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권위의 원천으로서의 ‘오직 성경’
안재경 목사(온생명교회)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로마교회가 온갖 종류의 미신과 불신앙에 빠져서 거짓교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 거짓교회에 속한 신자들의 구원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중세 로마교회는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신앙생활을 독려했다. 그 독려는 참된 경건을 함양시키도록 한 것이 아니라 거짓된 종교성을 부추기는 것과 다를 바가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한 것이 아니라 신자 자신들의 공로와 업적을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중세교인들은 성당 정문 티파늄에 새겨진 최후의 심판장면에 늘 압도당했고, 성당에 있던 성상, 성화, 성유물을 통해 종교성을 지속적으로 자극받았고, 미사에 참여하여(미사의 요소인 떡과 잔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고 믿었기에) 물질을 숭배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리고 1년에 최소한 한번은 사제에게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하므로 자신들의 공로로 죄를 씻어보려고 했다. 이렇게 중세시대에는 종교성은 넘쳐났지만 정작 성부께서 보내어 주신 아드님에 대한 지식, 즉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공로라는 것을 간과했다. 로마교회는 1000년 이상에 걸친 역사를 자랑하면서 교회가 만들고 갖추어온 온갖 종류의 전통을 제시하면서 교인들을 이끌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아들들이면서 성경을 발견하므로 미몽에서 점차로 깨어났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외에 다른 그 어떤 전통도 신자에게 효력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말해서 ‘성경의 재발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유다의 왕이었던 요시야에 대해 볼 수 있다(왕하 22,23장). 그는 성전을 보수하는 일을 지시하는데, 그 와중에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한다. 그 책을 읽고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되어서 개혁을 시작한다. 개혁은 오직 말씀으로 인해 시작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사례라고 하겠다. 왕은 그 말씀을 듣자마자 자기의 옷을 찢었다. 회개했다. 중세시대에도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는 것은 흔한 모습이었다. 이게 어떻게 다른가? 요시야 왕은 모든 백성들을 불러 모아 그 말씀을 들려준다. 그리고는 성전을 포함하여 유다 전역에 있던 우상들을 깨어 부수기 시작한다. 개혁은 종교성을 부추긴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바로 이렇게 성경을 깨달으면서부터 분연히 일어섰다. 오늘날도 ‘오직 성경’이 우리의 교회건설, 신앙생활에 근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직 성경’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맥락을 살펴보자. 이단들도 ‘오직 성경’을 강조하고 있는 판에 말이다.
1. 성경과 권위종교개혁의 첫 번째 구호라고 할 수 있는 ‘오직 성경’은 당시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왜 ‘오직 성경’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 ‘오직 성경’을 권위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성경에 ‘오직’이 들어간 것은 성경이야말로 최종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권위라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이 권위의 문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좀 더 센 발언권을 말하는 것 정도가 아니었다. 중세시대에는 권위에 모든 것이 달렸다. 최종 권위를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 최종권위에 호소하면 모든 논의, 논쟁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1) 로마교회의 권위
중세시대에는 권위에 대한 이해가 분명했다. 물론, 어떤 권위가 최종적이냐에 대한 이해는 제각각일 수 있었지만 말이다. 권위에 교회 전체가 달려 있었다. 신자가 구원을 개인적으로 확신하는 것도 바로 이 권위의 문제에 달려 있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다음과 같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물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내가 자신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최선을 다한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참이라는 것을 무슨 권위에 의지해서 알 수 있는가?” 그는 개인적인 확신에 대해서 무슨 권위에 의지할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확신조차도 어떤 권위에 호소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권위가 없는 곳에 호소해서 확신을 얻었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중세 로마 교인들에게 당신이 구원받았냐고 물어보면 ‘나는 몰라요. 우리 본당 신부께 물어 보세요’라고 답했다지 않는가? 권위 있는 분에게 물어보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권위가 중요했다. 성경의 문제도 결국은 권위의 문제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하겠다.
