1:28)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 “영광의 복음”이 교회를 통해 전파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죄인에게 적용해 주신다. 소요리문답은 그 점을 분명하게 정리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부르셔서,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값 주고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주십니다.”(WSC 30문)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믿는 각 사람 위에 머물게 함으로 성령을 따르는 “성령의 전”(고전 6:19)이 되게 한다. 구약 시대에 성막 위에 구름의 모양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 했던 것을 기억나게 한다. 

  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이다. 이 점을 한국교회가 많이 간과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의 육체는 연약한 질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에 박해와 모욕과 고난을 당한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았다(고후 4:10). 이 점에서도 역설적인 원리가 적용된다. 그리스도인은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보배인 복음 때문에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난당하는 성도에게 권면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3-14) 성령님은 고난 속에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영광의 영’이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미래에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것이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 73:23-24) 후에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의 불완전한 모습이 완전하게 될 것이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6) 성도와 하나님의 영광

  이제 제목이 ‘5)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에서 ‘6) 성도와 하나님의 영과’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에게 그 영광을 다시 돌려드리는 순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없는 영광을 우리 가운데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받은 것을 돌려드리는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드린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영광을 다시 찾으셨다. 이제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만드신 본래 목적으로 돌아온 셈이다.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소ㆍ대요리문답 제1문의 가치가 드러난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여러 곳에서 그 점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20)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데이비드 반드루넨은 ‘믿음’, ‘예배’, ‘모든 삶’을 방법으로 제시한다. 
  첫째,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바울은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20)라고 한다. 믿음에서 선행이 흘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롬 14:23; 히 11:6). 또 바울은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라고 한다. 믿음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둘째, 성도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에 찬송으로 영광을 돌렸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눅 2:14)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천사들의 찬송을 보라.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 19:1; 5:9-12, 7:12, 15:3-4, 19:1-6) 성경은 시편(시 29:1-2, 86:9, 103:20-21, 138:4-5), 선지서들(사 24:14-16, 42:12, 66:19), 복음서(눅 19:37-38), 그리고 서신서들(빌 2:10-11; 롬 11:33-36, 15:6; 고후 4:15; 히 13:21; 벧후 3:18; 유 1:24-25)에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노래한다. 
  셋째, 성도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 대표적인 구절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권면도 주목할 만하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성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5. 나가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현대인에게 답하다. 

  이제 결론에 다다랐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라는 종교개혁 구호는 현대인에게 어떤 대답과 해결점을 줄까? ‘분주함’과 ‘산만함’은 현대인의 삶의 대표적인 특징들이다. 산업혁명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고된 노동으로부터 자유하게 한 면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고된 노동으로부터 벗나가고 있지만, 또 다른 고통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남는 여유 시간, 공간, 힘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 투자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애’와 ‘허영심’은 현대인에게 쉽게 발견되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오늘 현대인에게만 문제가 아니었다. 바울은 이미 이런 인간의 모습을 교회 초기에 경고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제일 처음 등장하는 말세의 내적 징조가 바로 ‘자기애’이다. 이것은 오늘 현대에도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삶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이런 현대인의 삶에 종교개혁 구호 ‘솔리 데오 글로리아’는 귀중한 답을 제시한다. 이 부분에 앞서서 정리한 요리문답, 성경 내용을 2-3줄로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대인은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인식하고 인간의 자기중심적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구체적으로 애써야 할 부분들은 무엇일까? 우선 주변의 삶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IT기술로 인해 등장한 인터넷 세상, 스마트 폰, 그리고 텔레비전과 각종 전자오락 분야가 생산하는 온갖 ‘산만함’과 ‘분주함’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스마트폰의 폐해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어린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들도 이런 산만하고 분주함 삶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대인의 삶은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예배와 기도와 믿음 생활이 어렵다. 밤늦은 시간까지 인터넷에 매달리거나 세상 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스포츠 게임을 본다고 토요일 늦게까지 자지 않는다면 예배에 늦기 일쑤이고 졸거나 주일이 피곤하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들어나는 삶은 점점 침해 받고 있다. 조용히 앉아 기도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컴퓨터 화면을 더 믿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 신앙을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 주의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기에 ‘솔리 데오 글로리아’는 여전히 오늘도 필요하며 실천해야 할 구호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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