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리스도
행 4:5-12
한성훈 목사(살림교회)
도 입
중국의 고사성어 중에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이 있는데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서 허세를 부린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호랑이가 여우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여우가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보게. 나는 옥황상제로부터 모든 짐승들의 왕으로 임명받았다네. 만일 나를 잡아먹는다면 하늘의 뜻을 어긴 것이 되어 천벌을 받을 것일세. 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려거든 내 뒤를 따라오게. 누구라도 나를 보면 도망갈 테니까.” 여우의 말대로 호랑이는 여우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실제로 만나는 짐승마다 여우를 보고서는 놀라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호랑이는 여우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짐승들이 도망간 것은 여우 때문이 아니라 여우 뒤에 서 있는 호랑이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의 배경
우리는 힘 있는 사람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사람을 가리켜서 호가호위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당당하게 심문을 받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심문을 받게 된 이유는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고쳐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장애인은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고 하루하루 성전 앞에서 구걸하면서 연명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이 장애인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크게 놀라면서 베드로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고,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 주변에 모여듭니다.
사람들이 경이로운 눈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고 있을 때 어쩌면 베드로와 요한은 그런 시선을 즐기면서 예수님은 은근 슬쩍 감추고 호가호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자로 엄청난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을 주목해 보는 사람들에 대해 일침을 가합니다. 3장 12절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자신들은 이런 기적을 일으킨데 대해 아무 기여한 바가 없다고 선을 긋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출동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못하도록 감옥에 집어넣습니다. 4장 4절에 보니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이 남자만 약 5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경험이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부터 예수님과 충돌을 빚어왔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나고 종교적 영향력이 축소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튿날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기구인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사장 그룹과 유대인 각 지파와 지역의 대표인 장로들, 그리고 율법학자인 서기관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통하여 로마제국의 허락 하에 부분적인 자치의결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형에 처할 권한은 없었지만 감옥에 가둘 수 있는 권한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였다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킨 기적 사건에 종교지도자들이 큰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앞에 두고 그들이 일으킨 기적에 의혹을 제기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고 묻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물은 이유는 베드로와 요한이 악한 영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일으켰다고 몰고 가서 그들이 하나님과 무관한 이단사설을 가르치는 자로 낙인찍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귀신을 쫓아낸 일을 두고도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하한 바가 있습니다(막 3:22).
기적을 일으킨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자 베드로는 이렇게 답합니다. “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절)”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전혀 주눅 들거나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그 장애인의 몸과 마음을 구원한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사실 종교지도자들이 제일 싫어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었는데 베드로는 주저함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자칫하면 이런 발언이 종교지도자들을 자극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더욱 위태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베드로는 개의치 않습니다.
중보자 그리스도: 유일성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는 어느 자리에 있든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장애인을 일으켜 세울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평생 동안 다리를 쓰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장면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몰려들자 그들은 또다시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6)” 그리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니까 그들을 가두어 두고 심문했던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들은 어딜 가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고 전했습니다. 만일에 사도들이 자기 영광을 추구했다면 예수님을 앞세워서 호가호위 하려고 했겠지만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했던 종교지도자들은 어떠한 자들입니까?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앞세워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한 자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손에 넣고서는 성전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여서 성전 귀족 노릇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지방의 토호세력이었는데 율법준수를 강조하며 스스로 거룩한 체 하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자 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정통한 학자들로 율법의 세부 규정을 만들어 백성들을 통제했고, 율법의 정신보다 법조문 자체에 얽매이도록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높은 신분에 오르거나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오는데 장애물 역할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 52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이런 사람들은 남의 권위나 힘을 이용해서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이렇게 호가호위 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교황을 비롯해서 로마교회의 사제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권위를 마치 자기 것처럼 가로채려 했습니다. 교황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여기면서 온 교회의 수위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원래 교황은 로마를 감독하는 주교인데 여러 지역의 주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부터 로마 주교는 다른 주교들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로마의 1대 주교는 베드로인데, 예수님이 ‘베드로(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셨기 때문에 로마교회가 모든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주교를 다른 주교들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름도 교황이라고 바꾸더니 나중에는 실제로 모든 교회와 주교를 관할하는 위치에 오릅니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면서 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드로만 특별한 인물로 내세울 이유가 어디 있으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교황을 세우셨다는 성경적인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열두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나머지 사도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고 증거 할 뿐입니다. 교황제도가 등장한 이래 교황은 마땅히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이 얼마나 가로채 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도 하나님 이름 팔아서 호가호위 했듯이, 교황 역시 그리스도를 앞세워서 호가호위를 하였던 것입니다.