로마교회는 성경에 어느 정도의 권위를 부여했을까? 로마교회도 성경을 유일하게 권위 있는 책으로 생각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중세의 성경이해에는 이성과 계시의 관계 문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세신학은 이성의 영역과 계시의 영역을 나누었다. 이 이원론은 본성과 은혜의 이원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2층짜리 건물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1층이 본성이라는 층인데, 여기서는 이성이 작동한다. 2층은 은혜라는 층인데, 여기서는 믿음이 작동한다. 이것을 성경에 적용해 보면 우리가 이성적인 작업을 통해 성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문자적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문자적인 뜻 배후에 더 깊은 뜻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상징적인 해석, 도덕적인 해석, 종말론적인 해석 등이 그것들이다.
신학자들은 어느 정도 성경을 알았지만 일반 교인들은 성경을 전혀 몰랐다. 서방교회인 로마교회의 언어가 라틴어였는데, 일반 대중들은 라틴어를 몰랐기 때문에 성경 자체를 읽을 수 없었다. 성당 내부의 온갖 기구들이 신자들의 신앙을 고양시키는 시각자료역할을 했다. 성상, 성화, 성유물이 그것들이다. 신자들은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로마교회는 보는 예배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이들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들도 분명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선가 성경은 뒷자리로 밀려난다. 신학자들은 요즘 용어로 치자면 조직신학에 치중하여 신학적인 항목에 대해 주석을 다는 것에 치중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뒤떨어진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대학교수로 임명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기 전에는 중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로마교회에 있어서 성경은 부차적인 권위밖에 가지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너무 쉽게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대교회가 중세보다 나은가 라고 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2) 교회의 권한
중세 서방교회는 권위와 관련하여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한다. 하나는 권위(auctaritas)이고, 다른 하나는 권한(potestas)이다. 이것을 직분에 비긴다면 직위와 직분의 구분으로 보면 어떨지 모르겠다. 직위라는 권위에서 직무라는 권한이 나온다고 보면 되겠다. 교회, 그리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주교의 권위에서 여러 가지 권한이 나온다. 대표적인 권한이 바로 죄를 사하는 권한이다. 성례집전의 권한도 있다. 주교와 주교의 위임을 받은 사제 외에는 성례를 집례할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프라하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는 로마교회가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들이 꾸며낸 것이라고 보았다. 얀 후스는 ‘교회적 순종은 성경의 명확한 권위를 떠나서 교회 사제들이 꾸며낸 것에 따른 순종이다’라고 말했다. 콘스탄츠공의회에서 바로 이 권위에 대한 반기를 분명하게 지적하면서 그를 정죄하고 화형에 처했다. 얀 후스와 그 이전의 몇몇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된 이 권위에 대한 숙고에서 터무니없이 높아진 권위를 무너뜨리는 일이 일어났다.
로마교회의 관점에서 보자면 종교개혁은 기존교회의 권위를 파괴한 운동, 그리하여 사회질서 전체를 어지럽힌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은 기존의 권위를 무시하고 무질서를 조장한 운동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부여하신 원래의 권위를 높인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은 권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졌기에 교회를 새롭게 하고, 신자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권위를 확보한 것이었다. 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무엇보다 강조했다.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보다 높다는 말인가? 그렇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와 성경을 대립시킨 것이 아니다. 개혁자들은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는 그 성경으로 인해 교회가 세워졌고, 성경을 받은 교회가 권위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개혁자들을 통해 성경을 보는 눈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고, 교회를 보는 눈마저 제대로 가지게 되었다.
2. 성경과 전통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성경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경이 무엇보다 우위에 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도 견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통(paradosis)의 필연성’이다. 그들은 성경‘과’ 전통을 말한다. 성경과 전통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 로마교회와 개신교회의 입장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개신교회도 전통을 아예 무시하지는 않는다. 개신교회는 중세 로마교회의 전통으로부터 나왔지 않은가? 개신교회는 하늘에서 한 순간에 떨어진 교회가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과 전통이 자연스럽게 양립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성경이 수많은 전통을 수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대로, 전통은 성경을 포함하여 더 광범위한 것이 아닌가?
