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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엇을 보느냐?
렘 1:11-19

김하연 목사(대구 삼승교회)

서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명자로 목적있게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알고 보셨다고, 우리에 대한 생각이 많으시다고 했습니다 (시139:14-17).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주시고 우리가 그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사명자에게 혼선이 생기는 일로 많은 이들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셨고, 동시에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명자입니다. 그런데 사명을 잊어버리면 길 잃어버린 인생이 되고 맙니다.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이 세상에 살면서 자칫 세상의 물량주의 성공주의에 빠져서 사명을 잘 감당하지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세상에 전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간에는 심지어 ‘작은 교회의 적은 큰교회다’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우리의 원수는 마귀가 아닙니까? 우리의 사명은 죽은자를 살려내는 사명이 아닙니까? 그런데 뭔가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지금 목적과 대상이 무엇인가가 잘 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큰 교회는 더 큰교회가 되는 것이 목적이고, 작은 교회는 어찌하던지 큰 교회 되고 싶어합니다. 가난한자는 부요하기를 원하고 부한 자는 더 부요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로지 이런일에 집중하다보면 사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름받고 하나님께 처음 계시를 받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불러서 그 당대에 전하고 싶은 분명한 메시지를 주시고 걔십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끝까지 잘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가 무엇을 보기를 원하시며 그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본문을 통해서 다시한번 하나님 앞에 사명자들, 모든 성도들은 삶의 자세를 새롭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다시한번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1.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예레미야 1장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물었을 때 예레미야는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살구나무 보여주고 무엇보느냐 하시고, 살구나무라고 하니 ‘잘했다’고 하시고 이 모습은 그냥 그림 보여주듯 하는 이 말씀은 좀 싱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예레미야 1장
 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하시는 말씀은 사실 한국말로는 이 말씀이 잘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살구나무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함에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면 왜 이런 장면을 연출하고 계십니까? 히브리어는 여기에 워드 플레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살구나무가지를 보나이다’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켈 솨케드 아니로에’(내가 아몬드 가지를 봅니다-살구나무가 아닙니다)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내말을 지킨다(히, 키 쇼케드 아니)’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는자, 지키는자’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일종의 ‘워드 플레이 (말유희)’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몬드 나무를 말하는 ‘솨케드’는 보는 자라는 뜻의 ‘쇼케드’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같은 어근의 단어를 가지고 다른 의미의 말을 연상케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 ‘지키는자(쇼케드)란 말은 시편 127편 1절에  “여호와 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지키는 것)이 허사로다”하고 있습니다.  파숫군의 경성함, 곧 지키고, 지켜 보는 것이 바로 쇼케드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아주 주의 깊게 살피고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아몬드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서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곧 임박하게 실현될 것을 눈으로 보듯이 분명히 보겠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한가지 더 환상을 보여주시고자 합니다. 

예레미야 1장
 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시한번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예레미야는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라고 대답하고 하나님은 이에 대해서 

예레미야 1장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 모든 거민에게 이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도 우리 한국말로는 직접적인 느낌으로는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끓는 가마솥의 물이 물론 뜨겁기는 하겠지만, 그것에 있는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고 ‘이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큰 화가 미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국말로 ‘끓는 가마’로 번엮된 낱말은 히브리로 ‘씨르 나푸아흐’입니다. 이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람이 불어넣어진 솥이란 것인데 이것은 그냥 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22장
 20 사람이 은이나 놋이나 쇠나 납이나 주석이나 모아서 풀무 불 속에 넣고 불을 
    불어 녹이는 것 같이 내가 노여움과 분으로 너희를 모아 거기에 두고 녹이리라

여기에 ‘불을 불어’라고 하는 표현은 풀무불 즉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서 넣어서 뜨겁게 해 쇠를 녹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바람이 잔뜩 풀어진 솥’은 바로 ‘바람이 불어 넣어져서 뜨겁게 달을 대로 달은 용광로’를 연상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단순한 끓는 가마솥의 물이 아닌 것이요 용광로의 불로 심판의 도구를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신상에 절하지 않다가 용광로에 들어간 사건을 생각하면 됩니다(단3:19). 이것은 심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이 두가지 환상은 사실 하나입니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반드시 심판하겠다는 것이다. 반드시 심판하겠고 그리고 그것은 이미 임박했다는 것이고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적용)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은 북한이 핵폭탄을 만들어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세대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핵폭탄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이 너무나 담대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은 엉뚱한 것에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두려워서 벌벌 떨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린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운사람에게는 미운것만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것만 보입니다. 전적인 내 주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명자임을 생각할 때에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를 원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면 이것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멧센져로써 이땅에 보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그 뜻가운데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전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고자 하시는 “말씀”은 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은 별로 관심없고, 내가 좋아하는 죄와 세상의 쾌락만을 보고, 자신의 야망만을 본다면 그는 눈먼 자요, 그는 사명자가 아닙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이제 하나님의 시각으로 다시 돌아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전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까? 시인은 잎 새의 한방울 물에서도 온 세계를 본다고 한다. 우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명을 잃어버린 메센저가 되어서는 안되고 길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방황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은 어디에 임합니까? 