중세의 로마교회 사제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신자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사제들에게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당시에 영적으로 무지했던 신자들은 사제들의 가르침대로 죄를 지을 때마다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였고, 사제들에게만 사죄권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뿐인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제들이 끼어들어서 호가호위를 한 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일으켜 세운 기적을 일으켰지만 그것이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밝힙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동시에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오는데 방해되는 세력이 언제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에도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는커녕 훼방꾼 노릇을 하였고 사람들을 이용해 먹기 바빴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황을 부정하며 나온 것이 개신교인데 어찌된 일인지 교회 안에 작은 교황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목회자들 가운데 교황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자’ 노릇을 하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교회 직분이 마치 위계질서인 것처럼 ‘집사 위에 장로, 장로 위에 목사’라는 피라미드 구조를 만들어 놓고 목사를 잘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 가르칩니다.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할 삼위 하나님은 제쳐두고 목사 자신이 예배의 주인공이 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대형교회 예배실황을 보니까 예배 중에 담임목사의 일대기를 보여주면서 하나님이 더욱 크게 쓰시는 종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기도하자는 영상이 나와서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예배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자리를 인간이 가로채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들어야 할 목회자가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고 있으니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게 아닙니까?
우리나라의 대형 교회들은 대부분 담임목사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담임목사들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들의 은퇴시기가 되면 교회들은 큰 고민에 빠집니다. 담임목사가 은퇴하면 교회가 흔들리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임목사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그의 아들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물려주려 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담임목사가 은퇴한다고 교회가 휘청거린다면 건강한 교회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목회 세습을 해야 할 정도라면 그 토대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목사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목사의 교회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교회인지 잘 분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호가호위하는 목회자도 문제이지만, 그런 목사를 추종하는 교인들도 문제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 참된 목자인지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이미 죽은 목사를 그리워하면서 그 목사가 생전에 남긴 영상설교를 보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만이 드러나지 않고 특정 인간이 높임을 받는다면 올바른 교회라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가지만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달아난다고 하였습니다(요 10:3-4). 진정한 목자의 음성을 잘 분별하여 따라가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중보자 그리스도: 충분성
이 뿐만 아니라 당시에 신자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데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무지했던 중세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여겨서 예수님께 직접 나가기보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통해 기도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마리아뿐만 아니라 각종 성인들도 기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그들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갑니다. 성인들의 유골이나 그들이 지녔던 물건들을 성물로 여기면서 그것 자체에 신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외에 사족이 붙는 것은 예수님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으로는 불완전 혹은 불충분하기 때문에 마리아도 추가하고, 많은 성인들과 성물들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뿐만 아니라 인간의 선행도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선행이 천국에 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노릇입니다. 충분한 선행을 쌓지 못한 이들은 부족한 공로만큼 연옥으로 가서 고통을 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로마교회가 인정한 성인들은 자신이 구원받고도 남는 공로가 있는데 교황이 이 공로를 나누어줄 수 있고, 이 공로를 획득하는 사람은 바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면죄부를 로마교회가 팔게 된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제쳐두고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에 도달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면죄부를 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고행과 금식 같은 자기 노력을 추가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 시대에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율법의 굴레에 가두어버렸듯이, 중세시대에도 사제들이 ‘구원 얻으려면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된다’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실상 교회 강단에서는 ‘바르게 살라’고 하는 도덕적 윤리적 설교가 판을 치고 있고, 교인들도 새벽 기도, 큐티, 주일 봉사 같은 자기 열심으로 공로를 쌓으려 합니다. 이런 공로주의에 빠져 있으면 자신이 신앙적 열심을 낼 때면 구원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신앙이 침체기에 있을 때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는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자꾸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안심이 됩니다. 