1) 전통의 중요성
전통은 기독교신앙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주는 것을 가리킨다. 이전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모든 기독교 유산을 다 가리킬 수도 있다. 전통이라는 것은 없을 수 없고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밖에 없다. 전통을 무시하는 교회는 교회의 역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무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전통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가지고 걸고 넘어졌다(마 15:1-9). ‘장로의 전통’을 어겼다고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들은 너희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교회의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화하여 적용하고 지키려는 노력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거스르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모든 전통이 다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교회에는 전통이 켜켜이 자리 잡고 있다. 교회는 전통 없이 설 수 없다. 니케아 신경에 위하면 교회는 사도적인 교회인데, 그 사도적인 교회는 사도적인 전승을 온전하게 받고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로마교회가 주장하듯이 교황이 베드로의 교황권을 계승하고 있다고 해서 사도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사도적 전승위에 서 있는데, 성경은 복음 자체를 사도적 전승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너무나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신이 전하여 준 전통을 잘 지키고 있는 것 때문에 칭찬했다(고전 11:2).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자신이 먼저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그 받은 것을 전하여 고린도 교회가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15:1-4). 이게 바로 전통이다. 교회가 받은 복음,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전통위에 서 있다. 구전이 기록을 앞서듯이 전통은 성경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에서 전통이 없을 수 없다. 성경이 하늘에서 한 순간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에 구전의 형태로 존재하던 때가 있었다. 교회에도 믿음을 위한 다양한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로마교회에서는 이 전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록된 성경과 기록되지 않은 전통을 나란히 둔다. 기록되지 않은 전통이라고 하지만 고대로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이며, 신조를 포함하여 교황의 회칙 등이 이 전통에 다 포함된다. 로마교회는 ‘오직 성경’이 아니라 성경에 전통에 포함시킨다. 즉, 그들은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을 지나치게 편협한 주장이라고 본다. 신약성경에서도 복음을 종종 전한 것, 그리고 받은 것이라고 묘사하지 않는가?(고전 11:2, 23; 15:3) 이렇게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 다 기록된 것은 아닐 것이다.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 전통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다.
2) 전통1과 전통2
로마교회가 성경을 무시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전통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로마교회는 전통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부들에게 호소했는데 그것의 시작이 동방교부였던 대 바실(330-370)이었다. 그는 ‘성령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성경과 전통의 관계에 대해 최초로 언급했다. “교회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우리는 일부는 기록된 원천으로부터 받았다. 한편, 다른 것들은 사도적 전통을 통해서 비밀스럽게 우리에게 전수되었다. 두 원천은 동일한 힘을 가지고 진정한 신앙을 위해 봉사한다. 어느 누구도 둘 중의 어느 하나를 부인할 수 없다. 교회의 의식에 조금이나마 친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를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바실은 예배전통에 관해 언급하면서 전통과 성경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교회는 정경의 기록과 사도들의 계승으로 인해 전해져 오는 구전전통 양자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정경만이 아니라 전통도 동일하게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바로 성경과 더불어 전통을 강조하기 시작한 계기이자 근거가 된 것이다. 예배의 문제가 전통과 성경의 관계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것이 숙제인데, 예배의 문제에 있어서 오직 성경을 어떻게 적용해야할 것인가가 실제적인 문제인 것이다.
중세가 깊어지면서 성경과 전통을 통일성있게 보는 관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소위 말하는 전통1(T1)과 전통2(T2)의 분리였다. “전통1”은 성경의 우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전통은 성경에 의존적이라는 생각이다.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전통의 권위는 항상 성경에 매여 있는, 즉 성경의 시녀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전통은 항상 성경에 종속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회복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전통2의 입장이 부각되었다. 전통2의 입장은 하나님의 계시가 두 가지 통로를 통해 주어진다고 보는 입장이다. 하나가 성경이고, 다른 하나가 전통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성경은 무오하고 유일한 계시가 아니다. 성경이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성경은 교회전통의 보충을 받아야만 교회를 위한 충분한 계시가 될 수 있다. 성경이 유일하고 충분한 계시의 근원이 아니라 전통의 보충을 받아야 한다면 전통이야말로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로마교회는 개혁자들이 교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비난했다. 개혁자들은 자신들이 교부들이 가진 전통1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항변했다. 개혁자들은 로마교회가 전통을 버렸다고 보았다. 전통2의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전통1의 입장을 버린 것이다.