하나님은 북방의 나라, 곧 앗수르, 바벨로, 바사 등의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치시겠다고 하십니다. 

예레미야 1장
 15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5절의 우리말 번역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대부분의 영어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면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고 했는데, 이는 마치 성문 앞에 그리고 성문 주위에 포위하는 진을 치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처럼 표현 하고 있습니다(Tanakh, New America Standard Bible포함). 

그러나  히브리 본문으로 보면, 이것은 마지막 공격 직전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 상황 끝의 모습입니다. 성문 앞에 왕좌를 놓는 것이 아니라 성벽위에 놓는 것이며, 또 더 정확히 말하면 성벽의 문에 앉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미 정복한 성의 주인이 되어서 문에 왕좌를 놓고, 여러 가지 재판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왕상 22:10 이스라엘왕과 유다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문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사돈간인 두 왕이 어느 선지자의 말이 맞는가 테스트 결정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왕의 보좌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레미야의 본문은 이미 전쟁이 끝이나고, 완전 정복 당하고, 오직 북방의 왕들이 예루살렘의 성과 성벽에서 주인 노릇하는 상황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레미야의 현재 시점으로 볼 때에 미래의 일이지만 너무나 확실한 일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를 더욱 확고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때로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너무나 확실한 사건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확고하게 심판을 맹약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심각한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몇가지 아주 분명한 죄를 지었습니다. 

예레미야 1장
 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첫째는, 하나님을 버린죄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택하여 키우시고, 민족을 만드시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용서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훼방죄와 같습니다. 한번 은혜를 체험하고, 예수에게 욕을 돌리는 자인 것입니다. 

둘째는, 그것은 다른 신들에게 분항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다른 신이 영광받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다른 신은 없을뿐더러, 여호와 그분만이 오직 영광스러운 분이신데...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들에게 분향하고 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다른 것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용납될수 없습니다. 

셋째는, 이스라엘이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에게 경배한 죄입니다. 하나님을 잘못된 방식으로 섬기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출 32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송아지 만들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여호와’ 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을 겨우 자기 손으로 조각해서 만들어낸 그런 우상조각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멋대로, 제 편한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러한 모든 죄를 하나님은징계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긴급하게, 심각하게 말입니다. 

적용)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배신자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그분을 기억하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오직 홀로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올림픽의  영웅도, 나의 출세도, 우상숭배는 더욱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바로 믿기를 원하십니다. 요즈음 ‘가나안 교회(교회 안나가)’는 교인이 전국 기독교인의 10%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제 멋대로 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3. 메신저의 삶을 사는데 쉽지는 않으나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예레미야가 가서 외쳐야 할 사람들은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유다 왕들이고, 귀인들과 제사장들과 그 온 백성들입니다. 누구 하나 인간적으로 볼 때 예레미야 보다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고, 예레미야의 말을 듣기 보다는 그를 쉽게 처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예레미야를 진흙구덩이에도 쳐 넣고, 그의 외친 말씀도 다 찢어서 불태우기도 하고, 제멋대로 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외쳐야 했습니다. 그가 본 것을 전해야 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알려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제 무엇인가 외쳐야 하는데 두렵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1장
 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
    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18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예레미야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죽던 말던, 상관 않고, 무지 막지하게 우릴 보내시는 그런분은 아니십니다. 하난님은 예레미야를 그들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 같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쳐들어 와도 예레미야를 이기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아마 방사능도 통과 못하는 저 깊은 지하의 밀납된 방처럼 든든하고 안전하다고나 할까? 당시의 무기로 어떻게 놋으로 된 성벽을 공격해서 성공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든든하게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은 렘 15:20절에 한번 더하십니다. 어떻게 예레미야를 이렇게 만드시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는 것이다. 

인기 있는 스타워즈의 영화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말 중의 하나는 “힘이 너와 함께 있기를”입니다. 주로 제다이들에게 사용되는 말이었습니다. 비록 공상에 지나지 않지만....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는 진짜 실제적인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힘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힘에 대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선지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으로 선지자들이 바다를 가르고, 애굽의 군사들이 바다에 수장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는 사람, 그는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하나님이 함게 해 주시는 줄 알아야 한다. 

적용)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이 우리를 잡고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위험이 닥쳐도 바른 메센저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마귀가 기왓장처럼 많이 달려와도 하나님이 함께 함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것이다.”고 말한 것처럼 담대해야 합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을 죽여서 성밖에 던져도, 하나님이 그를 살리시니 바울이 다시 옷을 털고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며, 세상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람, 사명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과 타협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까?


결론)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오래전부터, 특별한 뜻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엄중한 뜻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시는 것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빠져서 사명을 잊어버리거나, 세상이 두려워서 움츠리거나 하면 우리는 자칫 의미없는 인생을 살다가 한인생 마치게 될 것입니다. 우린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것으로 하나님께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으로 세상에 전해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니 지금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전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께서 보여주는 것을 보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증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주님이 보여주신 것, 아주 분명하게 알게 해 주신 것을 증거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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