이런 신앙의 모습 뒤에는 그리스도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 뒤에 뭔가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 어두움이 깊어가던 중세교회에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자들을 통해 죽어가던 교회를 일깨우셨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내세웠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충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황도 목사도 중보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 외에 구원에 이르는 다른 어떤 수단도 첨가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가 구원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습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는다’고 정확하게 알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부지불식간에 자기 공로로 구원을 따내려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려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내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따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데도 거기에 뭔가 덧붙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빈 손 들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겸손히 그리스도의 공로를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 첨가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모든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변해도 오직 그리스도
오늘 본문 11-12절에서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장애인을 예수님 이름으로 고쳐준 사실에 대해 애써 폄하하고 무시하려 했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쐐기를 박는 말을 합니다. ‘당신들이 건축가가 버린 돌처럼 내동댕이쳤던 그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 베드로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한 발자국도 걷지 못했던 장애인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그분은 죄로 오염된 우리 영혼도 회복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거기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에 대해 외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당신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외면하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외친 것입니다.
사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오늘날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사상적인 흐름이 되면서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면 무례한 사람처럼 비쳐집니다. 이것이 종교로 들어오면 절대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가 됩니다. 각기 다른 종교들을 존중하면서 이해하고 포용해주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다른 주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주의 백성들은 ‘오직 그리스도로’를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곧 세상의 가치관과 정면충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종교에 대한 가치관을 조사한 바가 있는데 "특정 종교 뿐 아니라 여러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항목에 "그렇다"고 응답한 기독교인이 30.2%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 기독교인의 약 삼분의 일이 ‘오직 그리스도로’ 구원받는다는 믿음을 부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로마 가톨릭 같은 경우는 1960년대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선언한 바가 있고, WCC에 속한 자유주의 교회들도 타종교와의 대화를 추구하면서 기독교에만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월 초파일에는 교회나 성당에서 석가의 탄생을 축하하고, 성탄절에는 절에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이미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볼 때는 종교 간에 이런 교류는 하나의 아름다운 모습처럼 비쳐집니다. 이럴 때 ‘진리의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우리는 종교 간의 평화를 저해하는 독선적인 집단으로 매도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한다고 해서 성경의 가르침이 달라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대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전수해준 그대로 진리는 증거 되어야 합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의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강력하게 전하지 않는 교회들이 늘어갑니다. 그 대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기 위해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예배에 많이 도입하고 평안과 위로의 메시지가 난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일이며, 교회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따름입니다.
이미 사도들도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질적이고 반감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당시에 유대인들은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여겼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너무나 끔찍한 사형 틀이었기 때문에 생각조차 하기 싫은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입니다(고전 1:24). 그 사실을 믿었던 바울은 그렇게 거리끼고 미련한 복음을 가지고 로마 제국을 변화시켰습니다.
지금도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너무 노골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고 강조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교회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강단을 무대로 고치고, 선명한 복음 대신에 마음의 위로를 주는 메시지를 전했던 미국교회를 보십시오. 과연 교회가 부흥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문화적 요소들을 두루 갖추었던 로버트 슐러 목사가 세웠던 크리스털 처치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재정적인 파산을 맞이해서 그 건물이 로마 가톨릭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한국교회도 세상의 흐름을 좇아가다가는 이런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 복음만이 교회와 세상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맺음말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세상 법정 앞에서도 당당하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외쳤습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만이 드러나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은 아무리 종교 간의 일치와 화합을 주장해도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 구원의 길은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 지난 2천 년 동안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수해 준 복음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라는 이 신앙을 굳게 믿고, 당당하게 증거 하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