1000년이 지나면서 중세말까지 로마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서서히 무시하더니 급기야 전통을 성경 위에 두었다. 이제는 전통이 성경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모인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최종적으로 공인한 ‘트리엔트 신앙고백’에서는 개혁자들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나는 교회의 사도적이고 교회적인 전승들과 기타 관습들과 규정들을 확고하게 인정하고 받아 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인 거룩한 교회가 고수하였고 고수하는 의미에 따라 성경을 인정합니다. 성경의 참 의미와 주석에 관하여 판단하는 것이 교회의 과업이며, 교부들의 일치된 동의에 따르지 않고 다르게 성경을 이해하거나 해석하지 않겠습니다.” 종교개혁을 의식하여 로마교회는 의도적으로 전통을 성경에 앞세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교회의 기타 관습들과 규정들까지도 성경보다 앞세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교부들에 호소하면서 전통을 성경보다 앞세운 것을 거부했다. 개혁자들은 성경과 전통을 대립시키지 않았다. 그들도 거룩한 전통이 없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전통이 성경과 나란히 권위를 가진다면 성경의 권위를 아예 무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3.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
1) 루터의 오직 성경
루터는 독창적인 신학을 한 것이 아니라 성경과 정통교회의 교리를 올바르게 설명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모든 신학 작업은 성경의 권위에 의존해 있었다. 중세가 깊어지면서 성경은 부차적인 중요성, 혹은 부차적인 권위밖에 가지지 못했는데 루터의 모든 신학 작업이 성경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다. 루터 이전에는 ‘오직 성경’이 주창된 적이 없다. 이것에는 그의 고해신부인 슈타우피츠의 영향이 컸다. 루터가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에서 자신의 죄에 인해 너무 심한 고행을 하기 때문에 그에게 다른 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교수로 보내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중세의 아들이었지만 시편을 연구하면서 시편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중세의 틀을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신약성경 중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가르치면서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그리스도를 통해 그는 거룩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는 성경이 모든 권위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루터가 1517년에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문에 면벌부를 반박하는 95개조를 내걸었는데, 이 면벌부는 고해성사와 관련이 있다. 고해성사는 죄에 대한 벌을 없애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힘든 과정을 간편하게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면벌부였다. 돈으로 벌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고해성사를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그는 먼저 마음으로 통회(contritio cordis)하고, 다음으로 입으로 고백(confesio oris)하고, 그 다음에는 사제가 정해준 벌을 행위를 통해 보속(satisfactio operis)한다. 이 모든 과정이 다 충족되면 사제는 죄가 씻어졌다고 선언(absolutio)한다. 루터가 고해성사를 비판한 이유는 첫 번째 세 가지의 일이 철저하게 인간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충족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용서의 선언을 한다면 용서를 선언하는 말씀은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죄지은 신자가 자기의 노력으로 스스로 죄를 용서받을 공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고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신자가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용서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있어서는 말씀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고해성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도 사제가 선포하는 용서의 말씀이다. 그 용서의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용서선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요, 창조의 말씀이라고 보았다. 말씀이 창조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신자가 용서받을 조건을 다 갖추었기 때문에 사죄의 말씀은 단순히 기계적인 선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용서의 말씀 자체가 창조의 능력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루터의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구원은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조건을 갖추는 공로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적으로 선포하는 말씀이 창조의 역사를 일으킨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루터교회에서는 지금도 예배시에 죄를 공적으로 회개하고 용서의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 공적인 말씀선포야말로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가지려고 개인적으로 애쓰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신자에게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있어서는 말씀이, 성경이, 약속이 창조의 능력이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말씀은 약속이었고, 이 약속의 말씀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창조하는 능력이 있는 말씀이었다. 말씀이 없는 것을 있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루터가 고백한 ‘오직 성경’이었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오직 성경’
개혁자 칼빈은 개혁에 동참하고 난 이후에 조국 프랑스에서 쫓겨나 난민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는 학자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제네바에서 발목이 잡히면서 그는 죽는 순간까지 목회자로, 설교자로 살았다. 그는 거의 매일 성경을 설교했고, 목사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성경의 사람으로 생활했다. 그는 성경 전체를 설교하고 가르치기를 원했다. 그는 『기독교강요』를 통해 성경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밝힌다. 『기독교강요』 초판에서는 루터의 입장을 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이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바로 율법에 대한 해설, 즉 십계명을 해설한다.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을 언급하고 난 다음에 이 지식을 바로 성경과 연관시킨다. 사람이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있지만 성경이라는 안내자와 교사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권위의 확립에 필수적인 것은 다름 아닌 교회의 증거가 아닌 성령의 증거라고 말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논하는 가운데 십계명을 해설하는데, 십계명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설하는 귀한 모범을 보인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셨지만 복음 안에서 분명하게 알려지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로 이어서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논한다. 칼빈은 철저하게 신구약성경을 가지고 삼위 하나님과 구원을 다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칼빈의 이런 명확한 이해와 입장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앙고백서 제1장이 바로 성경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성경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말한다. 그리고 성경 66권을 명시한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책을 영감하셨기 때문에 ‘믿음과 생활의 법칙’이다.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가 아니라 저자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한다. 교회는 성경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신앙고백서는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자기 영광과 사람의 구원 그리고 믿음과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모든 일들에 관한 하나님의 협의 전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고백한다.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명확하기 때문에 배운 사람이든지,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통상적인 방편을 합당하게 사용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도 제시하는데 그것은 ‘성경 자체’이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논쟁을 결정짓는 최고의 심판자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뿐이시다. 신앙고백서는 ‘오직 성경’을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고백하고 있다.
3) 성경무오성 논쟁
성경의 권위와 관련하여 최근에 논쟁되고 있는 것이 무오성논쟁이다. 성경의 영감을 넘어서 이제는 성경구절이 전부 무오하냐는 논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성경원문이 사라졌고 사본만이 남아있는데,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논쟁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해도 될까? 무오성논쟁은 최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고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로마교회도 무오성을 말한다. 로마교회는 ‘무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성경 자체에서 출발하지만 이것이 교회론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루터에게 있어서도 ‘오직 성경’은 성경의 무오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무오성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지만 성경의 무오성을 당연하게 전제했다. 성경이 무오하지 않다면 ‘오직 성경’은 하나의 구호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교부들도, 교회회의도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범해 왔다. 오직 성경만이 오류를 범할 수 없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참으로 누구나, 한때 그들이(교부들이) 인간들이 그렇듯, 잘못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결코 오류가 없는 성경에서 그들의 견해를 가져왔다고 입증될 때만 그들을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다.” 루터는 어느 누구에게도 최종권위가 없다고 생각했다. 교황도 마찬가지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성경만이 최종권위이다. 성경만이 최종권위인 것은 성경이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과 관련하여 작금에 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이 바로 ‘성경무오성’이다. 1978년 10월에 약 300명의 학자, 목회자, 평신도들을 소집하여 19개 조항으로 된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문”(The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을 채택했다. 무오성과 무류성과 관련하여 다음의 조항(11항)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성경이 신적 영감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무류하며, 성경이 증언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결코 그릇 인도하지 않고, 항상 참되고 믿을 만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경이 주장하는 내용이 무류하면서 동시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무류성과 무오성은 구분될 수는 있을지언정 따로 분리될 수는 없다.” 무오성과 무류성을 구분하는 것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사탄의 말이나 인간의 말, 성경기록의 오류, 과학적인 사실과의 부합성 등을 고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성경은 오류가 없는가? 성경의 문자 하나 하나가 다 무류한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권위의 문제로 돌아가야 함을 느낀다. 성경은 하나님의 교회에게 유일하게 권위가 있는 책이라는 의미에서 오류가 없고, 무류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상 언어를 통하여 자기 백성과 소통하신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것이 주장하는 바에 대하여 충실하다는 의미에서 무오하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은 문자주의를 넘어 성경이 우리에게 유일하게 권위 있는 책이라는 교회의 고백이다. 물론,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성경기록의 차이, 및 과학적 사실과의 부합성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지만 우리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
4. 성경과 교회직분
‘오직 성경’은 ‘모든 성경’(tota Scriptura)이다. 성경 한 권만으로 충분하다고 해서 성경만 읽으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만 읽으면 성경도 모른다’는 말은 우스갯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직 성경’은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다. 오직 성경을 구현하는 것이 모든 성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잘 알아야 한다(행 20:26,27). 오직 성경, 그리고 모든 성경을 위해서는 신자 개개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로마교회처럼 성경위에 교회를 올려 놓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겸손히 받드는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모든 성경을 위해서는 교회가 중요하고, 신앙고백이 중요하고, 목사직이 중요하다.
1) 로마교회의 교직제도
작금의 로마교회는 성경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까? 교황청 내에서 외계인에 대해서 인정한다든지,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를 복권해야 한다든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이 성경에 대한 이해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로마교회에서는 성경과 관련하여 무오성 (infallibilitas)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오류가 없다고 고백한다. 이 무오성이 교회로부터 생겨나지 않고, 교회의 산물이나 특전으로부터 유래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 무오성은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그 분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무오성은 전체 교회가 누리는 특권이라는 것이다. 로마교회가 무오성을 성경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결국에는 교회로 연결짓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성경과 교회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있다. 그것이 바로 ‘교계제도’이다. 소위 말하는 성직이다. 교황과 주교를 가리킨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소위 말하는 최고의 명령을 내린 것(마 28:18-20)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교회를 두 종류로 나눈다.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듣는 교회(ecclesia discens) 말이다. 가르치는 교회가 없이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 그 가르치는 교회가 바로 교제제도이다. 즉, 교황과 주교이다. 로마교회에서는 교황과 주교가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황과 주교야말로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은 무오해야 한다. 교황의 무오성은 개인이 전혀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교회와 관련하여 무오하다는 것이다. 즉, 교황의 무오성은 교회의 무오성이다. 교회는 자체적으로 무오한 것이 아니라 믿을 때에 무오하다. 여기서 교회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거론한다. 성령께서 교회를 지탱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믿을 때에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씀과 성령, 교회와 신자는 교직제도, 즉 교황과 주교의 가르침을 통해 무오할 수 있고, 그렇기에 교직제도는 무오하다. 한편 로마교회는 무오성과 무결함성(indefestibilitas)을 구분한다. 무결함성은 교회가 마지막 날까지 건전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교직제도를 통해 무오성이 무결함성을 보장한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결국은 로마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보다는 교회요, 그 교회에 주신 교직제도이다.
2) 교회의 고백
종교개혁자 루터는 로마교회이 교직제도를 아예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교직제도를 통해 마련된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교회의 전통 중 고대교회의 대표적인 삼대신경을 기꺼이 수용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 말이다. 그는 그 신경들이 공의회에서 채택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루터는 성경의 권위와 함께 신경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소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섭리하셔서 그 신경들을 작성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한편 루터는 성경과 신경의 권위가 체험을 통해 확립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얼마든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다. 교황이나 공의회조차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 루터가 어떻게 자기 개인의 체험에 권위를 둔단 말인가? 이것은 객관적인 진리를 자신의 체험을 통해 주관적으로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루터는 신앙이 항상 체험에 선행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말씀이 약속해 주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을 체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약속의 말씀의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보여주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신앙은 체험과 항상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체험, 즉 루터가 말하는 ‘영적 시련‘(anfechtung)을 통해 약속의 말씀을 확증한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는 성경과 신경만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에도 호소했다. 루터가 자신의 체험에 호소했다고 해서 객관적인 진리, 약속의 말씀을 상대화시킨 것은 아니다.
개혁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신앙고백문서들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 신경과 신앙고백서들은 신자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세상에 믿는 바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단적인 사설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지침을 주기 위해서이다. 누구나 성경을 읽을 때 이미 자신의 지식과 선입관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교회, 신앙고백을 제대로 하는 교회에 속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루터교회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을 통일시켰지만, 개혁교회에서는 지역마다 다른 고백문서들을 수없이 많이 만들어 내었다. 모든 성경을 제대로 구현하는 길 중에 하나가 바로 이렇게 고백문서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성경이 유일하게 권위가 있지만 우리는 고백문서들을 통해서 성경을 일관성있게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신앙고백서에 대한 엄격한 서명이 성경의 충족성을 위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은 큰 논쟁거리이다. 우리는 유일한 권위와 기준이 아닌 이차적인 기준으로서 신앙고백서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성경으로 신앙고백서를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 결국은 성경만이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3) 목사와 설교
모든 성경을 제대로 구현하는 길이 고백문서들의 작성 뿐만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에 달려 있다. 우리는 로마교회가 교직제도를 지나치게 높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직분을 통해서 지금도 여전히 말씀하신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주장이 밑도 끝도 없는 허튼 주장인 것만은 아니다. 종교개혁은 사제를 말씀의 사역자로 바꾸었다. 말씀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선포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에서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직분자를 세우셔서 말씀하신다. 성경은 해석을 기다린다. 목사가 공예배시간에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 목사는 하나님의 입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를 통해 지금도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름없이 연약한 사람이 티끌 중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게 하시는데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순종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고 말한다.
설교는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맡기겠다고 한 천국열쇠가 다름 아닌 공적인 복음선포, 설교이다. 공적인 복음선포인 설교시에 천국이 열린다. 선포되는 설교를 받지 않을 때 천국이 닫힌다. 설교는 이중적인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개혁자들은 이것을 체질효과라고 불렀다. 체질을 하면 알곡은 모이고, 쭉정이는 날려가는 것 말이다. 설교는 양날가진 칼과 같기도 하다. 한쪽 날로는 의사의 손에 들린 매스처럼 사람을 살리고, 다른 날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되는 것과 같다. 성경을 제대로 설교할 때는 항상 이렇게 이중적인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산 사람은 계속해서 살리고, 죽은 사람은 계속해서 죽이는 것 말이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를 풍기고,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풍긴다(고후 2:15-17). 복음선포, 즉 설교는 항상 효력을 불러 일으킨다. 종교개혁자들이 이 설교를 지금도 계속되는 예언이라고 말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목사들이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던 모임을 ‘예언모임’(Prophezei)이라고 부른 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목사들이 구약시대 예언자 노릇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안 것이다. 목사의 설교를 통해, 예배를 통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사역자를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교회가 복이 있다(살전 2:13).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읽는다는 것은 바로 예배중의 읽음을 말한다. 즉, 성경봉독을 말한다. 우리는 성경봉독이라고 하면 설교를 위한 성경본문을 봉독하는 것을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고대교회로부터 예배 중의 성경봉독은 소위 말하는 렉시오나리, 즉 교회력에 맞춘 성경봉독이었다. 구약의 본문들, 신약의 본문들을 같이 낭독했다. 구약의 역사서, 예언서, 그리고 신약에서는 서신서와 마지막에는 복음서를 읽었다. 이 복음서를 들고 들어와서 읽는 것은 ’소입당‘이라고까지 불렀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한 성경읽기는 성경봉독만이 아니라 설교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배 중에 있는 성경봉독과 설교는 같이 한 쌍으로 작용한다. 설교는 성경봉독에 매이고, 성경봉독은 설교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커다란 유익을 주지 못한다. 성경은 예배 안에 자리 잡고 있고, 예배 안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결론
우리 사회에서도 제일 시급하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권위의 회복이다. 무엇에 권위가 주어지고 있는가? 아예 권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권위가 중요하다.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권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권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위에 대한 인정이 없으면 우리 사회는 어떤 질서도 유지될 수 없다. ‘오직 성경’도 권위의 문제이다. 기독교의 어떤 교파든지 상관없이 교회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면 예외 없이 ‘오직 성경’을 말하지만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받고 있을까? 동성혼문제나 여성안수문제도 ‘오직 성경’의 문제이며 동시에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느냐의 문제이다. 성경이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은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하신 말씀일 뿐만 아니라 역사에 매여 있는, 역사에 제한되어 있는 말씀이라고 보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받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역사에 매인 말씀이 아니라 역사를 섬기는 말씀이기에 권위가 있다. 성경이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주신 말씀임과 동시에 모든 시대를 향해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권위 있는 말씀이다. 성경은 모든 역사를 섬기기에 ‘오직 성경’이다.
종교개혁은 진정한 정신은 ‘오직 성경’이었다. 진정한 개혁은 ‘오직 성경’이 아니고서는 가능할 수 없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0문에 보면 ‘자신의 구원과 복을 소위 성인에게서, 혹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데서 찾는 사람들이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믿는 것’이냐고 묻는다. 답은 다음과 같다. “아닙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말로는 자랑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한다. 예수가 완전한 구주가 아니든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이 구주를 영접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서 찾든지, 둘 중의 하나만 사실입니다.” 이 질문과 답은 로마교회를 겨낭하고 있다. 로마교회가 성인을 의지하라고 했기에, 성유물을 섬기는 자리에 섰기에 ‘오직 그리스도’를 부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질문과 답은 ‘오직 성경’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 이제는 로마교회를 향해서가 아니라 현대교회를 향해서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완전한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든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든지, 둘 중의 하나만 사실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직’ 성경은 과도한 표현이 아니라 구원을 소망하고 믿음으로 살기 원하는 교회와 신자들을 향한 유일한 안전책이다.